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사사기 18:14 ~ 31)
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 (14) 다섯 사람이 그 쪽으로 향하여 그 청년 레위 사람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그에게 문안하고 (15) 단 자손 육백 명은 무기를 지니고 문 입구에 서니라 (16)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갈 때에 그 제사장은 무기를 지닌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7)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니 (1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19)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20) 그들이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세우고 길을 떠나더니 (21) 그들이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붙어서 (22) 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얼굴을 돌려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하니 (23)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 (24)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5) 단 자손이 자기 길을 간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26)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27)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흡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세우고 거기 거주하면서 (28)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29)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0)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31)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삿 18:14
이 집에 에붓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등 신산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 그들은 이민(移民) 가는 도중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상에 관심을 두었다. 그만큼 그들은 우상주의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 만큼 그들이 부르며 의지한 소위 "하나님"(10절 끝)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偶像)이었다. 미가의 집의 우상주의(17장 참조)는 이제 단 지파의 우상으로 번졌다. 19절 참조
삿 18:15-18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 오는 목적은 우상들과 제사장을 옮겨 가려는 데 있었다. 우상주의에 대한 그들의 열심은 이러하니, (1) 그 우상과 그 비품을 강제로 빼앗았으며(16-18), (2) 제사장을 충동하여 데리고 갔다(19-20). 그들은 이렇게 미가의 우상 시설을 전부 탈취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이들은 극도로 타락하여 우상주의로 어두워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만족을 얻기 위하여 강도의 행동까지 취한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상주의자는 결국 어두움과 부패의 포로가 된다는 것이다.
삿 18:21-24
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 - (24절 상반) 우상주의자는, 자기가 만든 신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가 만든 제사장도 가진다. 그것은 장조주를 섬김이 아니고 피조물(사람과 사람이 만든 것들)을 섬기는 미신(迷信)이다. 우상주의로 어두워진 자는 이렇게 모순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마땅히 그 지으신 이(하나님)를 경배 해야 되는데 그가 지음 받은 자를 섬기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 인류의 경배의 대상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뿐이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제사장도 하나님이 세워 주신다. 제사장은 사람을 중보(仲保)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분이시니, 타락한 인류의 생각대로 세운 제사장은 그런 거룩한 중보자의 일을 할 수 없다. 우리의 중보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히5:4-6).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 (24절 하반) 미가의 이 말은 자기에게 있어서 우상과 그 제사장 이상 좋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 (26절 하반) 미가는 단 지파 앞에서 자신의 미약을 알고 그 우상을 포기하였다. 우상주의자는 그 우상 때문에 생명을 내어 놓지는 못한다. 물체에 불과한 그 우상이 그에게 무슨 힘
을 줄 것인가!
삿 18:27-29
"단 자손이 ...라이스에 이르러" 평안히 사는 그곳 사람들을 쳐서 이기고 거기에 "성읍을 중건"하였다. 그들은 저희 조상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 이름을 "단"이라고 불렀다.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 (28절 상반) 라이스는 거리 관계로 시돈의 원조도 받을 수 없었다(28절 하반). "베드르홉"은 휼레(Huleh) 평원의 윗부분에 있으며, 요단강이 그리로 흘러간다.
삿 18:30,31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 - 이 사람은 단 지파가 라이스로 데리고 간 레위인 소년일 것이다. "게르손"은 모세의 아들이다(출 2:22, 18:3; 대상 23:15). 우리 한역은 70인역(LXX)에 기준하여 "모세"라고 했으나 히브리어 구약은 므낫세로 되어 있으니 문제이다.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는 학설도 있다. 곧, 그 소년이 사실은 므낫세의 손자가 아니었지만 그의 우상주의로 보아서 그도 후세의 므낫세(므낫세는 우상을 섬겼음)와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세"라고 한 70인역(LXX)의 기록이 원본대로일 것이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 여기 "사로잡히는 날까지"란 것은 어느 사건을 가리켰을까? 많은 학자들이 이것을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이스라엘 정복 사건이라고 한다(왕하 15:29). 그러나 이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렇다면 (1) 북쪽 이스라엘에도 손을 뻗쳤던 다윗왕의 시대에도 단 지파의 우상 시설이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의미가 되니, 그것은 성립될 수 없는 까닭이며, (2) 이스라엘 전국에서 각 지파의 대표자들이 성전 건축을 축하한 솔로몬 시대에(왕상 5-7장)도 단 지파의 우상주의가 라이스에 여전히 존속하였다 는 의미가 되니, 이것도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이른 바 이스라엘의 "사로잡히는 날"이란 것은 사무엘 시대의 말기(末期)에서 사울왕 시대의 초기까지에 된 일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불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아 간 사건을 가리킨다. 법궤가 빼앗겼다는 것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사로잡힘과 같은 일이다. 법궤는 이스라엘의 영광의 상징이었다(삼상 4:21-22). 시편 78편 저자는 이 사건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과 같은 비극으로 간주하였다(61-64). 사실상 그 시대에 수리아 군대가 이스라엘 북쪽을 침략하기도 했으니,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을 것이다. 삼상 14:47에 기록된 "소바의 왕"은 앗수르 왕이었는데 그가 이스라엘의 북방에 왔던 것이 사실이다(Delitzsch).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 이 말씀은, "사로 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고한 문구에 대한 설명이다.
