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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골로새서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골2:20)

1. 성경 (골 2:16~23)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6)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7)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8)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19)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0)(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1)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2)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2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6. 먹고 마시는 것~~~~인하여" ;  어떤 사람들은 τ∂ μёροs(토 메로스)가 참여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바울이 분리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골로새교인들은 매 절기를 다 지키지도 않았고, 엄밀히 말해서 율법의 명령한 바 거룩한 날들까지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빈약하다.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여러 날들 중에서 한 날을 구별, 즉 분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다른 날들 중에서 특정한 날들을 분리시켜 종교적인 찬송을 드리는 날로 구분하기를 좋아했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구분은 철폐되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도 몇몇 특별한 날들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 날들이 거룩한 날로 성별되어졌고 또 그날에 일하는 것이 합당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날을 위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통치와 질서를 위해 지킨다고 나는 답한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곧이어 말하고 있다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  바울은 앞에서 할례에 관해 말했던 것을 이제는 먹는 것과 날에 대한 구별로 확대시킨다. 할례는 율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으므로 다른 것들도 따라야 했다. '펌론한다'는 말은 여기서 우리가 죄책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주저하도록 만들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폐지하신 의식들을 우리에게 종속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자기들이 고안해 낸 율법으로 우리를 방황하게 할 수 있음을 부인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와 온 인류를 넌지시 대조시켜서 아무도 그가 주신 것들에서부터 무례히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준다.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 바울은 그날들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그 의미를 나타내 보여주시지 않은 시기의 그림자들이었다는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날들을 지키는 일로부터 자유하도록 한다. 바울은 그림자와 계시, 그리고 없는 것과 나타난 것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림자들을 계속 고집하는 자들은 마치 사람을 직접 자기 눈앞에 바라보면서도 그 사람의 그림자로 그의 모습을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 앞에 직접 임재하여 계심을 기뻐하고 있다. 바울은 몸이 그리스도의 것,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라고 말한다. 한때 그림자이었던 의식들의 실체가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그림자들이 가리키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 포함시키셨다. 그러므로 돌이켜 의식들을 행하도록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매장시키든가 아니면 그의 권능을 탈취하여 그를 공허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그것들은 유한한 것임을 깨닫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생각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판단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너희를 펌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을 때 거짓 '사도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고 골로새 교인들이 그릇된 멍에에 목을 매이지 않도록 막아주려고 말한 것이다. 야비한 혈육을 끊는 것 자체는 조금도 해롭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익하게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거기 매여 있는 것이 해로운 것 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들이 행하는 성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들도 역시 우리에게 감추인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가 아닌가 ?' 라고 묻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성례들은 옛날의 의식들과 크게 다르다고 답한다. 화가들이 처음부터 실물의 색깔을 그대로 사용하여 모양(imaginem)을 그려내지 않고, 즉 εkovers(에이코니코스)하지 않고 처음에는 목탄을 사용해서 대강 엷게 스케치하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도 율법 아래서는 처음 스케치하는 것과 같이 세련되지 않았으나 우리의 성례들 속에서는 참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그는 그림자의 텅빈 면과 몸의 견실함을 대조시켜서 사람들이 견실한 몸을 만져볼 수 있는데도 공허한 그림자를 붙드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훈계한다. 우리들의 성례가 시각적인 면과 장소적인 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이지만,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한때 제시되었던 바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 성례는 지금도 우리들이 체험하도록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례는 텅빈 그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임재 하심을 상징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례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차례 보여주셨던 그의 모든 약속들의 예와 아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18. 누구든지~~~~.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바울은 정당한 싸움을 시작한 후에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상을 받는 경주자 혹은 씨름하는 자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골로새 교인들을 정로에서 벗어나게 해서 오직 그들의 상을 탈취할 뿐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교인들은 가장 해로운 염병과도 같이 그들을 멀리했어야 했다. 또 이 귀절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단순성을 도말하도록 하는 자들은 모두가 우리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속여서 빼앗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일부러 겸손함" ;  이 말 다음에는 어떤 말이 보충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 귀절에 그것을 하기 위해서라는 귀절을 삽입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경계해야 할 위험의 종류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숭배의 상을 빼앗으려 하는 자들은 모두가 겸손을 가장하고 너희에게 천사를 명하는 자들이다. 이는 그들이 너희로 하여금 유일한 대상을 떠나게 함으로써 길을 떠나 방황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겸손함과 천사숭배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후자는 전자에게서부터 온다. 오늘날 교황주의자들이 성자 숭배를 철학화할 때도 이와 똑같은 구실이 붙여지고 있다. 그들은 사람은 미천해졌기 때문에 우리들을 도와 줄 중보자들을 구하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신 것은, 우리가 비록 비참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직접 자기에게 우리를 맡기도록 하게 하시기 위한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천사 숭배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천사가 사람을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귀는 항상 이 명목아래서 자기의 엉터리 치료법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황은 순수한 하나님 경배에 모든 쓸모 없는 것을 뒤섞어서 계시들이라고 뽐내고 있다.  이것은 직접 천사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모든 미신들을 고안해 냈던 오래 전 시대의 마술단(Theurgians; 4)의 사상과 같은 사상이다. 이러한 주석가들은 생각하기를 바울은 여기서 천사의 ,권위 아래 거짓되이 세워진 모든 거짓된 경배를 정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 는 바울은 천사를 숭배하고자 하는 생각을 정죄하고 있다고 본다. 바울이 편지 첫 머리에서 천사들을 그들에게 마땅한 지위를 밝혀 조심스럽게 말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빛을 흐리게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요컨대 바울은 제1장에서 의식들을 폐지하도록 길을 예비해 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게 하는 다른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 하는 길도 예비해 주었다.

