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사사기 19:1 ~ 15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1)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2)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3)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4)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5)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6)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7)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8) 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9)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10)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1)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2)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13) 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14)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15)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삿 19:1,2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더니 - 이 "레위 사람"의 타락은, (1) 그의 축첩(蓄妾) 생활로 증명되고, (2) 그가 위기에 이르러 그 첩을 비류들에게 내어 준것으로(25절) 증명되고, (3) 또 그가 자기 첩의
시체를 열 두 덩이로 찍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낸 것으로 증명된다(29절).
삿 19:3-8
레위인이 자기 첩을 데리고 고향(에브라임 산지)으로 가려고 할때애 그 장인이 그의 떠남을 수차 만류하고 여러날 대접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친절이 그 레위인에게 화근이 되었다. 그는 두 차례나 일찍 길을 떠나려고 하였으라(5,8), 그 장인의 강권 때문에 떠나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그 장인의 친절한 행위의 성격을 평가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전연 생각지 않고 육체적 쾌락만 위주함. 이 부분에서 먹고 마신다는 말과 즐긴다는 말이 많이 나오고(4,5,6,8,9), 여호와란 성호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2) 인정에 치우쳤음. 그 장인은 그들과 작별하기를 덮어놓고 아쉽게 만 생각하였다. 그는 그들과 작별할 시간을 약속했다가도 다시 변심하고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곤 하였다. 레위인은 그 첩과 함께 두 차례나 아침 일찍 떠나려 했었는데도(5,8), 그 장인이 두 번 다 그들을 해가 기울도록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친절은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께 밀어 맡기지 아니하고 인정에만 기울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늦게 떠났으므로 돌아가던 도중 기부아에서 참변(22-26)을 당하게 된 것이다.
삿 19:10-15
첩을 데리고 가는 그 레위인은 날이 저물어지자 유숙할 곳을 찾았다.
우리가 ...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 (12절). 이것은 레위인이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들어가서 쉬자는 그 종의 제안에 반대한 말이다. 그가 반대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과 교제하면 종교적으로 더러워진다는 사상에서 취해진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처사는 도리어 가증했다. 그는 레위인으로서 첩을 가진 것이 벌써 타락할 대로 타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 그가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형식만 취하는 외식자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대한 이스라엘의 교제를 아주 엄금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대에 그들의 우상주의를 막기 위하여 어떤 특수한 관계(예컨데 혼인 같은 것)을 금하신 것이었다. 다윗은 여부스 사람 오로난에게 값을 주고 제물을 사기도 하였다.(대상 21:25).
기브아에 ...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속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 (15절). 그 때에 기브아 사람들은 사랑이 없었다. 해가 진 뒤에 길을 가던 나그네가 성읍 거리에 앉아 있는데도 아무도 숙소를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 때에 기브아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증거이다.
3. 사사기 19장이하 대강 (호크마주석 발췌)
전장으로써 미가의 우상과 관련된 이야기는 끝나고 이제 본장에서부터 21장까지는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내분(內紛) 사건이 언급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본장은 발단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레위인과 그의 음행한 첩에 관련된 이야기가 소개된다(1-15절). 그리고 기브아 비류(匪類)들이 레위인의 첩을 윤간(輪姦), 첩이 죽게 되자 이스라엘 지파간의 내분에 도화선이 당겨지게 됨을 언급한다(16-30절).
