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6:18)

1. 성경 (엡6:10~24)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0)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1)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3)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4)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5)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6)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7)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8)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19)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20)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1)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2)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2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0. 종말로 너회가~~~~" ; 바울은 그의 일반적인 권면으로 되돌아가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먼저 강건하여질 것과 용기와 힘을 불러일으킬 것을 명한다. 그것은 우리를 연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아서 우리가 그것을 대항하기에 쉽게 지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해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임재해 계시지 아니하면, 그리고 그의 손을 펴서 도움을 주시지 아니하면,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능력을 공급해 주시지 아니하면 이 권면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이렇다. '너희는 부족한 능력을 채울 수가 없다. 이는 내가 너희를 주 안에서만 강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바울은 덧붙여 설명하기를 "그 힘의 능력으로"라고 함으로써 우리의 확신을더욱 크게 증가시키고 있으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도움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비상한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면 우리는 싸움에서 우유부단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의 명령에는 분명히 없었는데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의 능력 안에서 강하라고 명한 것은 무슨 목적에서인가?' 나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권면함으로써 그들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보충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할 것을 상기시켜 주고, 동시에 만일 그것을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게 될것을 약속하고 있다. 

 

"11. 마귀의 궤계를~~~~~ 전신갑주를 입으라." ;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한 가지 이상의 도움으로 우리를 권고하시는데,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을 얻기에 게으르지 않도록 해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모두가 우리에게 하락해 주신 은혜를 사용할 때 주저하고 조심성없이 대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군인이 적군을 만났을 때 투구는 쓰고 있어도 방패를 취하지 않은 것과 같다. 바울은 여기서 그들의 안전을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게으름을 막기 위해서 군인들로부터 비유를 빌어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다. 바울은 이 말씀으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준비를 갖추어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할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무기들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다. 그러므로 무기들을 우리의 것으로 사용한다거나, 선반이나 벽에 결어두어서 잊어버리고 나서지 말아야 할 문제만 우리에게 남아 있다. 바울은 우리의 주의를 더욱 환기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외부적인 무기를 취하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암암리에 매복하여 우리를 공격해 오는 악한 원수들의 궤계가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다. 바울은 '메도데이아스/ 궤계' 라는 말을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원수의 본질을 말해 줌으로써 그들의 위험을 되새겨 보려고 한다. 바울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라는 비교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다.이것은 우리가 사람들과 더불어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임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의 힘을 대적하고 칼이 칼을 대적하는 곳에서는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 만족을 누리고, 세력이 세력을 불러일으키고,살육이 살육을 낳는다. 그러나 이 귀절의 경우는 매우 다르다. 우리의 원수들은 인간의 힘으로 대항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귀절은 전쟁의 총체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혈과 육' 이라는 말로 영적인 침입자와 대조가 되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육체가 아니요' 영에 대한 싸움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사람들은 손해를 당하면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극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우리를 사납게 만들어 사람 자체를 대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은 단지 사단의손에서 던져진 창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어리석은 욕망을 견고한 그리스도의 사슬로 묶어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원수(혈과 육)를 이기려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우리 자신은 모든 면에서 상처를 입도록 드러내 놓고 있다.혈과 육에 대한 싸움은 아무 쓸데없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해로운 싸움이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에게 곧바로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숨어서 공격하고 상처를 입히는 원수들의 은신처를 먼저 공격하여 없애버려야 한다.이제 우리는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가 보자. 바울은 우리 앞에 무시무시한원수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을 두려움으로 압도당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예리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것은 중간 입장을 생각해 볼 이유가 있다. 원수는 무시를 당하고 있을 때 그의 가장 큰 힘인 게으름으로 우리를 압도한 후 우리를 공포감으로 낙심케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싸우기도 전에 정복을 당하고 만다. 바울은 여기서 원수의 세력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열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 바울은 이미 원수를 마귀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많은 형용사들을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이 원수가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임을 깨닫도록 해주고 있다.
 
