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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요12:44)

1. 성경 (요12:42~46)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2)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3)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4)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5)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요약본)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 : 유대인들이 광란한 광포의 와중에서 그리스도를 무자비하게 배척했을 때 그들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모의한 것처럼 보였을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백성이 온통 미쳐있는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훌륭한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믿지 않는 자들의 불경건이 일단 득세하게 되면 그것이 온 몸에 전염되는 것이 세계적인 전염병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부패한 백성 중에서 때묻지 않은 채로 깨끗함을 유지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도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목격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께 대한 경멸과 불신앙이 도처에 퍼져있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교훈을 뿌리채 뽑아버리려고 발악하고 있지만 믿음이 세상에서 완전히 추방되는 일이 없도록 믿음이 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있게 마련이다.

 

”바리새인들 때문에~~~~” ;믿음과 고백을 분리시킬 때 요한은 틀리게 말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롬10:10)” 때문이다. 마음에 불붙은 믿음이 불꽃을 자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는 요한이 여기서 저 미지근하고 냉담한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간단히 말해서 요한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 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생동력이 있거나 강한 믿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소유된 백성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않고 담대한 영을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켰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이 솔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는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드러내놓고 신앙고백을 했다면 그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와 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미움을 사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의 믿음을 감추거나 가장하는 자는 누구도 스스로 자랑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무리 증오스럽다 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데서 주저하도록 만드는 겁장이는 스스로 핑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 여기에서 하나님의 최상의 예식을 부패하고 더럽게 만들 뿐만아니라 이를 파괴적인 횡포로 전락시키는 인간의 타락상이 나타나게 된다. 누구든지 교회를 멸시하면 즉각적인 처벌이 따른다는 의미에서 출교는  거룩한 법칙으로 활용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복음서 기자는 이 사람들이 어떤 미신에 의하여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 중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회피책을 쓰고 있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보다 야망이 그들의 마음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행동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사람의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 중에서 그들의 믿음을 가장하는 자들의 비겁한 행동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것인가를 유념해야 할것이다.  하나님의 판단보다 인간의 하찮은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더 어리석고 야만적인 것인가? 그러나 요한은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순전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광기로 가득차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는 모세의 담대한 믿음을 칭찬할 때에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11:27)”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그는 누구든지 그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있을 때 그의 결의가 꺽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부인하는 것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을 멀리하라! 성령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해괴한 행동이 천지가 혼돈된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선언은 그의 백성을 올바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격려하자는데 목표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의 비뚫어진 두려움을 바로잡기 원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를 요약하자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해야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께 속한 것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믿음은 하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의심에 차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리석고 가치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는 세상이 흔들리고 사단이 하늘아래 만물을 흔들어 놓고 전복시킨다 해도 믿음 위에 굳게 설 줄을 알아야 한다.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 여기서 보는 것은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각종 혼란에 계속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양심을 참으로 진정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불러 아버지께로 인도하고 있다. 믿음은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반이 확실하고 안전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에게서 참으로 알려질 때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빛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사람 위에 서 있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께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된다.  그 때에 믿음은 그리스도의 육신을 넘어 그의 신성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우리 마음에 영원히 심겨져 필요할 때는 우리의 혀를 통해 담대히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 주님은 그의 제자들의 담력을 더하여 줄 목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의 확실성을 선포하고 있다.  첫째로 주님은 사람들을 어두움과 방황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도록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고 증거하고 있다. 동시에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어떻게 그와같이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복음의 가르침을 받은 후에도 불신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지 않는 자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고 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부름을 받는 축복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록 한 때 자기 안에 붙었던 불빛을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꺼버린 사람들은 더욱 핑계할 구실을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