전장(17, 18장)에 기록된 미가의 이야기와 이러한 본장의 이야기는 연대적으로는 직접적으로 연속되지 않으나 내용 상, 주제 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연결점이 있다. (1) 두 사건이 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1절 ; 17:6 ; 18:1)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전반적으로 만연되어 있었던 타락상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2) 두 사건이 다 레위인과 연관된 타락의 일면이라는 점이다. (3) 두 사건이 모두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레위인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이다(1절 ; 17:1). 아마 이러한 연관성으로 인하여 본서 기자는 이 두 사건이 서로 시차(時差)를 두고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란하게 기록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장에 기록된 사건은 시대 초기(사사 옷니엘의 활동 당시로 추정됨)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이때엔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20:28). 2장에서 이미 사사기 시대 전반에 걸쳐 펼쳐질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에 대하여 암시된 바가 있으나(2:7, 11-15) 결국 본장은 그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써 타락의 심각성을 지적해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특히 본서 기자가 사사기 초기에 발생한 본장의 사건을 본서의 맨 끝에 배치한 것은 사사기 시대 전체가 이러한 부패한 양상들로 전개되었음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부패한 사건의 책임의 절반은 여호와의 신앙으로 전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야 할 레위인에게 있었다는 점(1절)은 사태의 심각성을 한층 고조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神政)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은 거의 모든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악으로 물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출애굽 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인들이 섬기는 우상과 그들의 도덕과 관습을 그대로 비판없이 수용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결 의무(출 19:5, 6 ; 20:1-17)를 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인 레위인들조차도 가나안의 풍습에 따라 행하는 범죄가 무감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롭고 독특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법도 도덕과 삶의 체계를 교육시켜야 할 당위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시야 53:6의 말씀은 아주 적절하다. "우리는 다 양 같아고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 따라서 본장 초두에서도 암시되고 있는 것과 같은 왕정 제도(1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의 백성으로서 바로 살게끔 교육하는데 적절한 장치로서 도입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18:1-10 강해,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필요성과 부정성(不正性>. 한편 선지자 호세아는 사사기 시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한 전초기로서 사사기 시대를 거친 백성들이 그제서야 비로소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고 말했다. 여기서 '그 왕 다윗'은 본서 기자가 17:6과 18:1, 그리고 본장 1절에서 희구한 '왕'의 표본이며 다윗이 다스리던 나라도 그 당시에 희구하던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1. 도망간 레위인의 첩(19:1-15)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 레위인이 본처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다만 그의 첩과의 삶이 소개되고 있다.
본문에서 두 등장 인물이 레위인과 첩이라는 데서부터 이미 그의 파생적인 가장 구조가 암시되고 있지만(1절) 그 첩이 다른 남자와 행음한 뒤 남편에게서 떠나갔다는 사실(2절)에서 이 레위인은 대단히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친정으로 달아난 첩이 넉 달 동안이나 머물 수 있었다는 사실(2절)에서 이 첩이 레위인의 아내로서 온당치 못했으을 뿐만 아니라 이 첩의 아버지, 즉 그의 장인도 정상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 하에서 레위인은 장인 집으로 찾아가 며칠을 머문뒤 첩과 함께 귀가 길에 오른다(3-10절). 그리고 도중에 날이 저물자 여부스족의 성읍인 예루살렘에서 유숙자는 그의 종의 간청을 뿌리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기브아 성읍에까지 힘들게 여행한다(10-14절). 그러나 그곳에서 아무도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맞이하는 사람이 없는 어려움에 봉착한다(15절). 이는 곧 당시 도덕적 붕괴가 한 레위인의 가정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며 전체 민족에 만연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한 가정의 삶은 당대의 전체 사회적인 삶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을 중요시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 따라서 건전한 가정이 있는 사회응 그만큼 더 건전하기 마련이다. 신약 시대에도 가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이와 관련 사도 바울은 특히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는 단정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하낟고 교훈하였다(딤전 3:12).
(2) 올바른 가정 교육이 시행되지 않은 한 건전한 가정의 존립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넉 달 동안이나 친정에 돌아와 있어도(2절) 한번도 딸을 책망하지 않고 시댁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지 않은 레위인 첩의 아버지는 가정 교육에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잘못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책망하기 보다는 지나친 관용으로 방임해 두었기 때문에 그의 딸은 자신의 가정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배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경멸하는 어리석은 아내가 되고 말았았던 것이다.
