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 (빌2:1~1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1)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2)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4)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5)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6)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7)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8)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9)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0)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그러므로~~~~ 있거든" ; 바울은 가장 부드럽게 권면하기를, 빌립보 교인들이 무슨 방법을 통해서든지 피차 조화를 이루어 안에서 다툼이 일어남으로 해서 서로 틈이 갈라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 거짓 사도들의 속임수를 드러내라고 한다. 왜냐하면 다툼은 항상 사단이 악한 교훈을 퍼뜨리도록 문호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은 사단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어책이 된다.παρακλησιξ 는 자주 "훈계 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첫 귀절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될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로 주어진 훈계라면 너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그러나 문맥에 보다 적합한 의미는 이와는 다르다. 즉, '만일 너희 중에 무슨 그리스도의 권면이 있다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너회가 나의 슬픔을 감하여 주는 것이요, 만일 너희가 나에게 어떤 권면과 위로를 보내준다면 너희는 분명히 나에게 사랑 외에는 빚진 것이 없으며, 만일 너희가 성령의교제를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할 것이며, 그리고 너희 중에 무슨 긍휼이나 자비가 있다면 너희가 나의 고통을 덜어 주고 너희를 충만케 하는 것이니라 등등: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게 되고, 목회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뗘한 관심을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바울이 교인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과 같은 존경을 요구하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사용했을 때, 그는 그들의 동정을 애원함으로써 얼마나 자신을 낮추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권위가 필요할 때 그것을 어떻게 행사해야 할 것인가를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애원하는 방법을 차용한다. .그것은 이 방법이 그들의 사랑을 얻는 데 보다 좋은 것이기 때문이요. 자기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가르치고 순종케 하려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위하도록 잘 양육해야 한다.
"2. 마음을 같이 하여~~~~" ; 이 말의 요점은 생각과 뜻에서 연합하라는 것이다. 바울이 교리와 파차의 사랑에서 하나가 되라고 한 후에 같은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마음이 되어 같은 것을 생각할 것을 말한다고 본다. το αυτο 라는 표현은 그들 스스로가 피차 간에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외면적인 조화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이 사랑으로 연합되지 않으면 이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번역하면 그뜻이 명확해진다. - 피차 간에 사랑을 하도록 같은 마음이 되어지면, 뜻이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되어진다. 이는 관사가 때때로 부정사 대신에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번역을 나는 조금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3.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 . 이것들은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는 가장 위험한 두 개의 독소이다. 다툼은 각자가 자기 의견을 끝 까지 고집할 때, 즉 한번 들어선 길을 따라 무모하게 돌진하기 위해 노하기를 시작할 때에 일어난다. '허영 이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으로써 자기가 꾸며낸 생각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평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요. 특별히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이란 모든 다툼을 일으키게 하는 부채와 같기 때문이다. 허영은 어떤 육신의 영광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어찌 헛되지 않겠는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 바울은 두 가지 병폐에 대해 좋은 의미에서 말하는 복종이라는 한 가지 치료법을 제시한다. 복종은 겸손의 어머니일 뿐아니라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게 함으로써 쉽게 무질서한 상태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준다. 바울은 진정한 겸손을 정의 하기를 겸손이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 어떤 불화가 있다면 가장 불행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이 그토록 귀한 미덕이라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임금으로 삼고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명령한다. 이 얼마나 교만인가, 우리들의 이 어리석은 찬사로 말미암아 형제들을 멸시하게 된다. 우리는 바울이 여기 설명한 것과는 너무도 떨어져 있다. 다른 사람이 자기와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 머리가 되기를 원치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자기보다 훨씬 아래 있는 자를 자기보다 위에 있는 자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나는 아 문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부족함을 바로 깨닫는 데에 달려 있다고 본다. 어느 누구도 외면적 축복들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마땅히 그 축복을 자기가 잘난 체하는 데 사용하도록 받은 것이 아님을 깨달아 교만해지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기 스스로 그러한 생각에 빠져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이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여 수정케 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낮아져야 한다. 반면에 타인에게서 어떤 칭찬을 받을 만한 훌륭한 점이 있을 때에는 사랑으로 그들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을 잘 따르는 자는 자기보다도 타인을 낫게 여기는데 힘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바울은 이것을 그가 첨부한 말, 즉 각자가 자기의 일만 돌아보라는 말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비록 자기가 우위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차기보다 더 낫게 여길 수 있는 일이 분명히 가능하다.
