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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빌립보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2:17)

1. 성경 (빌2:12~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3)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4)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5)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6)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7)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1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2. 그러므로" ;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주님의 손 아래서 스스로 겸손하도록 앞에서 한 권면을 일반적인 말로써 끝을 맺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인들로 하여금 손쉽게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피차 간에 예의가 있고 친절하게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길만이 사람의 마음에 예절을 배우도록 하는 가장 적당한 방법이요, 은밀한 곳에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대신에 자기를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항상 복종하여." ;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더욱 잘 견딜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전에 그들이 순종을 잘했던 것을 칭찬한다. 위선자들의 무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스스로가 위선을 드러냄으로 해서 조만간 자유스럽게 행동할 곳을 찾아 시야에서 떠날 것이므로 바울은 자기가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자기가 없을 때 더욱 더 순종하는것을 보여주도록 훈계한다. 만일 바울이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계속되는훈계로 교인들을 깨우치고 독려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교사가 멀리 뗘나 있으므로 이제는 자기들 스스로가 권면하는 것이 괼요했다.
 
"두렵고 떨림으로~~~~" ;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종과 겸손으로써 자기들의 순종을 증명하고 나타내 보이기를 원한다. 선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을 믿고 우쭐대면서 자기 자신만으로 만족할 때에는 맹목적인 신념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교만해진다는 것이다. 바울이 권면하는 바를 두려워하는 자는 오히려 죄악을 범하는 자이다. 비록 권면이 교리보다 문맥상 먼저 나오고 교리가 다음에 오지만, 권면은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나는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말한 것이다.
 
"13.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우리는 아무 것도 보잘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모든 거만함을 파괴하는 거대한 대포( machina ) 와 모든 교만을 죽이는 칼을 쥐는 것과 같다.나는 지금 중생의 영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초자연적 은혜를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행17 : 28).  바울은 여기서 보편적인 하나에서 각기 다른 행동들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울이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묘사하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행동에는 두 개의 원리적인 부분, 즉 의지와 유효적 능력이 있다.
 
바울은 이 두 가지가 다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말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에 더 많은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인가? 그런데 바울이 전체를 단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을 보아 이 양쪽은 다 똑같은 힘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의지는 기초와 같고 유효적 힘은 완전한 건물의 꼭대기와 같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처음과 나중의 창조자라고 말함으로써 양자와 동등함을 더욱 분명하게 했다. 궤변가들은 이 둘 사이에다가 어떤 것을 인간 편에 남겨두는 궤변을 늘어 놓는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의미하는 자유의지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행동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것, 그리고 독특하고 분리된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있다.
 
나는 용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 자체를 논하고 있다.그들은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자유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키어 올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함으로써 자유의지를 구분한다. 그들은 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역지 주셨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은 예외없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단순히 돌아섰거나, 뒤섞여져 있으므로 선한 의지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선한 의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우리가 순전한 은혜가 없이는 선을 조금도 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서 사람을 마치 돌과 같이 만든다고 비난하지만 이것은 수치스러운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지를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의지는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악하여졌지만 하나님께서 재형성시켜 주실 때에는 선하게 되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이도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경향성이 성령으로 지배되어질 때에 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야 우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적용된다는 것과, 궤변 철학자들의 교훈이 어리석다는 것,  그리고 은혜가 우리에게 제공되어 우리들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선을 택하고자하면 할 수 있도록 하여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유효적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의지를 행사하도록 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논리가 둘째 부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바울은 '하나님은 '에에네르게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감동케 하시어 거룩한 행위에서 완전해지고 유효적인 능력이 갖도록 하신다.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약속하시기를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리니 (겔 11 : 20 )' 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인내가 하나님의 순전한 은사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선한 의도' 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베네플라시툼' 즉,  '기뻐하신 뜻'이라고 부른다. 헬라어는 종종 이같은 의미를 사용하는데 문맥도 이 해석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취하여 하나님에게 돌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선한 의지와 행위 모두를 하나님의 유효적인 노력에 돌리기를 만족해 하지 않고, 모두를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에 돌린다. 바울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궤변 철학자들이 공로의 보상으로 생각하는 종속적 은혜의 개념을 몰아낸다. 바울은 우리의 일생이 올바르게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을 좇아야 된다고 가르친다.
 
