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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에스라9:4)

1. 성경 (에스라9장)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가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1)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2)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3)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4)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 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5)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6)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7)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8)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9)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0)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11)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12)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3)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15)

 

2. 묵상 (호크마주석)

"1. 이 일 후에" ;  - 문자적으로는 '이 일들이 마쳐진 후에'이다. 그런데 여기의 '이 일'은 (1)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가져온 예물들을 성전의 제사장에게 바친 일 및 제사를드린 일(8:33-35), (2) 에스라가 왕의 조서를 총독에게 보내어 큰 도움을 받은 일(8:36) 등 모두를 가리킬 것이다. 한편, 에스라를 위시한 귀환민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5월이었고(7:9)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그 해 9월 20일에 모으는 사건이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시간적 공백이 에스라 도착 후 4개월을 넘지 못할것이다.

 

"방백들(* , 하사림)" ;  - 이들이 어떤 신분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이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일반 백성 등 각 계층을 대표 주관하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Fensham). 이들은 에스라가 팔레스틴에 오기전에 이미 이 같은 위치에 올라있었음이 분명하다(Rawlinson, 10:14, 16).


"백성...제사장...레위 사람" ;  -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구성했던 세계층이다.여기서 다만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아니하고 계층 모두를 언급하고 있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각 계층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음을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땅 백성 - 이는 가나안 원주민을 포함한 팔레스틴 및 인근 지역의 거주민들을가리킨다. 즉,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여러 족속들이다.  떠나지 아니하고 - 여기서 '떠나지'(* , 니브델루)는 '나누다' 혹은'분리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바달'(* )의 단순 재귀형으로서, 기존의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교 및 단절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대상
23:13 ; 느10:28)이다.


"가나안...헷...브리스...여부스...아모리" ;  - 이들은 가나안 땅에서 원래부터 살고있던 원주민들 전체를 총칭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히위 족속', '기르가스 족속' 등도당연히 포함된다(신 7:1).


"암몬...모압...애굽" ;  - 이들은 가나안 땅 이외의 인근 지역에서 살던 족속들이다.그렇다면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에돔 족속'(창 36:9)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가증한 일" ;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토아보테이헴'은 우상 숭배와 같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만한 범죄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신7:26 ; 왕상    21:26 ;시 14:1 ; 53:1) 동사 '타아브'( )의 파생형이다. 본문의 '가증한 일'은 구체적으로 이방인들과의 통혼(通婚)을 가리킨다(2절).

 

"2. 그들의 딸을 취하여" ;  - 이것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여자들만 데려온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창 6:2). 즉, 그들은 자신의 딸들을 이방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12절). 그러나 여자가 이방인에게 시집가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순수성을 깨뜨릴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크게 거론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이 같은
일은 율법에서 엄격히 금지되고 있는 것들이다(출 34:16 ; 신7:3).

"거룩한 자손으로...섞이게 하는데" ;  - 여기의 '거룩한 자손'은 문자적으로 '거룩한씨'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의 '거룩한 씨'는 단순히 인종적 차별, 혹은 편견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출19:6). (2)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이방인들에 대한 빛의 사명을 부여받았다는(사 42:6) 점 때문에 '거룩한씨'인 것이다(Fensham). 한편, '섞이게 하는데'(*히트아레부)는 '보증하다' 혹은 '혼합하다', '사귀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아라브'(* )의 재귀적 사역형으로서, 자신의 유익만을 좇아사귀지 말아야 될 사악한 대상과 깊은 교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말이다(시 106:35 ; 잠 24:21).


"방백들과 두목들" ;  - 여기의 '방백들'(* , 하사림)에는 앞에 '그'를뜻하는 정관사(* , 하)가 있다. 바로 이것은 '방백' 모두가 이방인과 통혼하는죄중에 있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Fensham). 그 '방백' 중 일부는 다른 방백들의 범죄 사실을 에스라에게 고소하러 올 정도였다(1절). 한편 '두목'(*,하스가님)은 '관리'를 뜻하는 아카디아어 '사크누'에서 온 말로서 꽤 넓은
의미로서의'지도자'를 뜻한다(Williamson). 그렇다면 우리는 이 단어가 '방백' 다음에 나온다는점을 근거로 하여 '방백'보다 한 단계 아래의 지도자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Williamson). 어떤 학자는 이 '두목'을, 백성들에 의해서 선출되어 어떤 공회와 같은것을 구성했던 직분자들로 본다(Widengren). 아무튼 여기서 위의 두 단어가 나란히 언급된 것은 지도층 인사들을 포함하여 백성들의 타락이 보편적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Williamson).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  - 여기서 '죄'(* , 마알)는 '은밀하게 가리우다', '죄를 범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마알'(* )에서 온 명사이다.