바울은 '정사와 권세 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우리를 놀라움으로 자극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당황할 것까지는 없고 다만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들을 codporpatopas(코스모크라토라스), 즉 세상의 주관자라고 부르고, 다시 '어두움의 세대 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바울이 마귀가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말한 것은 세상은 다만 어두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부패는 마귀의 왕국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순전하고 견실한 피조물 속에거할 수가 없다. 마귀는 사람이 모든 죄들을 범하도록 유흑한다. '어두움'이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민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 결과로 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모든 세상이 어두움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마귀는 이 세상의 주관자인 것이다. 로 의 상 소바울은 마귀를 '악한 영들 이라고 부름으로써 마귀의 악하고 부패함을 지적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귀에게 정복당하지 않도록 큰 주의를 기울일필요가 있다고 상기시켜 주고 있다. 형용사 '영 을 사용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원수가 보이지 아니하면 위험은 더욱 크기 때문이다.

 

 '하늘에 있는 이라는 이 말씀 속에도 역시 강조점이 있다. 우리가 공격과 습격을 당할 때우리보다 더 높은 곳에 적이 있다면 적은 우리를 더욱 괴롭고 난처하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위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다.옛날 마니교에서는 의 커절을 자기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원리를 증거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박은 간단하다. 그들은 마귀를 dutideou(안티데몬) : 으로 보고, 의로운 하나님도 큰 노력 없이는 그를 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바울이 마귀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도 대적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보응으로 악한 자들을 대적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신다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함에 있어서 무슨 권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귀절의 말씀은 마귀가 피조되었으며, 자신이 공중에서 중간 권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신화를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마귀에게 확실한 세력을 부여하여 그들이 그 세력을 가지고 행사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단지 그들은 대적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과 위치적으로 (볼 때 보다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 바울은 우리의 원수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우리의 창을 던지라고 말하지 않고 온 몸이 싸움을 위한태세를 갖추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이 권면에는 승리의 약속이 포함되어바울은 '능히 대적하기 위함이라 는 말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있다.갑주를 입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면 분명히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을의미하고 있다. 이 방법을 떠나서는 우리는 그들의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공격에 깨어지고 말 것이다. 2그러므로 바울은 "악한 날에 슬로모든 일을 행한 후에"라고 말하고 있다.바울은 '악한 날에 라는 표현으로 에베소 교인들로 하여금 안일함에서 깨어나 힘들고 어려움이 많고 위험한 싸움을 위한 자신들에 예비하라고 함과 동시에 승리의 소망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왜냐하면 가장 큰위험 속에서 그들은 승리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일을 '행한 후에"라는 말씀 속에서 이 승리의 확신을 모든 생활 전체에 확대시키고있다. 위험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을 것이고, 이처럼무장하여 사단과 싸우는 자는 결코 중도에서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14. 그런즉 서서....." ;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인들에게 입으라고 명했던무기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단어들의 의미를 너무 간략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들이 군인들의 장비에서 의도적으로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의()를 허리띠 대신에 흉배로 취했는가 하는 이유를찾아보려고 많은 수고를 기울이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할 일 없는 사랍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요구되는 것에 대해서 간략하게 취급하면서 이 의의 흉배를 이미 자기가 말한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고있다. 바울은 '진리 라는 말로 신실한 마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허리띠에다 이것을 비유한다. 옛날에는 허리띠가 군인들의 가장 중요한 무기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것을 신실함의 근원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복음의순수성은 우리를 모든 간사함에서 깨꿋하게 해주며, 모든 위선에서 우리의마음을 정결케 해주기 때문이다.둘째로, 바울은 '의 를 천거하며 이것으로 가슴을 보호하는 흉배로 삼기를 원하고 있다. 어떤 사랍들은 이것이 죄의 용서를 이루고 있는 값없는 의,혹은 의의 전가를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생각은 이 귀절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바울은 여기서 생활의 결백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먼저 우리들이 순결함으로 영광스럽게되고, 그 다음에는 거룩하게 헌신하는 생활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 내가 실수를 범하는지모르나, 바울은 군인들의 구두를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항상 이것을 바울이 말한 무기 가운데 하나로 알고 있었지만 일상인들은생활에 사용하는 것으로는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다. 군인들이 추위나 다른 해를 입지 않도록 그들의 발과 다리를 감쌌던 것처럼 우리도 해를 입지 않고 이 세상을 자나가려면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명안의 복음"이라고 부른 것은 그 결과를 가리킨 것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임무를 띠고 있으며, 오직 이 복음만이 우리의 양심을 명안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비 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어면 사람들은 이 말을 복음을 위해서 준비한 금지 사항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이 말을 복음의 결과라고 본다. 우리는 복음으로 모든 여행의 방해물들을물리치고 생의 싸움을 싸울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느리고게으르다. 더우기 험한 길과 많은 방해물들은 우리를 머욱 지연시킴으로써별것 아닌 조그만 대적 하나만 만나도 낙심케 된다. 의러한 이유로 바울은먼 길을 떠나는 데 복음이 가장 좋은 도구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땅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ut sitis parati)라고 한 에라스무스의 의역은 사실상 적합하지 못한 말이다.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틀 가지고" ;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상 하나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두 가지 역할로 나누고 있다. 나는 이것이 하나라고 본다. 왜냐하면 말씀은 믿음의 대상이요, 따라서 믿음이 없이는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말씀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 차이점을 분간하기를게을리하지 않고 군인들의 무기에 자연스럽게 적용시켜 말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8절에서 믿음과 사랑을 모두 흉배라는 이름에다적용시키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은 여기에서 다만 모든 손에 균형잡힌무장을 한 사람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또 바울이 믿음과하나님의 말씀을 두드러진 전쟁 무기인 칼이나 방패에다 비교한 데는 이유가있다. 영적 싸움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마귀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원수자체를 완전히 쳐부순다. 다시 말해서,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믿음으로 그 효력을 발생한다면 우리는 원수를 막아내고 또 도망가게 할 수있는 가장 충분한 무장을 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매앗으려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필수적인 무기를 약탈하여 싸우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망하게 하려는 자들의 책동이 아닌가?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싸움에 나설 자가 아무도 없다.어느 누가 무장도 없이, 그리고 칼을 쥐지 않고 싸울 수가 있겠는가?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고." ;  바울은 여기서 어울리지 않는말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붙잡다' 혹은 '멀쳐버리다' 혹은 이와 비숫한말을 사용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멸하다 는 말은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바울은 이 말을 형용사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다음과 같다. '사단의 화전은 날카롭고 관통력이 있을 뿐 아니라 보다 치명적이고 맹렬한 위력이 있다. 믿음은 그들의 예리함을 무디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열을 식혀준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고 말씀하셨다.카드종류(:

 

"17. 구원의 투구~~~~~~말씀을 가지라." ;  내가 인용했던 데살로니가서에서바울은 '구원의' 혹은 '소망의' 투구라고 했는데, 나는 둘 다 같은 의미로본다. 우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을 향해 하늘을 바라볼때 머리는 가장 좋은 투구로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이 투구가 되는 것은 오직 소망이라는 길뿐이다.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전신갑주를 입게한 후 이제는 기도로 싸우라고 명하고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믿음과소망을 가장 훌륭하게 행사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축복들을 받는다. 간구는 유(類)개념에 속하고, 기도는 종(種)개념에 속하는 것 외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바울은 기도로써 끝까지 인내할 것을 의미하면서 "항상 힘쓰며"라고 한다.바울은 이 말씀으로 우리가 연약해지지 않도록 기쁨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말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즉각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연약해지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혹 '진실함 이라고 번역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반대할 의사가 없다.   그러면 '무시로' 란 무슨 뜻인가? 이미 끊임없는 간구를 하라고 말하고서 왜 다시 이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풀려나가고 또 우리가 기뻐하고 안일에 빠져 있을 때에는 거의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곤란을 당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께로 달려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무시로 기도함으로써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무시로 하는 기도' 란 순탄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이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강권하지 않을 때는 우리 생활의 순간은 무기력하게 된다.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우리의 형제들의 궁핍함을 우리가 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교인들 중에 곤란을 당하지 않거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치 않을 때가 있을까?  혹 우리가 당장 필요한것들로 압박을 당하지 않아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게을리하거나 냉담한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곧 우리의 형제들 중 여러가지 무거운 괴로움으로 신음하고 있는 자가 얼마나 많으며, 깊은 고뇌에 빠져 있거나 극도로 심한 고난에 처해 있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도 무기력함에서 분발하지 않으면 돌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할수 밖에 없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들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인가 하고 묻는 자가 있을 것이다. 바울사도는 비록 에베소교인들에게 경건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배제하지는 않았다고 나는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에서도 사랑의 경우와 같이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을 성도들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특별히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자기의 형제들에게서 이러한 도움이 필요 없도록 풍성하게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누가 이 기도의 필요성에서 사도 바울보다 더 역설한 사람이 있겠는가? 또 바울은 형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위선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진실로 그들의 도움을 원하고 있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하자. 그것은 자기의 입을 여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이 벙어리였던가, 아니면 두려움으로 복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있었던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바울은 자기의 훌륭한 출발이 앞날에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복음 선포에 대한 열심으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실로 우리가 이 복음 전파의 중요성과 막중함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모두 이것과 전혀 비길 바가 되지 못함을 깨닫게 될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그 가치에 있어서 매우 힘있는 사역임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말씀들의 무게를 각기 조심스럽게 저울질해 보자. 그가 쓴 '담대히' 란 말은 그리스도를 드러내 놓고 두려움없이 전파함에 있어서 우리의 자유가 두려움으로 방해를 받을까 해서이며, 한편 적극적으로 자유롭고 숨김없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요구되어진다. 바울은 그의 원수들이 자기의 말을 모호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자기를 위해 요구하는 바를 잠깐 지나가는 말이나 혹은 말 재간을 사용해서 말하지 않는다. 바울을 분명하고 강력한 고백을 일으킬 수 있도록 입을 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입이 반 쯤 닫혀지면 애매하고  혼돈된 발음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로 입을 벌려~~~~~~" ;  이 말씀은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또는 가장 적은 두려움도 없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울이 확고 부동한 것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구한 것은 그의 불신앙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바울은 불신자들처럼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과 불일치하는 방법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셨고, 따라서 약속되고 잊혀진 바 된 에베소교인들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님께서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해서 서로가 기도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 서로가 자기의 구원에 관한 관심이 다른 성도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주님께서 직접 자기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기도해 주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말씀해 주신 것을 아는 것은 적지않은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직접 허락하신 것을 거절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모든 신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기가 기도한 만큼 자기도 기도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만족을 누려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인자하심으로 다른 사람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더 이상 우리가 양팔을 벌려 맞아 들이지 않고 어떻게 그 인자하신 이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바울이 그의 형제들의 간구에 의탁하려고 했던 것이 불신앙이나 의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기도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함으로써 주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황주의자들은 야비하게도 바울 사도의 예를 들어 자기들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기 때문에 내가 말한 것은 그들과 상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사람과 어떤 교제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들의 의식이나 기도에 천사들을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직분들 때문에 사람들간의 사랑이 공여된다고 한다.
 