(3) 한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의 건재(建在)는 도덕성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다(신 1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브아 사람들은 이 레위인 일행을 냉대하므로 그들의 도덕성성의 실상을 드러냈다(15절). 예수님께서는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는 기본적인 윤리조차 없는 자들을 저주하셨다(마 25:43). 이러한 윤리의 부재(不在)가 이방인인 여부스 사람들(10-12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인 기브아 사람들에 의해 드러났다는 점에서 당시대의 타락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가정 윤리의 성서적 기초 -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정 윤리의 기본 지침은 우선적으로 일부 일처제(一夫一妻制)에서 시작된다. 즉 가정은 한 남자가 그의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때 비로소 성립된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창 1;27 ; 2:24 ; 5:21). 그리고 계속해서 남편은 다스리는 자(창 3:16)로서, 그리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 자(출 20:12 ; 신 5:16)로서 언급되어 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에 비해 보다 엄격한 가정 윤리가 제시되고 있다(골 3:18-21 ; 엡 5:22, 23).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허락한 이혼은(신 24:1-3)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일 뿐이니, 보다 수준 높은 윤리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셨다(마 5:27-32 ; 19:1-12). 이러한 성경의 가정 윤리를 생각해 볼 때 부당하게 첩을 거느리거나<창 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 간음함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본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행위는 반드시 지탄받아야 마땅하다(1, 2절). 사실 가정은 단순히 개인의 인간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고 그리하여 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근간을 이루는 가장 신성한 삶의 터로서 마땅히 책임과 의무를 다해 지켜야 하는 것이 곧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 윤리가 이 땅에 정착될 때 그곳에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사회가 형성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흥왕할 것이다.
2. 기브아 비류(匪類)의 죄악(19:16-30)
마침내 레위인이 당한 비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어렵게 기브아에 도착하였으나 유숙지를 얻지 못하고 있던 레위인과 그 일행(10-15절)은 우연히 같은 고향의 노인을 만나 그의 집으로 인도된다(16-21절). 그런데 그날 밤 기브아 비류둘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니 그로 인해 레위인 첩이 윤간(輪姦) 당하여 죽고 마는 비극이 발생한다(22-26절). 이에 레위인은 거향으러 돌아와서 첩의 시신을 열 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어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을 고발한다(27-30절).
이상과 같은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은 마치 소돔 사건의 재현인 듯한 인상을 준다(창 19:1-11). 더욱이 소돔이 멸망한 자리인 사해(死海)와 가까운 기브아에서 이러한 음행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상을 더욱 짙게 한다. 과거 소돔인들의 음란한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오늘날의 사해 바다가 이를 생생히 증거해 주고 있다(창 19:4-26). 본서 기자가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을 증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악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무튼 이 같은 당시의 시대적 부패상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사단의 나라는 기본 윤리의 파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기브아 비류들이 행하려던 악행(22절)은 소위 남색(男色)이라고 하는데이는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성관계를 갖는 추악한 성행위를 가리킨다<창 19:5 주석>. 이처럼 기브아 성읍은 나그네를 영접하는 기본적인 윤리의 부재(不在)는 두말할 나위 없고(15절)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간의 기본 윤리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비류들, 즉 벧리알의 아들<22절 주석>이라는 말에서 암시해 주듯이 그들의 사단과 동조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깨뜨리므로서 결과적으로 사단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인간의 기본 윤리를 준수하고 수호하는 데도 솔선 수범하므로써 세상의 악의 세력에 잠식당하는 것을 막는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마 5:13).
(2) 사회악을 대처함에 있어서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집주인인 노인은 기브아 비류들의 욕정을 채워 주기 위해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겠다고 말했다(24절). 과거, 롯도 이와 동일하게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 놓겠다는 어리석은 제안을 한 적이 있다(창 19:8).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옳은 것이 아니었다. 사회의 악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책망의 대상이지(엡 5:11) 결코 타협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에 대해 타협의 자세가 되면 사단은 도리어 더욱 거세게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말것이다(25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자신을 거룩히 함에 힘써야 할 것이며 악에 대해서 강하게 맞설 수 있도록 성령의 검과 방패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엡 6:13-17).
한편 이상에서처럼 레위인이 당한 비극은 그 자신의 축첩(蓄妾)행위와 첩의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겠다(1, 2절). 그런데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심판받아야 마땅한 죄악이었으니 이제 다음 두 장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결국 이 같은 사실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여하한 죄악도 간과되어질 수 없음을 우리들에게 교훈해 준다(욥 34:10,11). 그런즉 우리는 매사에 삼가 행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에 손을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할 것이다(히 10:31).