"두렵고 떨림으로" ;  이 말씀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려움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도록 권면한다. 바울은 일상적 사용 방법대로 두려움과 떨림을 연결함으로 심각하고 간절한 두려움을 강조해서 말한다. 따라서 바울은 게으름과 안일함을 몰아낸다. 바울은 '행하라' 는 말로 항상 성공하기 위해 재주를 부리는 우리의 망령됨을 책망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담대한 용기를 가지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 어찌 우리가 안일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살아 움직이는 지체 속에서 역사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즉시 우리의 교만을 "두렵고 떨림"으로 라는 말쏨으로 인간적인 노력을 억제시킨다.  또한 다음과 같은 조심스런 추리도 가능하다. 바울이 너회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니 그러므로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또한 겸손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온전히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들을 때보다도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두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요. 가장 사소한 지경에 이르기까치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여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만심은 부주의함과 방종을 낳는다.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힘을 믿는 자는 모두가 점점 교만해지게 되고 동시에 조심성이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을 알고 있다. 죄악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전폭적으로 의지할 때에 고칠 수가 있다. 분명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될 때 점점 선하게 되며, 이러한 자는 부주의함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반면에 자기의 힘을 믿어 부풀어 오른 자는 동시에 방종에 빠져드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면서 자유의지를 축소하는 우리들의 입장을 공격하는 교황주의자들은 뻔뻔스럽게 비방하기를 우리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하나님을 두려워 벌벌 떨게 함으로 모든 관심을 파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 교황주의자들의 교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교리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너회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움으로 그에게 복종하라 고 말한다. 나는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들음으로 더욱 방종하여 죄악에 빠져드는자가 많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교리의 잘못에서 온 것이라는 데는 반대한다. 우리가 이 교리를 받아들일 때는 우리의 마음에 더욱 조심을 하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절이 마음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다. 뗘는 자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바울의 말이 우리가 일생 동안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굴곡이 있어야 할것으로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는 한, 바울이 확신을 갖기를 주저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고 볼 수가 없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확신과 '플레-로포리안' 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다. 
 
논쟁이 없이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결론은 간단하다.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겸손을 낳고, 다른 하나는 주저함을 낳는다. 전자는 육신적인 방종과 나태함이 크고, 교만에 반대되는 것이고, 후자는 믿음의 확신과 반대된다. 더우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자는 자기들의 연약함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고 위로를 받는 것이지 결코 방종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위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욱 기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두려움은 양심의 평온함을 뒤흔들고 확신을 혼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확신을 갖도록 해준다. 반면에 우리들의 불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를 뻔뻔스럽게 대하도록 한다. 이 말들은 바울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가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께 복종할 것만을요구했기 때문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 ;  옛날에 펠라기우스파가 주장하듯 오늘날의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절이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어리석은 주장을 한다. 우리가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앞에서 말했던 즈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을 하면, 그들은 즉시 다음과 같은 말을방패 (말하자면)로 삼아 받아 넘긴다.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공통으로 적용이 되는 말인데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반반씩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요컨대 그들은 "이루라 는 말에서자유의지를 소구원 이라는 말에서는 영생의 공로를 유출해 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구원은 우리의 소명의 전 과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유선택에 따라 정하신 모든 것들의 완성까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편협하고 건방진 말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 복된 생명을 동경할 때에 완성된다고 말한다. 옹우리를 부르치고, 우리에게 구원을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요. 우리 편에서는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동하도록 예비해 주실 때에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10 (0.0 ) (3) 고속일시 토우등1000바울이 사용한 말과 어울리는 의미는 :끝까지 간수하라 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심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가 아무 할 일도 없이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은 밀한 자극을 통해서 우리가 충동을 받아 기쁨으로 일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14.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이것은 바울이 권면한 겸손의 열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주의깊게 배우게 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어 사람들 가운데서 조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기 차신을 기쁘게 여길 때는 두 가치 결점이드러나게 된다. 즉 피차간에 서로 되고 결국은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세번째로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몹시 까다로운 사람들이 혼히 일으키는 불평을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것의다. 미워하는 것이 항상 두려운 것이 아님은 사실이지만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다른 사람이 더욱 악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저들이 무고히 나를 미워하나이다. (시35 :19)라는 말씀이 우리에게서이루어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 
 