3. 호크마주석
=====18:14
이 집에 - 이에 해당하는 '바바팀'(* )은 복수형이다. 그래서 KJV, NIV,RSV 등은 이를 '이 집들에'(in these house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미가의 집이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집이었음을 시사해 준다(Goslinga).
에봇과...부어 만든 신상 - 미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던 각종 우상들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3, 5 주석을 참조하라.
=====18:15
소년 레위 사람의 집...이르러 - 미가의 집 중에서도 레위 소년이 머물고 있던 집은 따로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은 아마 미가의 신당일 것이다(17:5). 본절을통해서 보더라도 미가의 집은 많은 건물들로 상당히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있다.
문안하고 -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들은 이전에 레위 소년을 만났었기 때문에(3-6절) 그의 건강을 묻는 등 우호적인 표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루어 들이닥친 자신들 때문에(16, 17절) 레위 소년이 놀라지 않도록 안심시켰을 것이다.
=====18:16
문 입구에 서니라 - 본절에서 18절까지는 도적떼의 모습을 생생하게 연상시켜 준다. 문 입구에 선 무장한 600명의 단 사람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들의 동료들이 일을 마치고 미가의 집을 나올 때까지 파수하고 있었다. 한편 이로 볼 때 미가는어느 정도 군사력이 있는 소부족의 부족장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22절에서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단 지파의 뒤를 좇았던 것도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18:17
그리로 들어가서 - 다섯 사람의 정탐꾼들은 레위 소년을 잘 설득하여 동료들이 있는 문 밖으로 내보내어 함께 있게 하고 신당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1절). 한편 여기서 '들어가서'에 해당되는 원어는 '알라'(* )로서 '올라가다'라는 뜻이다. 왕하23:12이나 렘 19:13을 보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제단이 있었다는 표현이 있는데미가의 신당도 다락방이나 2층 건물에 있었음이 분명하다(Keil, Hervey).
문 입구에 섰더니 - 여기서 '섰더니'에 해당하는 원어 '나차브'(* )는 '배치하다'라는 뜻도 지닌다. 이로 보아 단 자손들은 미가의 우상을 강탈하기 위해 600명의군사로 삼엄한 경계를 폈음이 분명하다.
=====18:18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 단 사람이 신당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레위 소년이 자기 주인의 우상들을 다 집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이제 놀라서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아마 이전까지는 단 사람들이 미가의 신을 경배하려고 신당에 들어간 줄로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이에대해 이 레위 소년은 돈으로 고용된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미가의 신상에 함부로 손 댄것을 불경하게 여기지 않고 단지 도의적으로 주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탓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Cassel).
=====18:19
네 손을 입에 대라 - '잠잠하다'는 말의 반복으로 '아무말도 하지 말라'(Don't saya word, NIV)는 뜻이다.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 본서 기자는 단 사람들의 이러한 제안을 적기 이전에 벌써 17절과 18절에서 레위 소년을 '제사장'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단 사람들이레위 소년을 문안할 때부터(15절) 이미 그를 '제사장'으로 깍듯이 예우하고 있었음을시사해 준다. 한편 '아비'에 대해서는 17:10 주석을 참조하라. 이는 지도자적 위치에있는 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어이다.