 

미신적인 사람들은 천사 숭배에서부터 시작하고,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플라톤 주의자들의 이러한 잘못은 심지어 그리스도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제 10권에서 그들을 예리하게 공격했고, 천사 숭배에 대한 그들의 모든 논쟁을 강렬하게 정죄했음에도 이러한 사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저작 신학을 비교해 본 자라면 천사숭배에 대한 로마 교회의 과 교황주의자들의 어린애같은 소리는 모두가 플라톤에게서부터 나온 것임을 발견할 수가 있을 말하는 요지는 우리가 '그들의 상서로운 중재를 위해서'  천사들(플라톤은 마귀들이라고 불렀다)에게만 경배해야 한다 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말을 에피노미스(Epinomis)에서 말했고, 크라티루스(Cratylus)에서  확증하였으며 다른 많은 곳에서도 말했다. 교황주의자들은 이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자이심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한 자들도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천사들의 도움을 얻어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어떠한 경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리에다 천사들을 앉히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직분을 위임했다. 그러므로 우리 바울이 여기서 천사들이나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 다음가는 제2의 중보자들이요,  혹은 그리스도 옆에 있는 자이지만 그들에게 드리는 모든 종류의 경배를 정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중에서 가장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른 것---그것이 천사이든 사람이든 간에---으로 바꾸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  바울이 여기서 분사로 사용한 '엠바튜에인'이란 동사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을 제롬(Jerome)을 좇아서 거만하게 높아짐이라고 해석한 에라스무스(Erasmus)의 번역은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는 데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알지 못 하고 있는 것들을 경솔하게 말함에 있어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며 교만해 하는가를 날마다 보고 있다.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가 오늘날에도 있다는 현저한 실례가 있다. 소르본느 학파는 천사나 성도들의 중재에 관해서 하찮은 것을 신격화할 때에,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반사된 빛 안에 서 모든 것들을 보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고 바라보고 있다 는 주장을 하며 마치 그리스도 신화적인 예언자들(Delphic oracle; 6)과 같은 말을 한다. 도대체 무엇이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말인가? 무엇이 또 애매하고 의심스럽단 말인가! 자기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조금도 알 수가 없는 것을 두려움 없이, 그리고 무례하게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독단적인 자유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를 잘 파악하려면 용어의 뜻을 잘 알아야 한다. 헬라 사람들은 이 말을 단순히 나아가다 라는 의미로 보았으나 때로는 문의하다 라는 뜻으로도 사용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귀절을 해석한다면 바울은 애매한 것들과 우리의 마음을 초월한 것들과 감추인 것들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호기심을 꾸짖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신실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저가 보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도록 강요하여' 부데우스(Budaeus) 는 이 귀절을 저가 보지 못한 것들에 발을 딛게 하거나 소유케 하여 라고 번역한다. 나는 그가 훌륭한 말을 취했다고 보고 그의 번역을 따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나타내시기를 원치 않는 비밀에 참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용된 것 이상의 것을 더 요구하는 그들 경솔함을 꾸짖기 위한 것이 이 귀절의 목표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  바울은 인간의 지적인 통찰력을 육체의 마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바울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마16 :17)라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계시되어진 영적인 지혜와 대립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이해력을 의지하는 자와 전적으로 육체의 예리한 통찰력을 따라 행하는  자를 가리켜 "헛되이 과장하는 자"라고 말한다. 진실로 사람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지식들은 단지 '바람'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이 없는 곳에는 견실함이 없다. 과장된 자들이라고 말 한 자들은 겸손이란 가면을 쓰고 기어드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사람의 영혼은 겉으로 드러나게 교만해질 때보다 거짓된 겸손으로 위장할 때  (어거스틴 이 폴리누스에게 세련되게 기록했듯이) 더욱 믿어지지 않는 과장된 행위가 있는 것이다.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한 마디로 정죄해 버린다. 또 그는 만물은 그리스도에게 서 나오고 또 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근거에서 자기의 말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이키려고 한다면 그는 다른 관점에서 볼 때, 하늘과 땅의 충만한 자일는지 몰라도 공허하고 바람과 같은 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와 작별을 고하도록 하자.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자, 즉 것으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거나 부인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직분과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 다른 도움과 방편 (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을 찾는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지 않는 자들이다.