 

"3. 이 일" ;  - 문자적으로는 '이 말'을 뜻한다.  듣고(*, 케삼이) - 이것은 '듣고 있을 때에' 혹은 '듣고 있으면서'(NIV,
williamson)로 번역되어도 무방하다. 이것은 에스라가 자신에게 고소하던 방백(1절)의 말을 듣고 있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음을 가리킨다. 이 같은 사실은 지도자들의 타락이 에스라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들렸음을 의미한다.


 "속옷과 겉옷을 찢고" ;  - 이것은 에스라가 극도의 슬픔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행동이다(Schultz, Fensham, 창 37:29, 34 ; 삼하 13:19 ; 욥1:20). 에스라가 이런반응을 보인 것은 (1) 지도자들을 필두로 해서 백성들이 중죄를 범했다는 사실 자체와, (2) 이방인과의 통혼에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앙적인 순수성을 상실하게 될염려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범죄가 에스라 도착 전에 이미 이뤄졌기 때문에 에스라와는 상관이 없음에도 그가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에대해서 철저한 연대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Fensham).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  - 이는 분노와 불쾌감을 표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Schultz, 느 13:25 ; 사 50:6). 이것은, 흔적이 남음으로 에스라가 공개석상에 나타날 경우 백성들에 의해서 목격될 것이라는 점에서, 에스라 자신의 의도적 행동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Fensham, Joseph Blenkinsopp).


"기가 막혀 앉으니" ;  - 여기서 '기가 막혀'(* , 메쇼멤)는 '놀라다'의뜻을 갖는 동사 '솨맘'(*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충격적 사실로 인하여 넋을 잃는 듯한 심리적 상태에 빠지는 것을 가리킨다(단 4:19 ; 8:27).

"4. 이스라엘 하나님" ;  -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 ;  - 이런 표현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자 했던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차례 사용된 바 있다(10:3 ; 사 66:2, 5). 이는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타락상을 에스라에게 보고하러 왔던 방백들을(1절) 가리킨다고 본다. 이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악에 빠져있는 사실(2절)로 인하여 두려움을 갖고있었다. 이들이 이런 두려움을 갖고 있는 까닭은,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포로로 잡혀가는 등 멸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징계의 결과였음(대하 36:12-16)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떠는'(* , 하레드)은 어떤 상서롭지 못한 돌발적 상황이 벌어진 즈음에, 그것으로 인한 좋지 못한 결과를 예상함으로써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하라드'(* )에서 파생된 단어(삿 7:3 ; 삼상 4:13)이다.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 이것은 에스라가 방백들(1절)의 보고를 접한 후 보인 부정적 반응(3절)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이다. 즉, '말씀을 인하여 떠는자'들은 에스라의심정적 반응에 동조하며, 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이같이 하였을 것이다.


"저녁 제사 드릴 때" ;  - 이것은 오후 3시의 기도하는 시간이다(행 3:1). 한편 본절의'저녁 제사'는 여기의 '제사'(* , 민하)가 주로 '피없는 제물'을 가리킨다(Davidson)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저녁에 정례적으로 드려지던 소제였음이 분명하다(Kapelrud).

 

"5절;. 추다', '자책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아나'(* )에서 파생된 것으로서어떤 외적 사건에 대해 연대감을 느끼면서 깊이 고민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레16:29, 31 ; 시 119:107 ; 사 53:7).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 이 말은 금식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 기간에도 에스라는 금식을 했을 것으로 보이나, 8:21이나 10:6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금식을 강조하지는
않은 듯하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서'(* , 쿰)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보다는 어떤 결정적 행동을 하기에 앞서 이뤄지는 의지적 결단을 강조하는 단어이다(1:5).


"무릎을 꿇고" ;  - 보통 이스라엘 사람이 서서 기도한 것과 비교한다면, 이러한 자세의기도는 자신의 겸손과 고통을 특별히 표시하는 것임이 분명하다(Williamson).


 "손을 들고" ;  - 이것은 기도할 때 흔히 사용했던 상징적 자세이다(출 9:29 ; 왕상8:22 ; 사 1:15).