=====18: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 여기서 레위 제사장의 타락한 본성을 또다시 보게 된다. 처음에 그는 생계를 잇기조차 궁색한 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던 미가의제안에 감격하여 한 개인의 제사장으로도 크게 만족했었다. 그리고 이 레위 소년은 미가에게서 아들과 같은 사랑도 받았었다(17:10, 11). 그러나, 단 사람들의 새로운 제안은 단순히 경제적인 충족 뿐만 아니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명예까지 부여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번 물질에혹했던 사람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자기 욕구를 채워 줄 대상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이전의 은인까지도 배반하는 법이다.
에봇과 드라빔과 생긴 우상을 취하고 - 이처럼 보다 나은 조건에 미혹된 제사장은본래 주인과의 의리와 계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기가 앞장서서 우상과 종교 기물들을 훔쳐 낸다. 그리고 단 지파와 동행한다. 이렇게 하여 미가의 가정을 타락시켰던 이제사장은 이제 한 지파 전체를 잘못된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30,31절).
=====18:21
그들이 돌이켜서...진행하더니 - 단 지파는 다시 라이스 땅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미가와 그의이웃들이 뒤에서 따라와 공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한 조치였을 것이다(22절).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 - 여기서 '어린아이들'에 해당되는 '하타프'(* )는실족할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자와 노인들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다음으로 '물품'에해당되는 '케부다'(* )는 시 45:13에서와 같이 '값진 것' 또는 '영화로운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KJV에서는 이것을 '탈 것'(carriage)으로 번역하고 있고, RSV에서는 한글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물품'(goods)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혹자는'케부다'라는 단어가 '무거운', '힘든'이라는 뜻의 '카베드'(* )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귀중한 물건을 가리키기 보다는 무거운 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Cassel). 어쨌든, 이 물품들은 수레 같은 운반 수단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을 것이다.
=====18:22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 미가는 제사장과 자기 신상이 없어진 것을 한참후에 알고는 곧장 추격대를 조직하여 단 자손을 따라갔다. 배경은 다르지만 이 장면은마치 라반이 야곱을 추적하는 장면(창 31장)과 유사하다. 특히 둘 다 가정의 수호신을훔쳐갔다는 점(창 31:19)어서 그러하다. 아무튼 미가는 추적길에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단 사람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 사람들이 어린아이들과 짐승들과 물품들로 인해(21절) 빨리 진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23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지고 왔느냐 - 여기서 '모아가지고'에 해당하는 원어는 '도움을 호소하다'라는 뜻의 동사 '자아크'(* )의 수동태로서 '함께 부름을 받다' 또는 '함께 모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지고 왔느냐'라는 단 사람들의 질문의 뜻은 '우리가 너희를 부르지도 않았고 너희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모여왔느냐'라는 뜻이다(Pulpit Commentary). 이것은 미가가 자신들의 뒤를 추격해 온 이유를 잘 알면서도 단 사람들이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있음을 보여 준다.
=====18:24
나의 지은 신들 - 이처럼 미가는 은으로 만든 신상과 에봇, 가정의 수호인이 드라빔(17:4, 5)들을 가리켜 스스럼없이 '나의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치 못한 영적 무지의 발로(發露)로 볼 수 있다. 7:2,3 주석 참조.
=====18:25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 여기서 '노한 자들'이란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금방이라도 공격해 올 것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삼하 17:8). 단 지파 사람들은 힘의 우위를 내세워 자신들이 미가의 소유물 뿐만 아니라 미가와 추격대 전원의 생명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18:26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 본래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이 단지자기 손으로 만든 신상을 소유하는 것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던 미가(17:13)였기때문에 이처럼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와 대적하면서까지 신상을 되찾을 생각을 하지못하였다. 사실 현세적인 복에 몰두했던 미가로서는 자신의 목숨에 대해 남다른 애착심을 가졌을 것이다.
