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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빌립보서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빌2:27)

1. 성경 (빌2:19~30)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19)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0)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1)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2)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3)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4)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5)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6)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7)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8)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29)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3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9. 내가~~~~~ 바람은" ;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서 교인들이 더욱 용기를 얻어 협잡군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마치 전쟁터에서  증원부대가 당도할 것을 예상하고 있는 자들은 더욱 용감해지고 도망가려 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디모데를 보내려는 생각은 빌립보 교인들을 매우 용감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제 곧 우리 대적의 음모'를 쳐부술 분이 오실 것이다. 단순히 올 것을 기대하는 것이 그토록 힘이 된다면 함께 있게 될 때에야 얼마나 더욱 큰 효험이 되겠는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만 나아가고 주님의 손길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바울을 볼 때에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복종시키려 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내가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 이 말을 한 것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교인들이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해서 큰 우려를  가지고 있는 바울로서는 그들 모두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20.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에서 다른 의미를 찾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내게는 너희를 위해 나섬에 이 사람 만큼 감동을 받은 자가 없다.'  왜냐하면 내 견해로 볼 때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비교시키면서 그가 가장 적합한 자로 생각된다고 칭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21. 저희가 다 자기의 일을 구하고." ;  바울은 지금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밖으로 나타내는 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형제들로 알고 있는 모든 사랑과 자기 편에 있다고 생각되는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 일에는 열심이지만 주님의 일에는 냉담한 반응을보이는 자들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자기의 일만을 구하는자들은 큰 잘못이 없다고 할지라도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종들에게서 그는 분명히 무익한 자라고 할 만한 사실을 찾아내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자기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가치하고 겉치레 하는 자들만 양육해 냈단 말인가?  나는 그들이 전혀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는 자들이었다면 교회를 위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었겠으나, 실상은 자기들의 사생활 속에 교회의 공적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은 있었는데 이것을 소홀히 여기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항상 두 가지의 경향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첫째로는 자신을 억제하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것들을 위하든지 아니면 너무 자기유익을 구하는데 기울어져 그리스도를 다만 형식적으로만 섬기든지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 목회에 방해를 주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단지 내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나는 내 자신의 유익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지 마음이 굳은 사람은아니다 라는 핑계는 있을 수가 없다. 만약 자기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자기의 권리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보살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적합하지 않다. 또 이 둘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도 역시 온당치 못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어디든지간에 다른 것들을 버리고 뛰어 나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우리를 돌이키게 만드는 것에서부터 뗘나게 함으로써 우리의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을 더욱 풍부하게 하사 어느 곳에서든지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다. 어느 곳에든지 영광을 얻고자 하면 하나님은 겸손하게 살 수 있는 처지에 놓아 두신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든지 보다 유순해져서 그곳을 만족한 일터로 알아 기쁘게 봉사하면 거기에서 우리는 인정을 받게 된다. 우리가 보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기를 원하면 그들의 배은망덕 야만적인 행위 그리고 그들의 교만이 우리를 짓누를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처해 있는 사람들의 성질이나 습관들을 문제 삼지 말고, 스파르타식으로 자신과 싸우고 자기의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여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려야한다.그러나 만일에 바울이 교회보다 자기에게 관심이 더 많았던 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자들을 엄하게 꾸짖었다면 자기의 일을 구하기를 포기하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만 관심을 갖는 판단이 서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아첨을 하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은 저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마땅히 자기의 유익을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혹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활은 가장 주된 목표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저희가  '다' 했을 때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전체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매우 적어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취급해서 '다'라고 했다.모든 덕이 꽃을 피우던 황금시대였을지라도 바울이 극소수의 무리만이 올바르게 나아갈 뿐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 오늘날의 상황이 스스로 조심하며 살아보려는 자들을 바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도록 하자 나는 교황주의자들이 그때 베드로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내게 물어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들의 말을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에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주었다고 하는 그 슬프고도 어리석은 말이여 !  그러므로 그들은 그 당시에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주장하고 있었다는 어리석은 말을 한다. 교회의 부홍은 '타 크리스투' 라고 하는 말을 주의해 보라!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포도원을 가꾸는 수고를 기울일 때에라야 진정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  너희가 아나니~~~~" ;  : 이 말은 명령형 '너희가 알라' (왜냐하면 그들은 거의 배반할 단계에 이르고 있었으므로) 로 보는 것보다는 '너회가 그의 증거를 알고 있다' 라고 보는 것이 더 좋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 다모데의 충성과 겸손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충성에 대해서는 복음 안에서 바울을 섬겼다고 하여 문맥으로 그 참된 신실성의 증거를 보여준다. 겸손에 대해서는 바울을 아버지와 같이 복종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미덕은 모든 세대를 통해 보아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칭찬을 했다고 해서 놀라운 것은 아니다. 오늘날 어디에서 젊은이들이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는가 ?  오히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오만과 포악으로 가득차 있지가 않은가?  다른 많은 귀절에서도 우리는 바울이 경건한 목회자들을 칭찬하는데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자기를 위하지 않고 모든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자는 사랑을 받고, 영광을 얻게 되며 지극히 높은 권위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이 귀절은 보여준다