 

"6.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  - 여기의 '부끄러워'(* , 보쉬터)는 (실패로인하여 스스로)'부끄러워하다', 혹은 (신뢰의 대상에)'실망하다', '당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보쉬'(* )의 파생형으로서(사 42:17 ; 렘 22:22 ; 호 10:6), (1)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워졌으나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못했다는 자책감과 실망감,그리고 (2)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에스라가 느끼는 신앙적 연대감 등을 아울러 보여주는 단어이다(Fensham). 한편 '뜨뜻하여'(*         , 니크람티)는 '부끄럽게 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칼람'(* )의 수동형으로서, 앞의 '부끄러워'와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때로는 함께언급되기도 한다(시35:4 ; 사 45:16 ; 렘 31:19). 에스라는 이러한 동의어의 반복 사용을 통하여 자신의 심정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다.


"죄악이 많아" ;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의 금번 범죄(1,2절)는 물론이고 포로로 끌려가기 전부터의 모든 범죄를 포함한다(7절).


 "정수리에 넘치고...하늘에 미침이니이다" ;  -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두 가지 은유적 표현을 대구법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보다 강화시킨다. 특히 우리는 본절 전반절에서 1인칭 단수로, 후반절에서는 1인칭 복수로 표현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5절에서도 드러나듯이 에스라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더 나아가서는 조상들의 죄악에까지 깊은 공범 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중보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는 그럼으로써타락한 무리들을 회개에로 인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7.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  - 아브라함 시대 혹은 출애굽 직후(행 7:39)에서 에스라당시까지의 이스라엘의 전(全) 역사를 가리킨다(느 9:6-35).


"우리 죄가 심하매" ;  - 이것은 포로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포로 후의 백성들과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해 준다(Fensham). 그러나 겔18장에 나오는 포로민들의 불평처럼 이 말이 숙명론이나 무책임주의를 조장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는다만 출 20:5 등에 나오는 말씀처럼, 아비가 지은 죄를 똑같이 범하면서도    회개하지않는 이들에
대한 경고일 따름이다. 따라서 강조점은 오히려 회개하고 여호와의 율례를 좇은 일에 있다(겔 18:5-9 참조).

"우리 왕들...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  - 남국 유다와 북국 이스라엘이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 강대국에 의하여 침범을 당하여 왕이나 제사장이 죽임을 당하거나 치욕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 즉, '왕'의 경우 '므나헴'은 앗수르 왕 '불'에 의해서(왕하 15:19), '베가'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서(왕하 15:29), '호세아'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해서(왕하 17:3, 6), '므낫세'는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해서(대하33:11), 요시야는 애굽 왕 '느고'에 의해서(왕하 23:29), '여호아하스'도 '느고'에 의해서(왕하 23:33), 여호야김과 여호야긴 및 시드기야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왕하 24:12 ; 25:6, 7) 치욕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었다.'제사장'의 경우도 이런 일들이 허다했었다(왕하 25:18 ; 렘 52:24).


"노략을 당하며" ;  - 이것도 왕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왕들에게 복속되었던 형태 중의 하나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명들을 가져간 일일 것이다(왕하 25:13-17).

 

"오늘날 같으니이다" ;  - 에스라가 귀환한 후에도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타국 땅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사실을 배경으로 한 말이다(Williamson).

 

"8. 잠간 은혜를 베푸사" ;  -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 일을 가리킨다(1:1). 따라서 여기의 '잠간'은 B.C. 537년의 최초 귀환 시기부터 B.C. 458년의 제2차 귀환 시기까지의 약 80년을가리킨다(Fensham). 이 기간은 패역함과 불순종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와대조된다(Fensham, Rawlinson).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  - 이것은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멸망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또한 팔레스틴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사실을 뜻한다. 다시말해서 에스라에게 있어서는 포로지로부터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자들만이 '남은 자'로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사10장 주제 강해, '남은 자 사상' 참조).

"거룩한 처소" ;  - 이것은 (1) 성전(Schultz, Williamson), (2) 팔레스틴땅(Fensham,Batten, 박윤선) 등 모두로 이해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모두 가능한 까닭은 다음문구의 주석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다.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  - 이것은 문자적으로 '우리들에게 천막의 말뚝을 주셨다'는뜻을 갖는다. 그런데 '천막의 말뚝'은 유목 생활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즉, 유목민들이 오랜 여행을 마치고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일정한 장소에 천막을 쳐야 한다. 그때 그들은 천막의 말뚝을 땅에 박아야 하지만, 아무 곳에나 그렇게 할 수없고 자신들이 법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Musil). 그렇다면 '천막의 말뚝'은 일정한 장소를 차지할, 혹은 그곳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법적 권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Fensham). 따라서 '천막 말뚝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땅 팔레스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셨음을 가리키는 셈이다(Fensham). 물론 이것은 보다 영적으로 말할 경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공고해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Williamson). 바로이 같은 점에서, 앞의 문구 '거룩한 처소'는 팔레스틴 땅과 성전 모두로 받아들여질수 있는 것이다.