"4.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 ;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돌보지 않고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불어 잘 되기만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옥에 갇히고, 착고에 채이웠고, 큰 죄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직 고통을 당하기 전이었지만 핍박이 임박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의 충만한 기쁨과 교회 가 잘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바울은 이제 교회가 부흥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조건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것과 형제 간에 화목하는 것임을 알았다. 시편은 이와 비숫한 내용으로 우리의 큰 가쁨은 예루살렘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시 137 : 6). 바울의 모든 완전한 기쁨이 여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에 '빌립보 교인' 들이 서로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들은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에 이중으로 고통을 더해주는 가장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5: 이 마음을 품으라" ; 바울은 앞에서 여러 말로 권면했던 것을 이제는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주면서 겸손할 것을 명령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우리를 설득하여 이것이 우리의 삶의 법칙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를 겸손에 초대함으로써 참된 영광을 얻는 길을 걷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을 권면한다. 따라서 바울은 겸손의 모형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 동사를 능동태로 번역한 것을 공격하지는 않지만 나는 수동태로 본다. 그 이유는 의미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바울이 사용했던 표현 방식그대로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6.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 이것은 유사성의 비교가 아니라 더 위대함과 덜 위대함의 비교이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스스로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수치스러운 자리로 낮추신 것이었다. 우리의 겸손도 위선된 생각으로 자신을 높이려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복종하셨다. 우리도 우리가 행하여야 할 모든 것들을 마지못해서 해야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안에 계셨으므로 자신을 하나님의 본체로 보여주는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비우셨다는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 오셨다고 할진대 아무것도 아닌 우리간 어찌 어리석게도 교만하여 높아질 수가 있겠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는 그의 위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외모를 통해서 그 본체가 알려지는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홀러 나오는 위엄은 바로 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장 적당한 비유를 든다면, 왕의 본체는 그 보여주는 장비나 훌륭한 모습 즉 그의 홀, 그의 왕관, 그의 곤룡포, 그의 시종들, 그의 심판대, 기타 왕권의 상징물들 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시대 집정관의 본체는 자줏빛으로 테를 두른 망또, 상아 의자, 몽둥이와 도끼를 든 릭토르였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천지창조가 있기 전 하나님의 본체였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7:5에서 그가 말한 대로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기 전에 가지셨던 하나님의 지혜는 초라하고 천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하나님의 웅장한 영광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분이었으므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보여줄 충분한 권리가 있었지만 사실 그대로 보이지 않으시고 인간이 보기에 그가 그러한 권리를 가지셨다고 볼 만한 모습을 취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고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없다. 바울이 여기지 아니하시고 했을 때는 그는 참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하며 정당 함을 알고 있었다.' 는 뜻을 말하는 것으로 그의 낮아지심이 자발적인 것이요 필연적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게하여 준다. 지금까지는 '그가 여겼다'고 직설법으로 번역했지만 문맥은 가정법으로 번역할 것을 요한다. 또한 바울은 보통 가정법 대신 과거 직설법을 사용했는데 그 때는 보충으로 소위 가정관사 dv (안)을 남겨두었다. 로마서 9 : 3 mvvounv(에우코멘존 내가 원하는 바) 고린도전서 2 : 8, '에이 갈 에그노산 : 만일 그들이알았더면' 이 그 실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바울이 여기서 의도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취급함으로 그의 낮아지심을 높이 평가하도록 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한다.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이 말씀 안에 분명히 언급되고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장님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에라스무스가 이 귀절을 다른 사람들이 하둣 말재간으로 설명해 넘기려고 했던 것은 온당치못한 처사였다. 그가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만일에 그의 정통적인 고백이 성경적인 권위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내 신앙에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내가 분명히 알기로는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귀절은 그리스도는 피조된 하나님이요, 성부보다 못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동등함을 반대하는 아리안주의(Arians ) 의 불경스러 움을 논박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오직 하나님의 본체를 내놓는다면 어디에서 취한 것이 하나님과 동등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이사야기 부르짖은 분과 같으시기 때문이다. - 나는 살아 있노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자에게 주지 아니 하리라(사48:11)
"본체" : 이 말은 일반적으로는 모습' 혹은 외모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나도 이 점에 대해서는 쉽게 인정하지만 하나님에게 그 형상을 적용할 때는 거짓이나 꾸며 댄 것은 없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데, 그의 사역이 영원한 신성의 증거가 된다(롬1 : 20 ).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적 본체는 그리스도의 위엄으로부터 올바르게 증명되며, 그 위엄은 스스로 낮아지시기 전에 성부와 동등으로 취하셨다. 모든 마귀들이 나로 하여금 이 귀절을 의곡되게 할지라도 최소한 나에게 가장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본체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7. 자기를 비어" ; . 여기서 비운다는 것은 낮추셨다는 것과 같은 말로써 그 다음 말들을 보아 이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표현은 eudativorepos~~~~즉, 아무 것도 없게 한다는 말을 사용했다. 실은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 중지하시고 육체의 나약함 아래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을 축소시킨 것이 아니라 감추심으로( supprimendo : 간직하셨다. 그렇다면 그는 인간으로서 행하셨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 에라스무스도 이 말에 동조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기 전 하나님의 본체는 어디에 있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답하기를 바울은 그리스도를 육신 속에 나타난 하나님, 즉 전체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비운다 는 것은 오직 그의 인성에만 속한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내가 인간을 '인간은 죽는 존재이므로 단지 세상만을 생각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나는 실제로는 전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단지 인간적인 면, '즉 육체만을 죽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한 품격에 두 가지 성질을 가졌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실제로는 하나님과 동등이심에도 불구하고 육신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는 자기의 영광을 억제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한다.