 

"온 몸이 ~~~~~마디와 힘줄로~~~~~~" ; 바울은 단순히 교회가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을 때임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안전하게 거할 수 있다. 실제로 몸은 신경계와 힘줄과 마디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오직 머리에서부터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이것들을 서로 묶어 전체가 되게 하는 것은 머리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 각 지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 공급해 주는 그 머리가 아무런 방해 없이 모든 지체들 위에 뛰어날 때에만 몸의 구조가 올바른 상태로 된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느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성장이란 모든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성장만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교황의 나라가 키는 크고 거대하기는 하지만 단지 거대한 몸집으로 부풀어 오른 것뿐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요구하는 것을 로마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나라는 장차 산산조각으로 무너지고야 말 곱추의 몸이요, 혼잡한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 너희가~~~~~죽었거든:~~~~~~" ; 바울은 앞에서 의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붙들려 매임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또다른 비유를 들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서 죽었다고-이것은 다른 곳에서 우리는 율법을 향하여 죽임을 당하고 율법도 또한 우리를 향해 죽임을 당했다고(갈219) 가르친 것과 같다. 죽음은 폐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카이 엠파티코테론'도 더욱 의미가 심장하다. 따라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의문과 더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그들이 의문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문에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의문은 더 이상 그들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들이 '거짓으로 떠 맡기려고 하는 의문에 결단코 매이지 말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21. 붙잡지도 말고 (먹지도 말고칼빈 사역) 맛보지도 말고 ~~~~~~~" ;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지금까지 만치지도 말라'고 번역해 왔다. 그러나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 곧 뒤따라 나오고 있으므로 이러한 되풀이는 얼마나 빗나 간 해석이며 터무니없는 해석인가 하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사 '하프테스다이'를 헬라 사람들은 내가 번역한 바와 같이 먹는 것 (다른 것들 가운데서)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프루타크는  시이저(Caesar) 편에서 시이저의 군인들이 먹을 것이 떨어져, 전에 본 일이 없는 짐승을 먹었다고 할 때 이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의 순서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볼 때나 문맥상 가장 일치하는 점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바울은 '미메티코스' 곧 모방의 방법을 통해서 마음을 자기들의 법에 매어두려는 자들의 고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순결하게 엄격성을 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금하기 시작할 때에 단순히 먹는 것만 금하지 않고 사소하게 관여하는 것까지도 금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던 바를 달성 한 후에는 처음에 말하던 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먹기를 원치 않는 것들을 부당하게 맛보라고 말한다. 마침내는 악하게 만들어서 만지게까지 한다. 요컨대 사람들은 한 번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압제를 당하고 나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율법에다 새 율법을 날마다 첨가시켜 항상 새로운 규정이 생기게 하고 있다. 이 귀절은 교황주의자들에게 이러한 사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얼마나 밝은 거울인가!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적인 유전들은 미로와 같아서 양심을 더욱 혼미하게 만드는 함정이라고 훌륭하게 경고한다. 실로 유전은 이러한 방법으로 목을 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질식하게 만드는 올가미인 것이다

 

"22.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 바울은 자기가 말한 그 교훈을 두 가지 말로써 배척한다. 첫째로 그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더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외면적이고도 부패할 것들로 종교를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들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에서는 첫번째 이유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롬14 17) 고린도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고전6:13).  그리스도께서도 직접 말씀 하셨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 11). 요컨대 하나님을 경 배하는 것, 참된 :경건, 그리스도인의 거룩은 쓰는 대로 부패하고 썩어지고 마는 일시적인 것이요, 변하기 쉬운 마시는 것, 먹는 것, 입는 것에 있 지 아니한다.