전 도 (priking 총  (p 을 없 (x (x )도누가 그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해 도 나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원망과시비는 누구에게나 항상 분수를 넘게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툼을 일으키는 동기를 만들어 준다. 사실 이 표현은 '다툼이나 불평을 하지 말라 는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는 문맥에서 그리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membyroupla (멤프시 * 5 )는 거의가 모든싸움과 비방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는 이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정결한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이러한 것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15.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  현실적으로 볼 때 믿는 자들은 이 땅위에서 사는 동안 악한 자들과 뒤섞여서 살면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땅에서 뛰놀고 있다. 따라서 불신자들로 사면이 둘러싸이지 않은 채 경건하게 지내는 한 가정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더욱 분발해서 모든 부패한 것들과 대항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이렇다. '진실로 너희는 악한 자를 삼가라 더우기너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기억하여 그들을 뗘나라. 그리하여 너희의 생활에 저들과 구분된 분명한 표징을 가지라 결단코 이와 같은 생자은 너희를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해줄 뿐만 안니라, 죄악과 썩어질 것으로 가득찬 이그러진 세대에서 뗘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단바울이 거스리고 어그러진 세대' 에서 교인들을 불러내는 것은 문맥과부합된다.
 
바울이 우리엔겐 말하는 것은 더욱 조심하여 운리들로 하여금정도()에선벗어나게 하려는 불신자들의 많은 위협을 준의하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의 모든 생활은 우리를 반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여러잘래의 미로 ()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 산용된 형용사들은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불신자들에게 똑같이 적용이 된다. 사람의 마음이 악하고 분별이 없을진대 그 근원에서 무슨 열매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사람의 생활이 성령으로 다시 나기 전에는 순전하고 올바른 것이라고는 하나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홈없는 자녀"  : 이 말은 *흠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신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감으로써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전혀비난을 받지 않을 만큼 완전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이 없는 자라고 부른 것은 전심을 다해서 완전해지기를 위해 항상 힘쓰고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헬라어 어미로 볼 때 너희가나타낸다 고 하는 직설법으로 보는 것보다 명령법으로 보는 것이 권면에더 잘 어울린다. 바울은 비록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밤의 자녀들이어서거기에는 다만 어두움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밝히사 너희의 생활의 순결함을 어두움 가운데서 드러나게 하시고 자기의 은혜가 더욱 밝히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했지만 불신자들까지도 등불이 되어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기를 원한다. 또한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 호와께서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사 60 : 2)라고 했다. 또 곧 이어 말하기를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 오리라"고 한다. 비록 이사야가 말한 내용과 바울이 여기서말하는 거룩한 생활이 그 교리에서는 다른 것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항상 사도들을 부르실 때 특별히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것이다( 마 5 : 14.).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생명의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바울이 등불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악한 것들을 불태워 버리는 등불이 되도록하려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빛이 나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말씀을 등불에다 비유했다. 달리 비유하자면 우리는 촛대요 복음 진리는양초와 같아서 우리 위에 복음 진리를 올려 놓음으로 사방에 이 진리의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우리에게 만일 우리가 순결한생활로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당하게 거스르는 것이라고 한다. 의것은 그리스도께서도 중요한 문제 로 말씀하셨다 "사람이 1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and the 마5%: 15)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말씀으로 거듭나는 방법을 통해서 그 위에 서 있게 될수가 있다. 우리가빛을 비추는 방법은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그 빛을 억제하거나 무기력하게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나님의 진리를우리에게 부여받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천국 복음으로 비추어진모든 사람은 빛을 가지고 다니는 자들인데, 혹 거룩함과 순결함 가운데서걷지 않으면 이 빛이 그들의 죄를 찾아내고 들추어 낸다. 또한 이 빛은 자기 자신을 바른 길로 :  인도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비추어 준다.
 