"우리로...소성하게 하셨나이다" ; - 문자적으로 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의 뜻이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이라는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상태로 간주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팔레스틴으로의 귀환을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묘사한 에스겔의 사상과 서로상통한다(겔 37:1-4).

"종 노릇 하는 중에서" ; - 비록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에게 처음에는 상당한 자유의제약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결코 문자적 의미에서의 '종 노릇'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표현을 쓴 것은, (1)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서 정치적 주권을 소유치 못했으며, (2)    하나님을 섬기는종이 되는 것만이 참된 자유를 얻는 것임에도 불구하고(롬 6:18, 22) 그들은 그곳 나라의 왕을 섬기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Williamson, Fensham).
 조금 - 이것은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이나 그 후손 중, 아주 소수만 다시 본토로 돌아왔던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될 수 있다.

"9. 노예가 되었사오나" ;  - 이것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실을 가리킨다(8절). 원어상 여기의 '노예'는 앞 구절의 '종 노릇하는', 그리고 이어 나오는 '복역하는'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다.


"버리지 아니하시고" ;  - '버리지'(* , 아자브)는 '용서하다', '돕다' 등의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끊다' 혹은 '떠나다'의 의미로서, 깊은 관계 중에 있던 어떤상대를 배신하여 기존의 관계를 청산하는 행동을 가리킨다(8:22 ; 신28:20 ; 왕하 2:2; 대하 13:10).

 

"유다와 예루살렘에서...울을 주셨나이다" ;  - 여기의 '울'(* , 가다르)은'담벽'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울'이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킨다고 보고,이 사실에 근거하여 에스라의 귀환이 느헤미야에 의해 주도된 성벽완공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1) 에스라가 팔레스틴에 왔을 때는 예루살렘 성벽이훼파된 상태에 있었으며(느 1:3), (2) 이 말이 만일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킨다면 수식구인 '유다와 예루살렘에서'라는 표현이 매우 어색하며 또한 (3) '울'이라는
단어는포도원의 담장과 같은 것을 가리키며(시 80:12 ; 사 5:1-7) 대개 '성벽'은 '호마'(*     )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문자적 의미의 예루살렘 성벽을뜻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의 '울'은 영적 의미의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10. 이렇게 하신 후에도" ;  - '이렇게 하신'은 하나님께서, 범죄하여 회복되기 곤란한 상태에 빠졌던(7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다시 허락하사 팔레스틴으로 귀환하게 하신 사실(8, 9절)을 가리킨다.


"우리가...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  - 이것에 대해서는 1, 2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우리'는 에스라의 백성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인칭대명사이다(3, 6절).

 

"11절" ; . 본절의 초두에 관계대명사 역할을 하는 '아쉐르'(* )가 있음을 볼 때, 본절은 10절의 '주의 계명'을 수식하는 구절로 봐야 한다(NIV, Williamson).

 

"주께서...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  - '선지자들'은 모세 오경을 기록한 모세를포함하여(신 18:15 ; 34:10 ; 호 12:10) 이스라엘 전 역사 기간 동안에 활동했던 모든선지자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 같은 견해는, 이어지는 내용이 여러 선지자들에 대해 예언되었던 것들을 혼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주께서'는
문자적으로 '당신께서'이다.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  - 이것은 레 18:25 ; 20:22 ; 신4:5 ; 애1:17에 있는 말씀의 종합이다. 그런데 여기서 '얻으려'(* ,레리쉐타)는'소유하다' 혹은 '빼앗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야라쉬'의 부정사로서, 본 단어 앞의'가서'의 목적을 보여준다. 한편 '더러운'(* ,니다)은 구약성경에서 월경을하는 여인과의 접촉(레 12:2) 혹은 성적타락(레 20:21) 등으로 인한 의식적(儀式的)부정(不淨)의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로서 여기서는 우상 숭배 및 그것과 관련된 부도덕한 행위들을
뜻한다(대하 29:5 ; 애 1:17 ; 겔 7:20 ; 36:17). 결국 이것은그 땅의 백성과 접촉하는 일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며, 따라서 그들과의 접촉은 금해야 함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  - 이것은 신 18:9 ; 왕하 16:3 ;21:2 ; 대하 28:3 ; 33:2 등의 말씀이 종합된 것으로서 그 '땅'이 왜 '더러운 땅'인지그 이유를 말해준다. 한편, 본절에서 원용된 사항들이 대체로 신명기서의 내용이라는점은, 에스라가 신명기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시사한다(Fensham). 그리고 여기서'이방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을 가리키며(1절), '가증한 일을 행하여'(*     , 베토아보테이헴)는 '혐오하다' 혹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타아브'에서 파생된 명사와 방법을 나타내는 전치사(* , 베)가합해져서 이루어진 단어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의 번역은 매우 적절하다고 하겠다.