=====18:27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 본서 기자는 라이스 거주민들에 대해서 거듭 이와같은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7절 주석 참조. 아마도 이것은 본서 기자가 그러한 라이스 거민들을 습격한 단 지파의 잔인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인 듯해 보인다(Hervey). 한편 '...을 만나'에 해당되는 '보 알'(* )은 어떤 사람을 갑자기 덮치는 것을 가리킨다(창 34:25).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때 수행하던 성전(聖戰)의 전형적인 표현이다(수 6:4;8:19;11:11). 단 지파는 처음 라이스를 향하여 출발할 때부터 이 전쟁을 '성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바(10절)라이스를 정복할 때도 철저히 그러한 의식으로 수행한 듯하다. 한편 이에 대하여 수19:47에서는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서 기자는 여기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적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라이스 당은 본래 단 지파의 영토가 아니므로 그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정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본래 기업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약한 민족을공격하는 침략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 단 지파의 타락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18:28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다시 라이스의 지형적 여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이유는 라이스에 대한 단의 뜻 아니한 침략이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 '베드 르홉'(Beth-rehob)이란 지명의 뜻은 '르홉의 집'이다. 민 13:21과 삼하 10:6에 따르면 이 지명은 소바 왕 하닷에셀의 아비 르홉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아셀 지파의 지경(地境)인 훌레(Huleh) 평지 윗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골짜기를 통하여 흐르는 물은 요단 강에 이르게 된다.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 여기서 '상종하다'에 해당하는 '다바르'는 '친밀히 교제하다'는 뜻 외에도 '사업상 교류하다'는 뜻이 있다. 이로 보아 라이스 거민들은 지형상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국가간의 외교적 친선 도모나 경제적 교류 따위를 꾀하지 못했던 것 같다.
=====18:29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 이곳 라이스는 가나안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7절주석 참조. 그래서 이곳을 단이라고 칭한 이후 부터는 이스라엘의 전영토의 경계를 말할 때에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란 말을 쓰게 되었다(20:1). 여기서 '브엘세바'는 팔레스틴 최남단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기업이다(수 15:28). 한편 이때부터 실제로 단 지파는 단 지역의 사람과 소라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로 분리되게 된 듯하다.11절 주석 참조. 아무튼 이후로 성경에선 이들 지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든데역대기에도 단 지파에 속한 인물에 대해서는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Cassel).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열 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7장).결국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이분(二分)되었던 단 지파는 영적인 이스라엘의 족보에서조차 사라진 셈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단지파의 거족적인 우상 숭배 탓으로 이해하고들 있다.
=====18:30
본절에서는 단이 라이스에 정착한 이후 독자적으로 행한 우상 숭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 - 여기서 '요나단'은 본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었으나 후에 단 지파의 제의를 받고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레위 소년'(14-20절)이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없다(Wycliffe, Keil & Delitzsch). 그런데 그 외에는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본문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므낫세'로 읽도록 모세(* )라는 히브리어 문자 사이에 작은 문자 '눈'(* )을 삽입하여 므나쉐(* )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본절을 '므낫세의 손자'(theson of Manasseh)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탈무드나 70인역(LXX), 수리아역 등을 볼때 이것은 분명히 '모세의 아들'(the son of Moses)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Keil). 한편 히브리어 성경 필경사들이 이와 같이 '모세'를 '므낫세'로 읽도록'눈'(* )을 첨가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1) 모세의 이름을신성시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란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명기함으로써 불경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Wycliffe). (2) 단 지파를 우상 숭배죄로 몰고 간 요나단을 모세와 같은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 본절의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간에는 상당한 이견(異見)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유수나 디글랏 빌레셀에 의한 앗수르 포로 유수로 생각한다(왕하 15:29;17:6;25:8). 그러나 유대인 학자데이빗 킴치(David Kimchi)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엘리 시대 때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해 갈 때(삼상 4:17)로 생각한다(Keil, Hervey, Lange). 그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일리가 있다. (1) 31절에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라는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로의 회막은 여호수아 때에 세워진것으로(수 18:1) 사무엘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삼상 1, 3장;4:3) 사울 때에는 놉에(삼상 21장), 그리고 다윗 때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상 16:39;21:29). (2) 미가의 새긴우상이 앗수르의 침략 때까지 계속 해서 그곳에 있었다면 분열 왕국 시대에 여로보암이 그곳에 다시 금송아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이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미가의 전통을 따라 행한 것이다(Keil). 17:3 주석 참조.(3) 이스라엘의 기강이 바로 잡힌 사무엘, 다윗, 솔로몬 시대에까지 한 지파 전체가그러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도록 용납되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사로잡힌 날'이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해 법궤가 빼앗기고 이스라엘이 내외적으로 연약해졌을 때를 가리킴에 분명하다.