"나로 자랑할 것~~~~~" ;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만일 자기가 그들 중에서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의 영:말한다. 진실하게 일하는 자들은 결코 불운하게 자광이 되어질 것이라고PERERERIIN기의 수고의 대가도 없이 허공을 치는 경우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성공이란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므로 하나님의여러가지 축복에다 이 하나를 더해준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사도직이 많은 교회들을 통하여 영광을 얻도록 하신 것같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도 바울이 조금 뒤에트로피들서 '너희는 나의 면류관 (빌4 : 1)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많은을 주실 것이 분명하다.말하기를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혹 어떤 자들이리라고 명하면서 지금은 자기의 수고에 영광을 돌리라 하니 어떻게 아럴 수가 있는가 라고 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자신을 죽이고 모든것을 하나님 앞에해 존재하게 되고,의 은혜 안에서날에때까지그리스도의판대 앞에 설맡기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우리의 영광을 위고린도 전서 (* 6)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영광을 받을 수 있게 된다.라는 표현은 믿음의 보상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심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인내하기를 당부하고자 함이다.
 
"17. 만일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  헬라어로는 arcevooudi (스펜도마이)라고 했기 때 문에 나는 이것을 고대 사람들이 시행했던 도살 협정이나 협약에 의한 희생을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왜 냐하면 헬라어 artov 6at(스폰다이) 는 확정된 협정에 의해서 희생되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이기때문이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바울은 죽음을 믿음의 확증이라고 말했는데이것은 기필코 성취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려지는 것은 교인들이 복음으로 거룩하게 되어질 때라고 말한점에서 모든 귀절이 보다 분명해진다. 비숫한 표현이 로마서 (15: 16)에도있는데 거기에서는 바울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복음이 희생 제물을 자르는 영적인 칼이라면 믿음은 희생물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희 생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바울이 말한 dootav kat lettouption (뒤시안 카이 레이투르기안)은앞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빌립보 교인들을 가리키고, 뒤의 것은 희생하는 행동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바울 자신을 의미한다.
 
이 말은경영 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써 모든 종류의 기능과 직책을 포함한다.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것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더 관계가 많으므로라틴어로는 operari sacris (오폐라리 싸크리스 거룩한 의식에 고용되어진)이라고 말한다. 이제 바울은 자기가 희생제물이 됨으로 해서 교인들이더욱 확증을 얻고 확신을 갖게 된다면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복음이 진실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때는 우리가 우리의 가르치는 바를 피로써 확증할 준비간 되어 있어얀 할 때라는 것이다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신앙의 본질이란 다만 공허한 것이 아니라인간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유익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복음의사역자들도 역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사실로
 
위로를 받는다. 사람이 자신을 열심으로 복음 전과에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교황주의자들은 이러한 회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생각을 고안해 냈다.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 . 만약 바울이 죽는다면 빌립보 교인들은이것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알아서 바울의 죽음을 통해 유익을얻게 될것이다.
 
"18. 너희도 기뻐하고~~~~~~" ;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키기를 죽음이란 믿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으므로 기쁘게그리고 두려움이 없이 죽음을 대하라고 한다. 바울은 앞에서 가르치기를죽음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서빌립보 교인들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말하기를 죽음이란 그것이 가져다 주는 유익을 발견하게 될때에는 조금도 슬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자기가 죽는것 그 자체는 스승을 잃는 막심한 손해가 될는지 몰라도, 자기의 죽음으로인해서 복음이 '확증되어지는 것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값진 것이다.이러한 이유에서 볼 때 죽음이 자기 개인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고 한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너희도 기뻐한다'고 현재형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