 

"12절" ;  본절 또한 11절과 같이 10절의 '주의 계명'을 수식한다.

 

"여자들을...주지 말고 저희 딸을...데려오지 말며" ;  - 본절은 신 7:3에서 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해서만 대부분 말하는데(2절 ; 창6:2 ; 26:34 ; 출 34:16 ; 삿 3:6) 반하여, 여기서는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음이 독특하다. 그러나 이는 오직 에스라 시대에만 딸들을    이방인들에게 시집보냈다는 뜻이 아니다. 이방인의 딸들을 데려온 시대에는    반드시    이스라엘백성의 딸을 이방인들에게 시집보내는 일도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했던 일차적 목적이 우상 숭배는 물론 그것과 관련된 타락한 이방 악습의 유입을 막기위함이었다. 신약에서도 불신자와의 결혼은 배격되고 있다(고전 7:39 ; 고후 6:14).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구하지 말라" ;  - 이것은 신 23:6에서 모세가 모압과암몬 족속에 대해서 언급했던 명령이다. 이처럼 '모압과 암몬'에 해당되는 특별한 명령인데도 여기서 이방인 전체 민족에 대해서 적용되고 있는 까닭은 (1) '모압과 암몬'이외의 다른 민족들도 또한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를 가질 만큼의 윤리적 수준을 전혀갖고있지 못했으며(사 19:1-20:6 ; 23:1-18 ; 렘 46:1-28    ; 47:1-7 ; 48:1-47 ;49:1-22), (2)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및 모압 족속과도 통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평강'의 문자적 의미는 '그들의 평화'로서 개인적 '건강','마음의 평화' 및 정치적 '안정'을 주로 가리킨다(왕상 4:25). 그리고 '형통'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선'을 뜻하며, 보다 내적인 의미에서의 '행복'(Fensham, Williamson)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문구는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바라지 말라'라고 번역될 수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평화와 행복을 공유하지 말아야 할 것, 즉 그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한다(Ridderbos, 출23:32 ; 34:12).

 

"13.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  - 하나님께서 엄격히 공의대로 하셨다면    이스라엘백성들은 완전히 멸망될 수밖에 없었으며 바벨론 포로 사건을 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막을 내려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벌이 가벼웠음을 뜻한다.

 

"14절,15절" ;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멸망케 하지 않으시고 일부를 남겨주셨음에도(13절) 불구하고 또다시 범죄한 이상 이스라엘은 멸망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에스라의 언급은 그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에스라는 백성의 대표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철저히
자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간절한    심정으로죄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  - '거역하고'(* , 파라르)는 원래 '파괴하다' 혹은'깨뜨리다'의 뜻을 갖는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53회 사용되는 중 23회는 직접목적어로 '언약'이라는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단어의 성격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준다(Hamilton). 즉,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는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임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레 26:15 ;    겔 17:18 ; 슥11:10).


"진노하사(아나프, *     )" - 이것은 언약적 책무를 이행하지 않고 범죄에 빠진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가리킬 때만 사용되는 단어이다(신 1:37 ; 왕상8:46 ; 대하 6:36). 이 히브리어는 '진노'와 '코'라는 두 의미를 모두 지니는데 이 두말의 긴밀한 연관성에 관해서는 시 18:7, 8을 참조하라.


"주는 의롭도소이다" ;  - '의롭도소이다'(* , 차디크)는 (1)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로 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용서하실 것임을 암시한다고하는 견해(Rawlinson, Fensham), (2) 여기 번역 그대로 '공의로우시다'의 의미로 보고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시켜도 당연함을 암시한다고 하는 견해(Williamson, Keil) 등으로 그 해석이 갈라진다. 그러나 (1) 여기의 '차디크'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측면을 나타낼 때는 사용된 일이 없으며,(2) '차디크'가 포로 후 시대에는 '은혜로움'의 의미를 내포하였다는 혹자의 주장에도불구하고 거의 동시대, 아니 오히려 후대의 기록인 느헤미야에서도(느 9:33) 그런 의미의 내포 흔적은 발견되지 않으며, (3) 에스라의 기도 내용 전체의 문맥적 의미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성이있다.

