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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1)

1. 성경 (요10:11~18)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2)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3)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4)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5)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6)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7)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나와” ; 교회가 선하고 부지런한 목자들의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 우리에겐 더 바랄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그의 교회를 안전하고 건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목자장으로, 첫째는 자신이 직접, 둘째는 자기의 도구(사역자)를 통하여 교회를 보전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디든지 질서가 잡혀있고 적절한 사람이 다스리고 있는 곳은 그리스도께서 사실상 목자장으로 역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목자의 가면을 쓰고 사악하게 교회를 해치는 절도와 강도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이름으로 나타나든 그들을 피해야 한다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있다. 교회 내에 있는 삯군 목자들이 제거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신자들의 인내를 단련하시고 있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참된 목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출현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싫고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용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삯군이라는 말은 건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바울이 말하고 있는대로 그들이 순수한 열심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하여 시간을 때우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 비록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만 목자의 이름을 적용시키고 있지만 주님은 어떤 의미에서 그 이름을 자기가 역사하고 있는 ‘그릇’에도 함께 쓸 수 있다고 묵인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이후로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그들의 피를 아낌없이 바친 성도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선지자들도 그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교회의 구원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우리들의 나태함과 안이함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명보다 교회를 더 중히 여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의 죽음의 효능이나 열매를 논하고 있는것이 아니며 자신과 다름 사람과를 비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자기가 우리를 향하여 어떠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그의 본을 따르도록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자기의 죽음에 의하여 우리를 살려주시고 복음의 모든 내용을 수행해 주신 것처럼 사역자들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목숨을 바치는 데까지 옹호하고 그들의 피로 복음의 교훈을 인치고 그리스도께서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구언을 이루어 주신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할 공통된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 될 수는 있다. 어떤 이유로 해서 이리를대적하지 않고 회피하는 사람을 삯군이라고 간주해야 하는가? 어거스틴은 교회가 이러한 분야에서 훌륭한 사역자들을 잃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원수가 목사의 생명을 개인적으로 찾고 있을 때 그의 부재는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위험이 있으며 목사는 전체적인 유익을 위해서라기 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때문에 도피하고 있다면 이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도피는 나쁜 본보기가 되어 그가 앞으로 가져올 유익보다도 더 많은 피해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합당한 것이었다.

 

”양도 제 양이 아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을 삯군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만이 홀로 참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도 자기가 치는 양을 자기것이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속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권위를 주장하는 자세가 아닌, 자기들에게 맡겨진 것을 충실하게 돌보는 자세로 양떼를 돌본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이 귀하게 여기셨던 양을 모른척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달아나는 것은 삯군인 까닭에 양은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 삯군은 양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양이 흩어지는 것을 보아도 그 마음은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다. 품삯을 위하여 양을 돌보는 사람은 교회가 평화로울 때는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싸움이 있을때는 즉시 배신의 증거를 드러내 보일것이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 첫번째 문귀에서 주님은 다시 한번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다. 지식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와 같은 앎 뒤에는 돌보심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주님께서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두번째   문귀에서 주님은 앞서 하신 말씀을 반복해서 확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양을 아는 만큼 양은 자기를 알아 본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 아버지께서 어떻게 자기의 지혜를 아시는지에 대하여 갖가지 추리와 변론을 전개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고 무익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자기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의 보증이 되시는 만큼 자신이 아버지와 우리 둘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동시에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편에서의 의무를 요구하고 있다. 주님께서 아바지로부터 받은 모든 권한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시는 것처럼 또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헌신하시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가 자기에게 순종하고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 주님께서는 이방인을 부르실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들로서 한 몸 안에 연합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하자면 유대인들을 택하셔서 그들 주변을 의식과 예식으로 두르셔서 믿지 않는 자들과 혼돈하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그 우리의 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된 영생의 은혜로운 약속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다른 양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같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종류가 다른 양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참 목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분은 유대지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 주님은 하나님의 선택은 확실한 것이어서 자기가 구원하기를 원하는 자는 아무도 멸망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부름에 의하여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름은 효력이 있는 부름이다.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한 몸안에 모이게 되고 하나의 거룩한 교회가 하나의 머리를 가진 한 몸으로 존재한다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에게 순복할 때 그의 명령을 지키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때 질서를 잘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 물론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데는 또 하나의 더 높은 이유가 있다. 하늘에서 들려왔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자라(마3:17)”는 소리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고 아버지께서 우리와 화목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그를 사랑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주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고 말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이 자기자신의 생명보다도 그에게 더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주고 또 그들의 믿음이 크게 흔들릴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죽음에 뒤이어 있을  그 부활의 소망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제자들을 격려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위로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주님이  죽음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떼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 이 말씀은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버리지만 사람이 그의 몸에서 옷을 벗어 던지듯이 그대로 완전성을 유지한다는 뜻이든지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죽는다는 뜻이다.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심으로 그의 독생하신 아들까지 주실 정도였다는 그의 구원의 위대함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아버지의 영원한 뜻을 상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