둘째로 야기되는 문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이적과 능력을 통해 증명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것이 항상 나타났다고 요한이 증거한자(요1 : 14.) 를 어떻게 비웠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는 육신의 낮아지심은 자기의 신적 위엄을 가리우는 베일과 같은 것에 불과했다고 답한다. 이것은 그가 부활 후까지는 변형된 모습이 공개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마17 : 9),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죽음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았을 때에는 말하기를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요17 1)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또 다른 곳에서도 가르치기를 그는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롬) 4)고한다. 또 다른 곳에는(고후13 : 4) 그는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고난당하셨다"고 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외면적 모습이 낮아지는 방법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비워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그가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종이 인간의 종이 되신 이유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할례의 수종자(롬15 : 8)라 불렀고,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기를 증거하기를 섬기러 온 자(마20 : 28) 라 했으며, 이사야는 벌써 오래 전에 같은 것을 예언하기를 '보라, 나의 종, 등등 (사42 :: 1)이라 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 여기의 [Tevoptevos] 는 [constitutus] (만들어진 혹은 정해진)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의 수준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그 모양이 사람의 일반적인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말씨온 주의자들은(The Marcionites) 이 말씀을 자기들이 상상해 낸 허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별로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반박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이나 세상에 계실 때 사신 상태만을 단순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실한 자의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의 상태와 구분된 행동으로 자기를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생각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그처럼 사신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는 방법으로 사셨지만 아무리 거룩한 자라 할지라도 결코 같을 수 없는 분이었다고 한다.그러므로 말씨온 주의자들은 상태의 유사성 때문에 본성의 실재를 부정하는 아주 어린 아이와 같은 이론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8. 나타나셨으매" ; 이는 '알리어진다' 또는 '보여진다'를 의미한다.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바울은 판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이 앞에서는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나님이시요: 성부와 동등이라고 함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미천하고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알려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항상 내가 조금 전에 말했둣이 그 복종이 자원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복종하셨으니" ; 주님되시는 그리스도가 종이 되는 것은 크나 큰 겸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보다 한 결음 더 나아가 말하기를 죽지 않으실 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주님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성부에게 복종하셨고 심지어는 사망에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이것은 지극히 낮아지심이었다. 특별히 바울이 곧 첨가하여 강조한 음의 종류를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의 죽으심은 사람 보기에도 비천한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저주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러한 겸손의 모형은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끌만한 것이었지만 이를 말로 표현하기란 그 위대함에 비추어 볼때 불가능한 일이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바울은 위로하는 말을 덧붙이기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아지는 일이 지극히 바랄 만한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를 권고 받아 낮아지는 것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일로 깨달아지기 전에는 겸손한 자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듣게 될 때에는 우리가 보다 기꺼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스스로 겸손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축복이 된다는 것을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를 그 예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미천한 상태에 있는 자를 가장 높아지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스스로 겸손해지면 그와 같은 방법으로 높아지게 될것이다. 겸손하기를 거부하는 자가 천국의 영광에 들리우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이 귀절은 궤변가 ( Sophist ) 들에게 그리스도는 먼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공로를 행하였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고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생각이 옳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들의 말이 거짓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어떤 이유를 위해 오셨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호하게 만드는 세속적인 생각을 가장 먼저 피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것은 그가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자신을 위해 필요한 공로의 사역을 담당했다고 하는 주장이 사단의 꾀임 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혼합되지 않은 선을 보고, 맛 보고, 깨달으며, 느끼고 알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은 그 자신과는 무관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버렸으며, 그의 삶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할 때마다 그 유익과 고귀함을 말해준다. 즉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화목되고, 모든 의를 회복하며, 오염에서 깨꿋케 되고, 삶을 얻으며, 생명의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누가 중요한 열매는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었으며, 우리를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을 생각했으며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공로를 세우셨다고 하는 사단의 선동에 반대하고 나서지 않겠는가?:
더우기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반대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거짓된 교훈을 세우고자 바울의 말을 불경스럽게 악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추론적 표현은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 즉 인간이신적 영광에 도달하는데 그리고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얻는데 공로를 세웠다는 주장을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리석다기보다는 말하기조차 두려운 생각이다. 사도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무엇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자신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은 이사야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 수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독특한 요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는 것이요. 인생들을 위해서 이룩하신 사역의 보상이 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 그대로를 주장한다면 그 답변은 간단하다.
