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사사기21:1 ~ 25)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 하리라 하였더라 (1)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2)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3)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4)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 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5)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6)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또 이르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8)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9)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0) 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11)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12)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3)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14)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15) 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16) 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7)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18)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19)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서 숨어 (20)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1)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2)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23)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4)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25)
2. 묵상 (박윤선박사주석)
삿 21:1-3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 그들의 이같은 결정은 일찌기(전쟁 직전) 미스바대회에서(20:1) 하였던 것이다. 전쟁후에 이제 그 결정이 문제화되어 있다. 곧,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은 그 전쟁으로 인하여 소수(少數)로 남았는데, 그들이 다른 지파의딸들과 결혼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른 지파의 사람들도 이를 원통하게 여긴 것이다.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 살벌하던 전쟁의 시기(時期)가 긔나고 이스라엘은 "벧엘(임시로 법궤를 모신 곳)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들은 이제 이스라엘 중 "한 지파가이즈러진" 것을 생각하여 "대성통곡"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형제를 과도히 벌한 저희의 가혹한 행동을 뉘우치는 울음이다. 참으로 이번 전쟁에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의 다 죽고 극소수가 남았을 뿐이다.
삿 21:4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 그들이 베냐민 지파가 존속하기 어렵게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 받고자 한 것은 그들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때에 제단이 있었는데(20:26-27) 그들이 왜 새로이 "한 단"을 쌓았는지 알기 어렵다. "번제와 화복제"는 하나님꼐 헌신함과 하나님과 화목함을위한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고를 신앙함에 대한 예표이다. 엡 5:2 참조.
삿 21:5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살아남은 남자들의 결혼 문제 때문에 대책을 강구한다. 그것은 하반절의 말씀과 같이 그들이 총회의 맹세 내용에 기준하여 그 해결책을 찾아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을 또다시 유감스러운 방법으로 처리하려는 것이다. 8-12참조. 그들은 이제 전쟁 직전에 미스바에 모였던 총회의 맹세 내용대로 시행하려고 그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이 어느 지방 사람인지 탐문한다.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 히브리 원문에는 이 문장 초두에 "이는"이란 말(* )이 있다. 이것은 윗말씀(상반절)의 이유를보여준다. 곧, 그들이 문제 해결(베냐민 지파의 남은 남자들의 결혼 문제)을 위하여위에 탐문한 이유는 전쟁 직전 미스바총회(20:1)의 맹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맹세는, 베냐민 지파를 징계하려고 모였던 이스라엘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지방 사람들을진멸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제 전쟁을 마친 그들이 그 맹세를 실행함으로 베냐민 지파중 남은 남자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한다(12-14).
삿 21:6,7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 (6절 하반).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베냐민 지파가 족속하지 못할까 염려하며 탄식한다. 인간이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사회악(社會惡)을 징계하는 데 가담할 수는 있으나 징계 받은 자의 비참해진 결과에 대하여는 다시 동정을 아끼지 않아야 된다. 갈 6:2 참조. 남이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그를 멸망시키는 죄악과 거의 같은 것이다. 레 19:17-18 참조.
삿 21:8-12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 (10절 하반).
이스라엘 총회(20:1)에 올라오지 않은 자들이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임을 확인한이스라엘 "회중" - 은, "큰 용사 일만 이천" - 을 선발하여 그곳으로 파견하였다. 이 때 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용사들이 "젊은 처녀 사백인" - 을 남겨서 이스라엘 진(陣)으로 끌어 왔다.
삿 21:13-21
온 회중이 림본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이스라엘 회중이 곤궁에 빠진 형제(600명)를 위하여 그들을 도와줄 대책을 마련하고솔선하여 "평화를 공포"한 것은 잘 한 일이다. 그들이 베냐민 지파를 위하여 여호와앞에서 통곡하며 탄식한 것(2-3)은 진정이었다. 이스라엘이 림본 바위 틈에서 돌아온 베냐민 사람들에게 야베스 길르앗에서 끌려온처녀 400명을 주었다.그러나 아직도 처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이 또 한 가지 방침을 세워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포도원에 숨었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21절).
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 곧, 베냐민 남자들이 실로의 처녀들을 강제로 붙들어 갔으므로 그 처녀들의 부모 형제에게 불평이 생기게 되면 그 변호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맡겠다는 것이다. 분명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불평거리는, 그들이 미스바 맹세(곧, 이스라엘의 딸들을 베냐민 지파 남자와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한 맹세)에 저촉된다는 것이다.만일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변호의 내용은, 베냐민의 남은 남자들이 실로의 여자들을 취한 걱은 그 부모 형제의 의사(意思)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니 만큼, 그들(그 부모 형제)은 미스바 맹세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삿 21:24,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25절). 결론적으로 강조된 이 말씀의 의미는, 그 때 이스라엘은 각기 소견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다 것이다. 그러니 만큼 베냐민 지파에 대한 이스엘의 처사(20-21)에 옳게 행한 일이 있는 반면에 잘못 행한 일도 있다는 것이다.