 

  스룹바벧의 인도하에 1차 귀환한 사실에 이어 에스라가 인도한 제2차 귀환  사실을 언급한 본서 후반부(7-10장)에서, 지금까지는 귀환의 역사적  배경(7:1-26)과  아울러 귀환자들의 명단(7:27-8:14), 그리고 귀환 과정돠 순조로운 귀환  여행을  위한  영적(8:15-23), 물질적(8:24-36)준비에 대해서 기술했다. 이에 이어지는 본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실상을 언급한 장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을 개혁하게 된  원인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디다. 즉, 본장은 에스라가 주도한 종교적, 사회적  개혁  운동(10장)의 앞부분에 기술되어 그 개혁 운동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 암시하는 대목이다.

 

 본서 저자는 제1차 귀환-성전 재건, 제2차 귀환-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의 도식으로 본서 내용을 전개시켜 바벧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어떤 사역을 감당했고  또 어떤 개혁에 동참했었나를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와 역사적 흐름  가운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실상을 반여하고 있는 본장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에스라가 일차적으로 대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본장은 (1)이방인들과 통혼한  범죄에 대해 언급한 전반부(1,2절)와, (2)에스라의 탄식을 기록한 중반부(3,4절), 그리고 (3) 에스라의 회개 기도를 서술한 후반부(5-15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같은 에스라는 당시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먼저 신앙적인 조치를 취한 자신의 자세에 대해서  강조하여 기술했다.


   따라서 본장은 원인-대처 방안의 내용 전개 방식을 취해 본장의 핵심 내용이  오직 본서 저자 에스라의 사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 전개 방식은 단순히 백성들의 부흥 운동을 율법의 해석-언약의 갱신-언약에 대한 순종-백성들의 부흥 운동 순으로 기록한 느헤미야서(느 8-13장)와 매우 다르다. 즉, 본서 저자  에스라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나쁜 상황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그후에  자신의  채저 행위에 대해서는 거두 절미(去頭截尾)하고 그 운동의 방법과 경과 사항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그래서 전자는 종교 개혁 운동의 한 부류로 이해되고 후자는 종교 부흥  운동의 한 흐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 두 사건이 비록 시간적인 많은 차이를 두고 발생했다 하더라도 이 두 사건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는 똑같을 것이다.

 


   사실 제1차 귀환(B.C. 537년)이후 스롭바벧이나 예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영적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지도자가 죽고 그들을  이끌 만한 영적 지도자가 없었던 기간, 즉 에스라가 귀환한 B.C. 458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윤리적으로 매우 해이해져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행정은  페르시아 정부가 임명한 총독들이 맡고 있었는데(느 5:15),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세금을 페르시아로 보내는 일에 전념했을 뿐, 그들의 신앙.윤리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마음대로(삿17:6) 행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팔레스틴에 보내, 백성들의 불신앙적 타락을 일소하려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백성들의 영적 형편을 이처럼 분명히 보여 주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타락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적극적 간섭이 없을 경우 스스로 타락하는 경향을 선 천적으로 타고 났기 때문이다(시 51:5).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에스라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건강을 염려하여 귀환 결심을 하였지만, 이처럼 백성들의 영적 건강 상태를 직접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귀환이 얼마나 필요한  일이었는지를 새삼 절감하였을 것이다. 또한 백성들을 영적 침체의 늪에서 어떻게  구출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신앙적으로 준비하고 개혁 운동을 감행한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1)국가의 치안. 행정 문제는 세속 정부의 손에  맡겨야 하지만 백성의 도덕.윤리 문제는 교회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하며(마 5:13,  14),(2)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게 대한 순결한 신앙을 간직해 현대 교회의 악습과 죄악에 대해서 책임감을 갖고 회개 운동을 일으켜야 함(계 3:1-6)을 깨닫게 된다.

