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1:21)

1. 성경 (요11:17 ~ 2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7)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8)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19)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0)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3)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5)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6)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7)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임)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하는 자가 가족에 국한되지 않고 조문하러 온 모든 사람도 이를 목격하게 된것이다. 이 사건을 목격하고 마치 극장의 무대에 펼처지는 연극을 보듯이 수많은 군중과 모인 무리들은 그것도 성문 곁에서 경탄에 마지 아니 할 기적의 사실을 직접 보고 나서도 당시 사람들은 언제 보았더냐 하는 식으로 곧 잊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일부러 눈을 감은 양 그들 앞에 전개되는 사건을 보지 않으려 들었던 것이다. 베다니와 예루살렘의 거리는 약 오리쯤 되었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문맥을 살펴 보면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이 사는 집은 주변에서 존경을 받고 널리 알려진 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의 친족들에게 슬픔을 가져다 주는 이상 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주변에서 문상 온 것은 도리이며 규탄의 대상이 안된다.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 마르다는 좀더 비밀리에 주님을 만나 뵙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 가까와 온 위험이 마음 속에 괴로움이 되었고 주님을 원수로 여기는 자들이 있어, 비록 갈릴리로 떠날 때 조금은 잠잠해졌지만 아직도 살기등등해 있으므로 그들이 예수님의 도착함을 들으면 광분하여 다시 소동을 일으킬 것 같아 조용히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 ; 마르다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믿음으로 따르지 못하고 자기의 감정을 더 중요시한 샘이 되었다. 물론 마르다도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한 말이긴 하다. 그러나 감정이 섞여 있었으며 자제하지를 못했다. 믿음이 있었더라면 “주께서 계셨더라면”이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고 자신의 바라는 바 소망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초인적  힘을 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자신을 설득시키려는 것은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상호 일치되도록 해야한다. 아니면 그 믿음은 말씀과 서로 충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능력보다는 육신적인 주님의 참석을 더 중요시 한 것 같다. 따라서 믿음 위에 비정상적인 감정을 혼합하여 조금은 미신적인 경지에 이를 정도로 되었다. 그녀의 태도는 빛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약간의 서광만이 보일 뿐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 주님은 마르다의 모든 잘못을 용서 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따라 마르다가 요청한 것 이상의 것을 약속하신다. 곧 다시 살게 된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다의 지나친 소심성을 볼 수 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를 약화시킨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희망을 걸고 기다리는 것은 자기 권한 밖의 일을 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경고를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손을 적극적으로 펴셨을 때 오히려 주춤하고 조용히 서있는 오류에 빠진다. 우리는 이 양자를 모두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헛되고 바람과 같은 희망을 품어서는 안된다. 또한 주님께서 약속하실 때 우리의 마음을 너무 꼭 닫아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하신 것 이상의 기대를 가졌었다. 그녀는 심중에 “주님께서 마지막 부활을 의미하신다면 이해합니다. 물론 저의 오라비가 마지막 날 다시 살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로 마음의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상의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한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라 칭하신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하는 것이 부활의 대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설명에 의하면 주님은 영혼의 생명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렇다면 어떠한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이 되시는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이었던 아담의 자손들을 자기 영으로 중생시키심으로써 부활이 되신다. 그리하여 그들이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비록 전에는 죽었으나 다시 살게된다. 믿음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부활을 낳게하고 영혼을 살게 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듣는자는 살아나리라”이는 믿음의 고귀함을 찬양한 귀절로서 믿음은 실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 넣어 주며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킨다.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주님께서 생명이 되신 사실에 대하여 계속해서 설명해 주고 계신다. 주님께서 한번 주신 생명은 결코 상실 될 수 없다. 주님께서 끝까지 이를 지켜 주신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써 한번 생명을 받은 후 그 후에는 혼자 상태로 버리워 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따라서 생명의 보전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능력 위에 유지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한번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신다. 신자들은 결코 죽지 아니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난 그들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며 그 안에서 항상 생명이 도시기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육신은 사망 할 수밖에 없지만 영은 의를 인하여 살게 된다(롬8:10). 우리의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된다(고후 4:16). 실로 죽음은 일종의 사망의 멍에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일을 한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마르다에게 신령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마르다의 생각을 지금의 육신적인 욕망에서 떠나게 하려는 것 같다. 마르다는 자기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답하시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생명의 창조자라고 대답하신다. 그는 하늘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의 영혼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두가지의 은혜를 의도하신 것이 틀림 없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씀하셨고 그가 주는 영적인 생명은 영혼의 소생이지만 동시에 곧 죽은 나사로의 육신을 일으키실 것을 시사하셨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님께서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사실을 믿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고백은 모든 축복을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