=====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 이러한 본절의 기록은 본서가 사무엘 시대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Goslinga). 왜냐하면 회막이 엘리 시대까지는 실로에있었으나 블레셋에 의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이후부터(삼상 4:21, 22) 실로에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사무엘에 의해 실로의 회막이 라마로 옮겨졌을 것이라 보고 있으나(삼상 7:17) 확실치는 않다(Hervey).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는 성막이 보관되어 있던 실로였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정한 절기 때에나 기타 개인적으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있을 때에 실로에 모였다(삼상 3:21). 이러한 관습은철저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으로서,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동일한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실로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심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단에 신상을 세우고 섬긴 것은 언약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수22:16).
4. 18장의 대강
전장(前章)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한 가정, 미가의 집에서 어떻게 우상 숭배가 행해졌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 본장에서는 블레셋 족속의 압제를 피해 북쪽으로 이주한 단 지파가 어떻게 미가 가정의 우상을 자기 지파의 우상으로 숭배하게 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가나안 정착 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된 기업을 차지하고 못히고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난 이래로(1:34) 적당한 정착지를 찾아 헤매던 단 지파는 소라와 에스다올에 일시 정착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적을 만나 끝내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또 다시 블레셋의 압제를 피해 북쪽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용맹있는 다섯 정탐꾼을 파송, 새로운 정착지를 찾도록 하는대 중도에 이들은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유숙케 된다(1-6절). 그리고 계속해서 길을 떠나 평안한 땅 라이스를 발견하니 이로써 단 지파의 이동은 시작된다(7-10절).
그런데 이러한 단 지파의 이동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즉 본래의 이스라엘의 영토가 아닌 곳으로 이주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던 것이다. 그래서 단지파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같이 이주의 정당성을 백성들에게 주입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단 지파의 이주를 주최하는 주역들은 백성들에게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재현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라이스 땅을 자신들의 손에 붙이셨다고 강조한다(10절).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좀 더 가시화(可視化)하기 위하여 일전에 미가의 집에서 보았던 우상과 드라빔을 탈취,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상징하는 증표인 양 백성들에게 제시한다. 또한 미가의 거센 항의를 받지만 강력한 힘으로 항의를 묵살해 버린다(21-26절).
이상은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둘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다가 더디 내려옴을 보고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출 32:1)고 할 때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아무튼 과거의 이러한 선례로 인하여 단 지파가 미가의 우상을 백성들 앞에 세우자 무리들은 그대로 믿고 가나안을 정복한 것처럼 성공적으로 라이스를 정복한다. 그리고 그 땅을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단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 미가의 우상과 제사장을 세운다(27-31절).
한편 이러한 단 지파의 이주 사건에 대한 평가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단 지파의 흔적은 사라지고 역대기의 족보(대상 2장)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성경은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일시적으로 백성들을 오도하여 역사를 바꾸어 보려는 악한 자들의 음모가 일견 성공한 듯이 보이지만 역사는 그에 대하여 어떠한 평가도 가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악함과 무익함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계시록 7장의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자들인 십 사만 사천의 명단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가운데 유독 단 지파만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과 우상 숭배 죄등으로 인하여 영적 족보에서 제외되었음이 분명하다.
1. 거할 기업을 찾는 단 지파(18:1-10)
새로운 이주지를 찾던 단 지파가 북쪽으로 용맹한 다섯 정탐꾼을 파견하여 라이스는 지역을 정탐하고 오는 장면이다. 먼저 다섯 정탐꾼은 새로운 기업을 찾아 각지를 여행하던 중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짐에 이르러 레위 소년을 조우(遭遇)하낟(1-4절). 그리하여 그에게서 자신들의 여행이 형통할 것이라는 희망적 말을 듣고서는 다시금 길을 떠난다(5, 6절). 그 결과 그들은 라이스 땅을 발견하고 백성들에게 돌아와서는 만족스런 보고를 올린다(7-10절).