3. 호크마주석(대강)
앞장에서의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으로 인하여 이즈러진 베냐민 지파를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고 있는 장면이다. 즉 림몬 바위에 숨어 살아난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20:47)에게 아내를 마련해 주어 기업을 보존케 하려고 이스라엘은 먼저 야베스 길르앗을 쳐 처녀 400인을 얻는다(1-12절). 그리고 나머지 모자라는 처녀 200인에 대해서는 베냐민인들로 하여금 직접 실로에 가서 구하도록 방편을 베풀어 준다(13-24절).
그런데 본서 기자는 이러한 본장을 결론 지음에 있어서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25절)란 말로 맺음으로써 당시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시사해 준다. 물론 본장을 살펴보면 바알 숭배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백성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민족적인 유대감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지파간의 긴밀도도 매우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문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지도자(2:7)가 없으므로 이스리엘 백성들은 어떤 당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장에서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결의하는 과정에서 그러했고(20:10, 11) 본장에서 길르앗 야베스를 치는 과정과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실로에서 무도하는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충고한 과정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상 가운데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 조상들이 지켜 오던 종교적 관습은 명맥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서 회개한다거나(2절) 하나님 앞에 맹세한 바는 변개치 못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1, 5절). 하지만 이러한 인본주의적 요소와 명맥만울 유지하는 산본주의적 요소의 병존(倂存)은 결국 상호 충돌과 모순만을 일으킬 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자신들의 소견대로 행하고서는 결과적으로 혼란에 빠지자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분명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곧 참 신앙이 없는 외형적, 가시적 신앙 행위는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고 말했고 이사야 선지자도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 1:19)라고 말했다.그러니 이상과 같은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즉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은 꼬리를 무는 죄의 악순환과 혼돈뿐이란 점을 ! 그리고 그러한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상적, 형식적 신앙과 해결책만으로는 안 되고 진정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인도하심에 따르는 길뿐이란 점을 !
1. 이스라엘 총회의 당면 문제(21:1-7)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서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한 베냐민 지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이스라엘 총회가 당면한 어려움에 대하여 가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스라엘 총회는 림몬 바위에 숨어 겨우 목숨을 보존하였던 베냐민인들이(20:47) 다시금 한 지파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 600명에게 아내를 주어 기업을 잇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스바에서 기브아의 죄악을 듣고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베냐민 사람에게는 절대로 딸을 주지 않겠다고 저주하여 맹세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아내를 구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1절). 만일 이방 여인을 보내어 그들과 결혼시키며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가 아닌 이방 민족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아예 제기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딸들 중에서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맹세한 서원을 준수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던져 주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범죄 또는 실책은 연속되는 범죄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즉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의 자존심과 완악함 때문에 비참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20:12-16) 이스라엘 자손들은 혈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한 지파를 멸절케 하는 무서운 맹세를 하였던 것이다(1절).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악순환 내지 모순은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다.
(2) 함부로 맹세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는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맹세 외에도 미스바 총회에 참석치 아니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맹세가 나온다(5절). 결국 이스라엘은 이 같은 맹세도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하였는바 야베스 길르앗 거민은 이스라엘에 의해 무참히 도륙당하고 만다. 물론 그 결과, 베냐민인들의 아내를 구하는 문제는 해결되었지만(21:8-12) 이처럼 경솔한 맹세로 인하여 무고한 인명이 살상당한 것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큰 문제이다.