 

                    1. 백성들의 범죄 내용과 에스라의 탄식(9:1-4)
   이스라엘에 종교적.사회적 개혁 운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설명하는  본문은 에스라가 당시의 상황에 긴급히 신앙적으로 대처한 사실을 기술한 본장의 전반부에 해당되는 대목이다. 즉,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방인들과의 통혼 관계에 대해 에스라가 탄식하는 장면으로 본서 저자 자신의 심적 상태를 나타낸  부분이다.이러한 본문은 (1)당시의 영적 상황(1,2절), (2)에스라의 탄식(3절), (3)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4절) 등의 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본문은 문제가  발생하자  1차적으로취한 본서 저자의 태도와 그에 대해 백성들이 동조한 모습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련데 여기서 이 같은 종교 문제에 대한 고발이 종교 지도자가 아닌 방백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특이하다. 이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사회적 타락사을 반영한 것이로 이해된다. 당시에는 대제사장 예수아의 가족들까지도 이방 여인을 취하였음 뿐만 아니라(10:18), 후일 느헤미야  시대에도  대제사장의  가족들(느13:4, 28)이 정치적인 책략으로 이방인과 통혼하였다(느 6:17-19). 이처럼 종교  기도자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행정 지도자인 방백을 통해  통훈의 문제를 제기하신 것이다.   사실 잡혼 금지에 대한 규정은 신 7:1-4에 근거한 것으로 이 규례는 철지히 지켜져야 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그곳 민족들과의 결혼은 일찍부터 엄격히  금지되었던 것이다(출 34:16). 이는 이방인들과의 결혼 관계를 통해 이방의 우상들이 유입되어 오직 여호와만을 믿은 이스라엘 종교에 악영향을 끼칠 것에 대비한 것임과 동시에  선택된 백성으로서 혈통적 단일성(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요셉이 애굽 여인과 결혼한 사실(창 41:45), 모세가 구스 여인을 맞은 사실(민 12:1),  그리고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여인과의 결혼을 허락한 사실(21;10-14)등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것은 결혼 후  발생되
는 우상 숭배의 모습이나 종교적 혼합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취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라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  수렁에 보다 깊숙이 빠져 들어가고, 급기야는 또다시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상황은 예건하시고, 에스라를 미리 준비하셨다. 그리고 에스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타락한 상황에 직면케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셨다. 그렇게 해야만 이스라엘 백성들 통한 당신의 뜻을 펼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영적 타라게 대해 에스라가 1차적으로 취한 즉각적인 반응은  단지 현실에 대한 탄식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죄로 인해 떨었던 자들이 에스라에게로 나온 것이다. 그러데 이 같은 내용을 본서 저자인  에스라  자신의 반응과 백성들의 반응으로 면밀히 기록한 것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에스라와 백성들의 반응으로 기술된 애용 다음에는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조처가 언급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본 단락에서 우리는 (1)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의 불신앙을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며(창 6:1-4), (2)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일시적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롬 8:38, 39)을 깨닫게 된다.    *불신자(不信者)와의 결혼 문제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 질성의 한  부분이다(창 2:24). 따라서 인간들이 짝을 이루어 결혼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결혼을 해도 무방한가'라는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는, 교회 내에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남녀가 숫적으로 균형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매우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숫적 불균형은, 배우자를 전도할  각오만있다면 그 불시자와 결혼해도 좋다는 나쁜 풍조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 많은 믿는  사
람이 안 믿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신앙적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와의 결혼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불시자와의 결혼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5;10,11; 고후 6:14-16).  성경이 이처럼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불신자와의 결혼은 결국 신앙을 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불산자와의 생활 속에서 불신자가 가져다 주는 억압적, 혹은 유화적 수단에  의해  신앙이 변질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점 때문에 구약 성경은 불신자들과의 결혼을 금지했던 것이다.   둘째로, 불신자와의 결혼은 커다란 심적(心的) 괴로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만
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전혀 다른 가치관 혹은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는 불신 베우자와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혼은 1차적 목적이 행복한 삶의 영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불신 결혼은 행복은 커녕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들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6:20). 따라서 결혼은 안 할 수도 있다. 불신자와의 결혼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결혼이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와 결합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불신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른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즉, 그와 교제하면서 그를 전도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뒤에 결혼하면 되는 것이다. 만일 이같이 하지 아니하고 불신 상태에서 결혼한다면 그 로 인행 당하게 되는 불행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2. 백성들의 범죄로 인한 에스라의 회개 기도(9;5-15)
   이스라엘이 당면한 영적 문제에 대해 비탄을 금치 못한 저자 자신의  심정을  그런 전단락(1-4절)에 이어지는 본문은 에스라가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다.이러한 그의 회개 기도는 설교를 하는 듯한 형식으로 진행되는 바, 후에 계속된  이스라엘의 개혁 운동(10장) 자극제가 되었던 듯하다. 즉, 에스라으 기도는  한계  상황에 다다른 백성들의 불순종과 패역을 토로하는 철저한 참회와 자백의 기도로서  이스라엘이 신앙 개혁 운동을 해야 하는 필연성을 강하게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1)에스라 자신이 취한 기도의 자세를 언급한 전반부(5절)와, (2)백성들의 조에 대한 고백을 기술한 중반부(6-12절), 그리고 (3)백성들이 계속적으로 죄를 지을 경우 발생하게 될 일들에 대한 예상을 서술한 후반부(13-15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인 에스라는 이 같은 기도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좌악을  진정으로
회개할 뿐만 아니라 그 기도를 듣는 백성들에게도 바른 신앙을 소유할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회개 기도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민족의 죄 때문에 대신 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니엘(단 9;4-10),  느헤미야  시대의  레위인들의  기도(느9;6-38)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특히 여기에는  구약의 독특한 역사 철학이 잘 나타나 있다. 즉, 그것은 자비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구원을  선포하려 하셨으나 그들의 끝없는 배반으로 심판과 회복이 될풀이되어 왔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타락된 현실 앞에서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같은 에스라의 기도 속에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들어 있는 바,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6절에서 1인칭 단수로 표현된 '나'가 7절에서부터는  1인칭  복수 '우리'로 변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에스라가 죄를 범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회개 기도를 드리른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신을 패역한 이스라엘의 한 구성 요원으로 간주해 공동체와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대제사장의  후
예로서 기도 드림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신도인 느헤미야 역시  에스라와 거의 유사한 태도롤 취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느 1:5-11).