그런데 본서 기자는 단 지파의 이주 사건을 기술하면서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1절)라는 시대적 배경을 주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단 지파의 이주 동기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옳지 않은 파행적인 것으로 미가의 타락과 동일선상에 두고 있음을 나타낸다(17:6). 사실 그들은 일찍이 하나님께로부터 자신들의 기업을 할당 받았었다(수 19:40-46). 따라서 그들은 설사 각종 악조건과 외부로부터의 강력한 도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기업을 수호하여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대적들에게 기업을 내주고 쫓겨더니기에 급급했으니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즉 그들의 행위는 인본적인 패배 주의의 소산일 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불신앙적 행위였다. 따라서 그러한 그들이 뒤에 가서 우상 숭배에 빠지는 우매하고 참담한 죄악을 범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30, 31절).
이상에서 우리는 한 가지 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즉 성도 각자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한 신앙적 과업이 있기 마련인데 현실적 고충이 있다 하여 그것을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참다운 신앙은 역경 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때에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은가 !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필요성과 부정성(不正性) - 본서에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라는 표현이 계속적으로 나온다(1절 ; 17:6 ; 19:1 ; 21:25). 이는 곧 사사 시대를 끝으로 이스라엘에 수립될 왕정 제도를 예고해 주는 말인 동시에 그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암시하는 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 백성을 다스리시는 소위 신정국(神政國)이다<욥 1장 강해, 신정론 이해>.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서 기자가 계속해서 왕정 제도를 암시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 이제 이와 관련,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필요성과 아울러 부정적 측면을 살펴보자.
(1) 왕정 제도의 필요성 : 본서 기자가 암시하고 있는 왕정 제도의 필요성은 크게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 각 개인의 도덕적 타락과 우상숭배에 대한 외인적 제제 조치로서의 필요성(17장). 둘째, 단 지파와 같이 한 지파 전체가 종교적으로 와해(瓦解)되는 것을 막는 장치로서의 필요성(18장). 세째, 성직자들의 타락을 경계할 장치로서의 필요성(19장) 등이다.
즉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따른 급격한 인구 증가와 사유 재사의 증식 등은 여러 부파적적인 문제들을 발생시켰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가나안 종교의 혼합으로 인한 종교적 타락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하에 백성을 다스리고 그 스스로 본을 보일 강력한 통치자가 요청되었는바 이에 하나님께서는 왕정(王政)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허락하셨다(삼상 8:4-9).
(2) 부정적 측면 : 이상과 같이 이스라엘 왕정 제도는 백성들의 타락을 외견적으로 견제하는 장치라는 어느 정도의 긍정적 측면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필요성과는 달리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부정적 측면이 내포되어 있었다.
첫째, 비록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는 전민족을 통솔하는 인간 지도자는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지도자가 되시며 율법
으로 그 통치법을 대신하여 주셨다. 그런데 왕정 제도는 이스라엘의 궁극적 통치자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곧 통치법이라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언약 벡성인 이스라엘이 응당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이방나라들과 같이 당면 문제를 왕정 제도로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심각한 세속화로 몰아넣을 위험도 있다는 것이다. 본서 기자가 시대적 요청을 반영하여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하긴 했으나 구체적으로 왕정 제도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 까닭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아와 관련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욥 1장 강해, '신정론 이해'를 참조하라.
2. 단 지파의 이주와 우상 숭배(18:11-31)
라이스 땅의 정탐을 마친 단 지파가 옛주거지인 소라와 에스다올 땅을 출발하여 신개척지로 향하는 도중에 미가의 우상과 제사장을 취하는 장면이다(11-26절). 그리고 뒤이어 라이스를 정복하고 정착을 시작하는 장면이다.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좀더 구체
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고찰해보면 곧 다음과 같다.
(1) 먼저 본서에는 단 지파가 무력으로 미가의 우상을 탈취하고(11-17절)미가의 제사장을 회유(懷柔), 자기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18-20절). 추정컨대 이는 단 지파가 백성들에게 라이스 땅으로의 이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한듯 하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하여 이후 단 지파는 허어날 수 없는 우상 숭배에 빠진다(30, 32절). 그리고 훗날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도 단 지파의 땅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는 결과를 낳게 한다(왕상 12:29). 이는 곧 우리에게 불의한 동기는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준다.
(2) 다음으로 미가의 제사장이었던 레위 소년에게 초점을 맞춰 보자. 그는 본래 무 자격자로서 사명감 없이 생계의 필요성에 의해서 미가의 제사장이 되었었다(17:7-13).