그리스도인의 성윤리(性倫理) - 본문에 나오는 기브아 사람들의 음란한 행위를 보면서 우리는 성(性)에 대한 올바른 기독교적 입장을 정립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물론 성(性)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여(許與)하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이는 결코 남용될 수 없다. 이제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성경에서 성(性)은 상호간의 관계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를 곤고히 하기 위해서 당신 백성들에게 성적 순결을 요구하셨다(신 5:18).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나 가족의 관계를 유지톰 하시기 위해 많은 성에 관해 규례를 말씀하셨다(출 20:13-17).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관계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비들은 자기 딸들이 매춘에 빠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레 19: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문제를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관계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2) 성경에서 성(性)은 올바른 인간상 정립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성 문제는 반드시 거룩성과 성실성의 문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성적 타락은 어떤 타자(他者)외의 관계성의 포기임과 동시에 자신의 인격에 대한 자포 자기이다. 왜냐하면 탐욕과 충동적인 욕구는 이와 같은 관계와 인간성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 지어다"(레 20:7)라고 명령하고 있다. 또한 간음한 자에게는 사형을 내릴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레 20:10).
이러한 성경적 견해에서 볼 때 기브아 사람들의 비행은 크게 두 가지의 악한 결과를 초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회의 사회적 관계나 서로에 대한 신뢰성에 파괴를 가져왔고, 둘째는 레위인의 첩인 한 개인의 인간성을 파멸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악한 결과가 연발해서 일어날 때 사회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혹자는 성(性)에 대해 상황 윤리를 적용하여 성적 타락을 방조하려고 한다.그러나 이 문제는 방임해 둘 것이 아니라 그 자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권면 또는 징벌에 의해서 근절해야 할 문제이다. 또 다른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을 정죄하여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 역시 관계성을 파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요 8:11)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관계와 인격을 정립하는 차원에서 성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여성관 - 본문에는 기브아 비류들이 레위인을 상관하기 위하여협박하자 노인이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놓겠다고 사정하는 장면이 나온다(24절). 이와 유사하게 소돔성의 롯도 자기 두 딸을 소돔 사람들에게 내어 놓아 겁간(劫姦)케 하려 한 적이 있다. 또 입다는 자기 딸을 서원의 번제물로 바치기로 했다(11:39). 언뜻 보기에 이와 같은 사례들은 엄격한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구약 시대에 여자들의 역할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위와 같이 그렇게 무조건 여자의 인격이 부정되거나 무시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여자들에게는 결혼에 있어서 남자를 선택할 궈닐도 있었고(창 24:58 ; 민 36:6), 기업을 물려받을 수도 있었다(민 27:1-8). 또한 여자의 권리와 순결은 율법에 의해 엄중하게 보호받았다(출 20:14, 17 ; 레 18:20 ; 19:29 ; 20:10-14, 18-21 ; 신 22:22-30 등). 그리고 남편의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에 이혼 당해서도 안 되었다(신 24:1-4). 더욱이 여인은 가정에서는 어머니로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에 의해 존경도 받았다(출 20:12 ; 21:15 ; 레 19:3 ; 신 27:16 ; 잠 1:8). 특히 메시야가 여자의 몸에서 날 것이라는 후기 예언서의 예언(사 7:14)은 여자를 구속사의 특별한 위치에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간간이 목격되는 여성에 대한 무시 현상은 추첩제 및 일부 다체제와 함께 고대 근동의 이방 풍습에서 온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첩을 거느린것(창 16:1-3)은 종족의 번성이나 그 당시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그것 역시 엄연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한 것으로 긴장과 불행의 우가인이 되었다<창 4:16-24 강해, 일부다처제>. 성경은 분명히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배필로 창조된 점을 들어 차별없는 인격체임을 강조하고 있다(창 1:27 ; 2:21-24). 그러기에 드물긴 하지만 미리암(출 15:20), 훌다(왕하 22:14 ; 대하 34:22) 같은 이가 여선지자로, 드보라(4:4-5:31)가 여사사로 활동하여 뭇사람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구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본적 여성관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스 있다. 이와 관련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2:18-24 강해, '창조론에 나타난 성경적 남녀 관계'를 보다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