 

"24. 나도 주안에서 확신하노라." ;  바울은 이 말을 추가함으로 앞에서 말한 대로 여행을 하고자 하는 자기의 생각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조건적으로 말한다. '만약 주께서 기쁘게 여기신다면 바울이 비록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석방되기를 바라기는 했으나 이 기대는 확실성이 없는 것이므로 자기가 빌립보 교인들에게가는 것을 약속하지는 않고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에 맡기고 있다.

 

"25. 에바브로디도~~~~~~" ; 바울은 자기와 디모데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갈 것을 약속함으로 용기를 갖도록 한 후에, 자기가 직접 갈 수 있는 길이 늦어지고 았으므로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보내서 그동안이라도 그들을 돌봐주는 목회자가 비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더욱 강하게 하여주고 있다. 바울은 여러가지 말로써 에바브로다도를 추천한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한다. 바울은 이 말씀들 속에서 끊임없이 복음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단과의 싸움에 임할 복음 사역자들이 가쳐야 할 조건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을 위해 일하려고 나서려는 자들은 자기들 앞에 마귀의 선전 포고가 놓여있고, 마귀는 이미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실로이 싸움은 그리스도의 장막에 거하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이 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대적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싸움은 특별히 믿는 자들의 표준으로 생각되는 말쏨의 사역자들에게 더욱 적용이 된다. 헤아릴 수 없이 수 많은 시험 속에서 일했던 바울은 자기가 군인으로서 봉사함을 특별히 자랑으로 여겼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칭찬했는데 이미 그는 자기 싸움에 함께 군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라는 말은 다른 여러 귀절들에서처럼고 일반적인 전도자를 가리킨다고 하는 자도 있고, 특별히 빌립보 교회에 보냄을 받은사절로 보는 자도 있다. 내 의견으로는 전자가 더 타당한 것 같다.또 바울은 다른 칭찬하는 말 가운데서 말하기를 그는 옥에서 나를 섬겼다 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충분히 언급할 것이다.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  진실된 목회자의 표적은 그가 교인들은 멀리 뗘나 있을 때에도 항상 종교적인 책임을 느끼고 양 무리들을 염려하며 사모하면서 자기 때문에 교인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이 일로 크게 염려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들의 목회자를 위한 빌립보 교인들의 거룩한 열정도 여기에서 소개되고 있다.

 

"27.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 하심을 분명히 나타내고자 그의 '병의 심각성'을 말한다 (에바브로디도는 너무 심하게 병들어 생명까지도 '포기했었다). 앞에서는 자기가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던 사도가 에바브로디도의 생명이 연장된 것을 하나님의 자비라고 표현한 것은 놀라운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고 이 세상의 모든 슬픔에서 구함을 받는 것이 더 좋은가, 아니면 바울이 붙잡 혔다고(롬7: 24.) 말한 죄악의 사슬에서 풀려나 성령의 충만한 자유함을 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붙잡는 것이 더 좋은가?  믿는 자들에게는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요, 바람직한 것임을 일일이 들어 설명하는 것은 이제 너무 싫증나는 일이 되었다. 