그런데 본문에는 그가 단 지파 사람들이 제시한 보다 좋은 조건에 미혹되어 본래 주인과의 계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주인의 우상과 종교 기물을 훔쳐내는 일에 동참하는 장면이 나온다(18-20절). 이리하여 미가의 가정을 타락시켰던 이 제사장은 이제 단 지파 전체를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는 곧 철저한 소명 의식을 지니지 못한 성직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아니한 직업적 사이비 성직자 등은 결국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까지 타락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는 교훈을 준다. 즉 교회의 성직자가 자칫 천박한 직업 의식에 빠져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순간적인 이익과 명예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삯꾼 목자와 같이 되기가 일수인 것이다. 따라서 성직자는 항상 외적인 조건 보다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랑에 의해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요 10:11-15).
(3) 일찍이 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는 성전(聖戰)의 구호를 외침으로써 라이스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본문은 라이스를 정복하는 과정에 있어서 또한 라이스를 정복한 이후에 있어서 그들의 삶이 결코 드러한 구호에 걸맞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라이스 정복을 앞두고서 미가의 우상을 탈취한 데 대하여 미가로부터 항의를 받자 이에 대하여 정중하 사과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는 커녕도리어 완력으로 미가를 윽박잘러 버린다(21-26절). 그리고 라이스에 정착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그를 경외하는 대신 오히려 미가에게서 탈취한 우상을 숭배한다(27-31절). 이는 곧 우라들에게 성도의 삶을 항상 형식적인 구호보다는 먼저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함을 교훈해 준다. 즉 오늘날의 성도들도 단 지파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구호를 삶의 모토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어에 걸맞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삶이 없을 때 그러한 표어는 한갖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어떤 구호를 만드는 데 정신을 쏟기 보다는 자신을 살펴서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의식주의(Ritualism)의 허상 - 본문에는 전장에 이어 계속해서 미가의 우상과 관계된 이야기가 나온다(14-26, 30, 31절). 이를 통해서 우리는 타락한 사회의 종교는 대개 형식이나 의식에 지나치게 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가는 외형적인 종교의 모양을 갖추고 의식(儀式)을 수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지닌 자였다(17:13). 이것은 사람들이 주로 내적이며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외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물론 기독교의 발전도 이러한 의식주의(Ritualism)에 적지 않게 영향 받았음은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 일례로 19세기 중엽에 중세 시대의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긍전적인 관심이 고조되면서 옥스포드 대학에서 제기되었던 의식주의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때 전례와 의식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는바 혹자는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관습을 그대로 빌려 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실제로 많은 교회에선 성만찬 예복, 분향의 도입, 봉사자들로 소년들과 성인 남자들을 임용(任用)하는 등 로마 카톨릭의 예삭을 본따기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이렇게 의식주의에 의존하려는 교회는 다음과 같은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화려함, 정교한 음악 등은 근 자체로 우상 숭배의 경향을 띨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종교가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추는 것은 유익하며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은 자칫 내면적인 신앙심을 앙양(昻揚)시키기 보다는 외적인 것에서 마음의 평안을 추구토록 하므로서 종교의 종속물인 예배의 의식이나 형식을 우상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아마 초대 교회가 예배 의식을 단순화시켰던 것은 우상 숭배로 물든 주변의 감각적인 물질주의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 형식에 치우친 교회는 어떤 딱딱한 교리를 만들게 되고 그렇게 되므로서 교회를 경직되고 편협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의 교리화 작업은 타 종교나 이단 사상을 대적하고 성도의 신앙을 더욱 곤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번 제정된 교리가 교회의 절대 진리가 되고 그것이 의식화되면 신앙의 생동력을 상실케 하여 영원한 진리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어떤 조직적인 교리를 통해 성도를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학이나 신조 따위를 참된 진리보다 중시하는 풍조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3) 의식을 중시하는 교회는 의식을 수행하는 사람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우상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러한 잘못은 성도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케 하지 아니하고 지나치게 그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을 의존케 함으로써 참된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우상화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 말씀의 사역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마땅히 그들을 배로 존경할 자로 여겨야 하겠지만(딤전 5:17)결코 그들을 자신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로 우상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절대자는 하나님이시며(출 20:3) 성령께서 항상 우리 가운데 내주해 계시사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고 계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행 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