"21, 나의 사정~~~~~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 거짓된 기록물들은 종종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 뿐만 아니라 사려깊고 꿋꿋한 사람들까지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러한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 바울은 두기고를 보내서 에베소 교인들이 자세한 소식을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이 귀절에서 우리는 교회들을 위해 가지고 있었던 바울의 경건한 열심을 볼수 있다.  바울의 눈앞에는 항상 죽음이 떠나지 않았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하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자신의 일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최소한의 안식을 기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를 돕는 자를 추종했어야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가 않았다. 바울은 사람들을 보내서 자기가 세운 교회들을 여러 모로 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은 두기고를 칭찬함으로써 그의 말이 보다 권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나 공적인 교회 봉사면에서 그를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이라고 불렀는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보여준 충성스러움에서 그렇게 불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이러한 애매한 점은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이라고 한 것과 연관된 두 가지 표현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처음 표현은 바울에게 관계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 표현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공적인 봉사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그만한 평판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바울이 자기의 편지와 함께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않기 때문이다.

 

"23. 아버지 하나님과~~~~~평안과~~~~~~.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  ; 나는 인사말에서 평안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축복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말에 곧이어 바울이 사랑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교인들간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 사실상 문맥으로 볼 때 이 해석이 보다 좋은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평안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다. 또 바울은 이것이 은혜로, 그리고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 번 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평안에 머물러 있도록 해주고, 믿음은 사랑으로 그 연합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기도에서 믿음과 사랑은 평안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 되어진 하나님의 은사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로 이것들은 그리스도와 이것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부터 나오는 것들이다.
 
"24. 우리 주 예수~~~~~.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베푸시옵소서 라는 뜻이다. 나는 문자적으로는 '변함 없이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헬라어를 '신실함' 이라고 번역한 에라스무스를 따르고자 한다. 이 말은 비유의 미(美) 때문에 주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바울은 사람의 마음이 모든 위선을 벗어버릴 때 모든 변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질 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할 때에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오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자신의 사랑의 증거와 보증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억지로 복음을 고백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형체를 고안해 내거나 거짓맹세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바울이 그 당시에 필요한 것을 요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의 참된 진실성이 요구되는 수많은 실례들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