숫자 '12'의 의미 - 성경에 나오는 여러 숫자들은 제각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중 '12'는 '완전 수'라고 하는데 흔히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숫자 12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인 집착은 이스라엘 역사 상에 자주 나타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파의 수가 늘고 주는 것에 상관없이 12지파를 보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예를 들면 레위 지파의 자리를 채워서라도 12 지파를 유지하기 위하여 요셉 지파를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로 계수한 것이라든지(수 14:3, 4), 본장에서도 베냐민 지파의 멸절을 막기 위해 야베스 길르앗이라는 한 성읍의 멸절을 불사한 것 등을 들 수 있다(1-15절). 또 신약 시대에는 12명이란 예수 수제자의 고유 수를 유지하기 위해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제자로 산출하기까지 했다(행 1:15-26). 그밖에도 성경에는 숫자 12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곧 하늘의 열 두 문, 성벽의 열 두 기초, 열 두 과일을 맺는 생명나무 등이다(계 21, 22장). 그런데 숫자 12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여한 종교적 의미는 대부분 제사장 나라로서의 특별한 선민 의식(출 19:5, 6)이나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는 내세관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증거로 제사장과 레위적을 24 반열로 나눈 것과(대상 24:4 ; 25:31) 하늘 보좌를 둘러싼 24명의 장로들(계 4:4 ; 5:8 ; 11:16 ; 19:4)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2. 문제 해결을 위한 두 가지 계책(21:8-25)
이스라엘 자손들이 베냐민 사람 600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기 위해 취했던 두 가지 방도에 대한 언급이다. 먼저 그중 하나는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치고 그들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베냐민 사람의 아내로 주는 것이었다(8-12절).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딸을 베냐민인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한 자신들의 맹세(1절)를 준수할 수 있게 되고 베냐민 사란=바들도 아내를 얻어 한 지파의 사멸을 방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베스 길르앗은 그리 크지 않은 성읍이라 그곳에서 초녀 600명을 다 구할 수가 없었으니 또 다른 방도를 강구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색한 두번째 방도는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살로에서 춤추러 나온 처녀들을 납치케 하는 것이었다(13-25절). 그렇게 할 때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의(自意)로 자기 딸을 준 것이 아니므로 맹세를 파기할 때 오는 형벌(레 19:12)을 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단지 인간적인 꾀만 좇아 추진한 이 두 가지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불의가 내포되어 있다.
(1) 만일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총회에 참석치 않은 것이 그렇게 큰 죄였다면 그들이 그와 같이 총회에 참석치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거나 그들로 하여금 총회에 나와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야 했다는 점아다(마 18:15 ; 요일 5:16, 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러한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자신들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며 한 성읍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
(2)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한 것은 자신들의 죄책을 합리화시키는 또 다른 죄악을 범한 것이란 점이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당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보다는 그들의 잘못된 맹세를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타인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또 다른 죄악을 범한 것이다.
(3) 모든 일반 백성들은 이에 대하여 침묵하므로 같은 죄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일반 백성들 중에는 아무도 이러한 불의한 방법에 의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더욱이 그 당시 대제사장으로 있던 비느하스(20:28) 조차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같이 고의적으로 죄를 묵과하는 행위는 오히려 적극적인 범죄보다 더 죄악된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피상적인 해결책으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뿐이다(롬 5:9).
합리적 사고 방식의 맹점(盲點) - 합리적 사고 방식이란 일체의 비합리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배척허고 이성(理性)과 논리(論理)에 근거하여 어떤 사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인식하는 사고 방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은 종종 지나치게 과학적인 경험을 중시한 나머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양심이 증거해 주는 것조차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이성(理性)과 과학을 신격화하는 무신론(無神論)에 빠져 버리는 경우조차 있다, 이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이성이 죄악에 물듦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칼빈주의적 사고 방식과 배치되는 위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고 방식의 소유자들은 종종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은폐하기 위하여 합리성을 주장하며 과학을 내세우게 되는데 이것은 더더욱이 인간이 전적 타락의 한 증거가 된다. 또한 이러한 사고주의자들은 합리적 이성의 작용에 의하여 성취되는 세계관을 지향하고 기존한 모든 비합리적인 것들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곧잘 한
다. 그 예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일어난 자유 신학에서의 비산화화 작업이나 슐라이어막허의 종교관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앙 자체를 비합리적으로 규정하는 무신화(無神化) 작업임이 분명하다.
한편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이제 이스라엘 장로들이 실로의 춤추는 처녀들을 베냐민 사람들의 아내로 취하게 한 사건을 살펴보자(16-22절). 왜냐하면 이 사건은 바로 이러한 합리적 사고 방식이 갖는 잘못을 모두 범한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딸들을 자의(自意)로 베냐민 사람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한 맹세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22절) 그들의 맹세가 오직 하나님의 심판과 권위 아래 있음을 무시한 처사였다. 또한 맹세의 성취 여부는 만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건실함과 성실함에 달려 있다는 사실(출 22:7, 10, 11)을 망각한 것이다.
이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받은 성도들은 세상의 부패와 죄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대처해 나갈 것이 아니라 날마다 썬어져 가는 구습들을 벗어버리는 노력에 게을리해서는 안 됨을 교훈받을 수 있다(엡 4:22; 딤후 1:10).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도 온 인류의 죄악을 합리적인 방법으로가 아닌 십자가의 희생으로 친히 해결하셨지 않는가(롬 3:25; 엡 1:2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