 

쓰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들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부패된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양심의 가책을 조장하는 교의에는 가치가 없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부패하기 쉬운 사소한 의문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다른 것들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두번째 반대하는 이유로 그것들은 사람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에게 근거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바울은 이러한 호령을 말하여 모든 사람들의 유전들을 넘어뜨리고 뒤집어 엎는다. 무슨 이유에서 인가? .바울의 이유는 이렇다. 양심을 굴레 속에 몰아넣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해롭게 하여 죽음을 피하려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나온 것들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결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23. 이런 것들은~~~~지혜 있는 모양이나" ;  이것은 하나의 예상이다. 바울은 그것들이 자기가 굳게 주장하는 바와 반대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것들을 전혀 무가치한 것들로 알았다. 바울은 그것들이 지혜있는 모양을 하기는 하지만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한다. 모양은 실체와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슷하게 속이는 외모 (그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모양이 가지고 있는 색깔이 무엇인지를 바울의 말을 따라서 생각해 보자. 바울은 자의적 숭배, 겸손, 몸을 괴롭게 하는 것들의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미신 숭배를 헬라어로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말인 '에델로드레스케이아'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에델로드레스케이아'를 어원적인 의미, 즉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택해서 자의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들의 유전은 우리의 마음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해준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머리 속에서 유전의 첫 이상(idea)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변명이다. 둘째는 겸손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순종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당한 짐이라고 할지라도 거절하지 못한다. 이러한 종류의 대부분의 유전들은 검손을 훌륭하게 실천할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들을 좋아하는 세번째 이유는 그것들이 육체의 고난을 가장 장려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몸을 아끼는 일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구실들을 떠나라고 명하고 있다. 사람들 가운데서는 고귀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몹시 험오하는 것이 된다. 더우기 하나님의 권위를 인간의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은 반역적인 순종이요, 사악하고도 신성을 모독하는 겸손이다.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러한 겉치레로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볼 때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사람은 모양이라는 말 한 마디로 족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바울이 이것을 반대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논쟁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다. 몸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양을 취하는 사람은 단지 그들을 속이는 것 뿐이다. 둘째로 영적인 그리스도의 나라는 결코 변하거나 부패하지 않는 기본 원리를 가지고 있다. '세째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러한 의문들을 끝나게 해주셨으므로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들과 더불어 행동할 수가 없다. 네째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우리의 율법 수여자이시다. 다른 곳에서 율법을 받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허무한 모양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로, 바울은 이러한 허무한 것들에게 골로새 교인들이 속지 않도록 충분한 말로 훈계하고 있다. 그들을 꾸짖기 위해서 신경을 날카롭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해서 안되는 것은 모든 거룩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본 원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방법으로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인 것이다. 또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만 그의 말씀을 따라 겸손히 순종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의 명철이나 기타의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잠3 : 5)는 사실도 역시 기본 원리일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의 염손은 피차 사랑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제 육체의 방종을 먹는 것을 금해서 억제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자가 있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어떤 음식을 깨끗하지 않다고 해서 금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진지하고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아껴서 먹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먹고 마시는 데에만 도취되어 그것들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은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충분히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골로새 교인들은 거짓 구실들을 주의하여 막아내라고 경고를 받을 만하였다. 오늘날 교황주의자들은 그럴듯한 구실을 많이 붙여 '자기들의 율법들을 변호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경건하지 못하고 포학하거나 망령되고 경박한 것들이다. 설사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들 자체가 로마 교황주의자들의 모든 안개들을 쫓아내기에 충분하여 논쟁거리가 남아 있을 수 없다.  그것들은 이들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참된 모습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말해 준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의 기본적인 거룩은 금욕주의로 되어 있고, 이것이 그 본질이다. 나는 이것을 말하는 데 '수치와 비애를 느끼며 매우 고약한 악취가 나지 않을까 조심한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숭배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하기 쉬운 일이며, 얼마나 오래 전부터 되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도는 이 귀절에서 자기가 죽은 후로 100년이 지난 후에 들어오게 될 초대 금욕주의의 상태를 마치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신을 숭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매우 미친 짓이다. 이것은 역사가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관한 말을 떠벌이는 것으로는 억제될 수가 없다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  유익하다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이 사용하는 바에 의하면 조심한다는 의미이다. 과부를 경대하라(딤전5:3)는 말은 그들을 돌보라는 뜻이다. 이제 바울은 몸을 괴롭히는 교훈을 비난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을 부당함에 빠뜨리는 것을 금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몸에 필요한 만큼 공급해야 할 것도 명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3장 14절에서 몸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돌보는 행위를 정죄하지 않고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맹렬하게 정죄했다. 그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면 바울이 지적한 그 유전들 속에 있는 결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필요한 만큼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몸을 돌보는 것이다. 여기서 만족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그 육체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 된다. 그러므로 사치나 모든 쓸데없는 치장과는 반대가 된다. 육체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므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것보다도 더 못한 것으로 거룩과는 거리가 먼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