 

그러면 우리의 불행이 계속될 때 하나님의 자비는 어디에 임했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극한 은사요. 이 생명은 이 모든 것들이 결코 막을 수 없다고 답변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들은 이 땅 위에서도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살 뿐만 아니라 잠시 후면 생명을 얻게 된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우리 안에서 나타내시는 것이 결코 적은 영광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 자체보다도 삶의 목적을 바라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죽는 것이 자기에게 크게 근심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셨으므로 그 근심을 면하게 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쇠같이 냉정한 사람이었고 인간적인 감정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스토익학파들의 '아파데이안'을 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은 그처럼 "굽힐 줄 모르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처럼 불굴의 정절은 어디에저 얻었는가 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인내란 철학적인 고집이나 스토익파의 완고함과는 엄격히 다르다고 본다. 십자가를 견뎌내기까지 인내하는 덕이라고 해서 그 안에 쓰라림이나 고통의 느낌까지도 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모든 감각에 임하게 되면 기꺼이 등을 돌려대고 매를 맞을 수가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회생제물이 되기까지 순종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매여 있는 것 때문에 당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이러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으므로 메인 것과 같은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견디어 냈던 것이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죽는 것을 크나 큰 타격으로 생각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순종의 증거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행위를 억제할 때, 그리고 육신의 질병에서해방될 때이기 때문이다. 아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우리의 성품에 심어 놓으신 행위들은 선한 것들이었으므로 친구들의 죽음을 슬픈 것으로 느끼는 것은 부패한 성품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주신 행위였다는 것과는 둘째,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의 죽음을 슬프게 여겼다고 하는 많은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말들이었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모두 어떤 사람의 죽음을 대하게 될 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기억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보다도 선한 일군이 심히 적은 때에 좋은 목회자 한 사람을 잃는것이 교회에 얼마나 큰 손해인가 하는 점에 그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를 결코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오히려 혈기가 왕성하고 성급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성품은 타락하여 우리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어그러지고 굽어지게 만들어서 정도를 넘게 만든다. 그러므로 마음까지 전염되어 안에서 도무지 순결하고 의로운 것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바울이 질병으로 인한 인간적인 비애를 경험했다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시험을 당할 때 이길 수 있도록 힘쓰고 대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8.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  바울 곁에 있는 것은 바울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지만 바울은 자기 개인의 유익보다 빌립보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가 뗘나는 것을 기뻐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뗘나는 것이 자기에게는 원치 않는 일이지만, 그가 양 무리들을 멀리 떠나 자기를 위해 봉사하게 함으로 교인들이 자기들의 목회자를잃은 일에 마지못해 응낙하게 되기 때문이다.

 

"29.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  바울이 * 모든 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진실함과 풍성함을 의미한다. 바울은 또다시 에바브로디도를 빌훌륭하고립보 교인들에게 칭찬하여서 이 칭찬을 계속 반복함으로 그들이 훌륭하고 신실한 목회자를 모시고 있음을 지극한 자랑으로 여기도록 한다송왜냐하면이러한 생각을 한 사람이 가질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갖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고에서 얻은 값비싼 친주는 진기할수록 더욱 값이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보내주신 사람이 가장 좋은사람임을 보여주고자 하실 때는; 보통 좋은 목회자를 대앗아 가는 방법으로 우리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에 벌을 내리시고, 교만한 마음을 부그렵게 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여우들의 모략과 술채을 대항하면서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은 바울이 보여준 예에 주의하여서 좋은 목회자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음그러나 이것을 토대로 자기의력을 넓히고자 하는 모든 수단들은 마귀의 도구일 수밖에 없다.  

 

"30.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 ;  나는 이 말씀이 중단없이 일을 계속함으로 얻은 질병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질병이그의 미덕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이 질병은 고의 불일둣한 열심의표징이었기 때문이다. 질병은 실제적으로 좋읜 것이 못된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자들은 앓지 말아야 한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건강이 정도이상 일을 하면 위험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건강 때문에 자기의 임무를수행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바울은 빌립보은교인들에게도 더욱 이와같은 행위를 가지라고 명하여 그들의 부족함을 채우라교 말한다. 왜냐하면그들이 멀리 멸어져 살고 있으므로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도움을 줄 수가없었기 때문이다이 그러므로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은 바로 이 목적과 근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에게 맡겨진 수고들을 :주님의 일 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 진리를 위해 수고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도와주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