   둘째, 에스라는 이스라엘이 경험한 대황폐 혹은 대파괴 사건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사로잡히고 노략당한 것'(7절), '종 노릇한 것'(8절),'노예로서 복역한 것'(9절)등을 자세히 언급하는 것이다.이는 본서  저자의  역사좔과 신앙관을 반영한 것으로서 과거를 회상시켜 그렇게 상황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 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에스라는 바벧론의 포로 사건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죄악의 결과로 간주하고 있다. 이처럼 에스라는 예언자적 입장에서, 또는 신명기적 역사관의 안목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본것이다(신 11:26-28).


   셋째, 회개 기도를 드린 에스라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징벌의 정도(程度)에 나타난 자비(13절), 바사  왕들에게 역사하신 자비(9절), 남은 자들을 피하게 하신 자비(8절), 성전을  재건케  하신 자비(9절), 예루살렘에 안전히 거할 수 있도록 보호하신 자비(8,9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보존과 부흥에 대한 저자 자신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에스라의 기도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에스라 자신의 심정표현(5, 6a절) : 이것은 속옷과 겉옷을 찢은 상징적 행동과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 손을 든 태도, 그리고 여호와를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는 명시적인 자백을 통해 나타난다.. (2)백성들의 조에 대한 고백(6b-12절) :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지은 죄의 막중함(6b절), 죄의 지속성(7절), 죄의 가중성(10절), 그리고 죄를 범한  행위의 분명성(10-12절)이 나타난다. (3)죄가 지속될 경우 짐작되는  예상(13-15절):  이러한 예상은 한 신앙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란 존재를 완전히 멸하실 것(13,14절),  그리고 그러한 처사는 여호와의 의로움, 즉 공의에 기초한 것(15절)이라는 그의 기도 내용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본서 저자는 자신의 이와 같은 기도 내용과 신실하고  경건한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다음 장에서의 신앙 부흥 운동이 성공할 것임을  미래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본 단락에서 (1)교회의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연대적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하며(고전 12:26),  (2)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마음은 상한 마음, 곧 애통하는 심령이라는 사실(시 51:17; 마 5:4)을 깨
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연대 의식.   고전 12:13은 "우리가...한 성령을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현상적(現象的)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성령에 의해 영적(靈的)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음을 뜻한다. 성도의 이 같은 영적 연결성(連結性)은 우리의 죄성 때문에 볼 수 없을 뿐이지, 실재의  사실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령의 하나 된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엡 4:3)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안의 모든 일, 즉 다른 지체에게 닥친 모든 슬픔이나 기쁨을  마치 자신의 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체가 죄에 빠졌을 때는 그를 정죄하기에 앞서, 그것이 나의 죄인 것처럼 생각하여야 한다. 하지만 한국 교회라는 큰 범주속에서 살펴본다면, 이러한 신앙적 연대 의식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자기가 속한 지교회에 대해서는 굉장한 애정을 갖지만, 바로 이웃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한 경우는 오히려 이웃  교회를 경쟁 관계로 생각하고 대한다. 한국 교회의 이 같은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어긋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바로 이 같은 유아적 수준에서  탈피하여,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 그리고 모든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적 연대 의식을 넉넉히 소유했던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이웃교회의 불행에 동참하여 많은 것을 나누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행  11:27-30; 고후 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