그리스도는 성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내어져 그의 전 생애가 우리 앞에 놓여진 거울처럼 되어졌다. 거울은 밝지만 스스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용하고 편리하도록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을 찾으시거나 받으신 것이 아니라 전혀 우리들을 위해서 하셨다. 성부와 동등한 자가 높임을 받기 위해서 무엇이 새롭게 필요한가를 나는 묻고 싶다. 그러면 소르본 학파의 궤변주의자들( Sorbonnist Sophists )은 자기들의 빗나간 생각을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이라는 것을 경건한 독자들은 배우게 될것이다
"뛰어난 이름을 주사" ; 여기서 '이름' 은 *위엄을 대신한다. 이것은모든 언어에 매우 공통적인 말이다. [liacet sine nomine truncis] 그는 이름도 없이 머리 없는 시체로 누워 있다. 특이 표현 방법은 특별히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영광된 수준에 계시므로 하늘이나 땅에서 그와 동등한 권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신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은 이 사실을 온 세상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을 전파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소개하기를 "나는 살아 있노라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노라 하였노라" (사45 :* 23 ) 이제 여기서 경배는 특별히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공교하게게 생각하기를 예수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은 여호와에게서부터 왔다고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유에서 신실함을 찾지 못했다. 나는 쓸데없는 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리는 여처럼 중요한 문제를 사소한 문제로 만들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요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자들은 바울이 단 두 음절로 자기가 의미하고 있는 것을 함축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위엄에 대해서 말한다고 함으로써 그 참된 의미를 도무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알렉산더의 이름 속에서 그에게 필요한 이름의 위대함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요 바울이 의도하는 바를 새로운 것으로 반꾸려는 책략이다. 그러나 보다 더 추악하고 야만적인 것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르본 학파의 궤변이다. 이들은 마치 그 발음 속에 모든 권세가 들어있는 마술적인 이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는 반대로 그 음절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10. 하늘에 았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 ; 바울의 천국에서 지옥에 이르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예속 했다고 하기 때문에 교황주자들(Papists)은 이 말씀이 연옥 교리를 지지해 준다고 하는 어리석은 말을 한다. 저들의 추리는 이렇다. 마귀들은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는 데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갖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역하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들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도 두려워 떨고 있다. (약 2 : 19.) 는 말씀이 없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이 언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로 나오는가? 참으로 내가 알기로는 그들은 자기가 원해서 그리스도에게 예속되거나 기꺼이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요 또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울도 여기서 자발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도 그들에게 '안티스트레폰' 이라는 말로 답변할 수 있다. 즉 그들에 의하면 연옥의 불은 일시적인 것으로 심판 날에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이 귀절은 연옥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이 예언이 심판날에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절머리 나도록 천박한 사상들을 어린아이보다 못한 사람인들 해롭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 : 사람들도 이 관습에 따라서 존경을 받은 것은 틀림없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경배를 무릎을 꿇는 것으로 표시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경배를 드리려고 한다면 마음 속으로 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경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전히 경배하는 자들을 가리켜 바알의 형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자(왕상19 :18)들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경배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속하는 것인지 인성에 속하는 것인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변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성에도 새롭게 주어진 것이 없는 반면에, 인성 그 자체도 각기 분리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높이신 승귀에 의해서 비로소 영광을 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답하기를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육신 속에서 나타내신 분이었으므로(딤전 3;16) 그리스도의 전 성품에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신을 입고 연약함 아래 감추이신 분이므로 인성에서만 자신을 낮추신 것도 아니요 신성에서만 자신을 낮추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높이시기를 미천하고 어두운 세상에 사셨던 바로 그 육신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수 있도록 지극히 높여 영광스러운 자리로 올리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바울은 모순을 저지른 것같이 보인다. 롬 14: 11에서는 한 날에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을 말하고자 할때에 바로 이 귀절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말씀이 이미 성취되었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타당치가 못하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최후 심관의 날까지는 완성되지 못한 채 매일매일 확장되며 증진된다고 본다. 모든 사람들이 현재 그리스도에게 예속해 있다고 하는말이나, 이 예속은 부활의 날까지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말은 모두가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시작에 불과하고 그 완성은 장래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이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방법으로 적용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다른 모든 예언들이 어느 한 특정한 시기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대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이사야가 말한 대로 영원한 하나님 되심을 추측할 수 있다.
"11.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이 말씀은 '영광안에서" 라고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전치사 ets(에이스)가 때때로 대신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씀이 가진 의미는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하나님의 위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것같이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추어졌으므로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과 17장을 보면 이 귀절에 대한 설명을 볼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