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골 1:1 ~ 23)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1)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4)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5)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6)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7)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8)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9)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0)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1)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2)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3)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4)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5)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6)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7)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8)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19)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0)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1)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2)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 된 바울" ; ..나는 이러한 방식의 명칭에 대해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해 왔다. 그렇지만 골로새 교인들은 바울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인 이름만 가지고서는 그들에게 충분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바울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쓸 때에 자기는 하나님의 신뢰하심을 받아 사신으로 보냄을 받은 이상 경솔하게 처신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사도직은 어느 한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확대되었다. '성도 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매우 고상한 것이었으나 바울은 그들을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기타 다른 문제들은 이미 다른 서신에서 그 해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 어떤 사람들은 이 말쏨을 '우리가 항상 계속적으로 너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한다. 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고 설 명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마다 기도한다. 는 해석이 가장 분명한 해석이다.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자들의 처지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완전할 수 없고 항상 부족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란 하루에도 수백번씩 실수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를 만족히 여기고 이것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더욱 증가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해석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아들 가운데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분 이외에 다른 분을 하나님으로 안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우리가 참 하나님께 이르기를 바랄 때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열쇠이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서만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그 안에서 아버지같은 긍휼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감사하노라" ; .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점점 더 민첩하고도 변함없이 참아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고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우정을 얻어 그들이 더욱 쉽고, 또 더욱 교훈적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은 항상 '축하' 대신에 '감사 란 말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말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그 기쁨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실례를 통해서 하나 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시는 것들을 감사하게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바울이 주님께 감사를 드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골 로새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들이 다 하나님 께서 주신 것으로 알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감사는 곁치레에 불 과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뗘나는 것이란 무엇이겠는 가? 우리에게 임하는 가장 사소한 긍홀도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를 탁월하게 하는 것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이러 한 두 가지 은사는 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얼마나 더 많이 깨닫도록 하여 주겠는가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사랑을 들음이요" ;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믿음과 사랑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을 향한 사랑과 또 구원을 위한 관심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특별한 은사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사들을 나타내 보여주는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는 항상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믿음의 진정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roprium fidei scopum).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란 말은 성도 이외의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았 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합된 사람들을 특별한 사랑으로 더욱 가깝게 사랑해야 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이란 온 인류에까지 확대되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의 혈육이요, 사랑을 갖는 그 정도에 따라 그들이 믿음의 자녀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 영생에 대한 소망은 우리들로 하여금 결코 무력해지지 않도록 하여 주고, 또한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는 데 실수함이 없도록 해준다. 자기를 위하여 생명의 보배를 하늘에 쌓아두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는 그곳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멸시하지 않으 면 안된다. 하늘 나라의 생명을 생각하면 우리는 황홀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소피스트들은 이 귀절이 행함의 공로를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구원에 대한 소망이 행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공연한 것이다. 이 말씀이 옳은 생활을 하도록 자극한다고 해서 행함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좌우한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할 수는 없다. 구원의 소망을 가져다 주는 데는 행함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게 하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자비보다 더 효과적인 요인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소망' 이란 말은 소망하는 것을 대신해서 환유법적으로 표현한 것 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소망은 우리가 바라는 하늘의 영광을 가리킨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라고 한 말 속에는 신자들은 영원한 행복에 대한 (약속을 확신하여야 하되 보물을 이미 안전한 곳에 쌓아둔 것과 같이 확신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 영원한 구원이란 우리의 이해력을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구원에 대한 확 신을 갖게 [된 것은 복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동시에 바울은 계속 해서 자신은 어떤 새로운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이 전에 받았던 교훈을 확고하게 하려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에라스묵스는 이 것을 진정한 복음의 말씀이라고 번역했다. 나도 역시 바울은 히브리어의 형 식을 따라서 형용사를 써야 할 곳에 소유격을 대신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말은 강조형의로 보아야 한 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그들이 받았던 계시를 더욱 확실하고 견곤히 붙잡도록 해주는 car' (카테크소켄 진리의 말씀)이라고 부름으로 : 써 복음에 영광을 돌리게 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 이란 말은 동격으로 사 용된 것이다.
"6. 이 복음이~~~~~~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유순함을 칭찬한 후 곧 바른 교훈을 말한다. 즉 한결 같음을 칭찬한 후에 끝까지 그 교훈을 붙잡으라고 한다. 복음에 대한 믿음을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이라고 부른 것은 자신과 하나님이 화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견고하게 붙잡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복음을 맛볼 수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 이 말은 '진실로 '꾸밈없이 라는 뜻이다. 바울은 앞에서 복음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말하고, 이제는 그 복음이 에바브라에 의해서 그들에게 신실하게 전해졌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 속에는 무식이나 자기의 욕망이나 탐심으로 인해서 복음의 순수성을 불순하게 만드는 악한 사역자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사역자들을 그렇지 못한 불의한 사역자들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만약 우리가 바울과 에바브라에 의해서 전파된 복음이 참된 복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복음 이란 명칭을 지키기에 합당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추천을 통해서 에바브라의 교훈을 확신시켜서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교훈에 머무르도록 함과 동시에 낯선 교훈들을 소개하려고 애쓰는 악당들에게서 돌이키도록 한다. 이어서 바울은 에바브라에게 특별한 지위를 줌으로 교인들 가운데서 더욱 권위를 갖도록 한다. 끝으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증거함으로 써 자기가 골로새 교인들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어느 곳 에서나 교회의 신실한 종으로 알고 있는 그들은 자신의 추천으로써 그들이 교회에서 매우 귀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수고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사단의 사역자들은 사악한 말을 함으로써 신실한 목회자들의 순수한 마음을 전적으로 이간시키려고 열중하고 있다.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복음의 효과는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 있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모으게 한다는 사실을 경건한 자들이 바라보게 되면 그들은 이것을 통해서 확신과 위로를 받게 된다. 그 러나 실제로 신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복음이 성취될 것을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온 세상과 하늘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거룩한 자들의 마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마음 의 기반이 되어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진리가 그 속에 남아 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면 그리스도를 이기고자 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고 강해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방해를 받지 않게 된다. DH [흐름자] 토프를 드록 (디흐비 : 10음본 또한 우리는 신자들의 많은 무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동에서부터 서에까지 미치리라고 하신 많은 예언의 성취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나라 가 이 세상 모든 나라들 위에 미칠 것이라고 오래 전에 예언된 말씀들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성취된 것을 보는 것이 어찌 우리의 믿음에 아무런 도 움도 주지 못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말한 것을 자기가 직접 경험 해 보지 않은 신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더욱 용기를 북돋아주고 복음의 열매와 그 진전 과정이 어느 곳 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더욱 강한 열 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 내가 '퍼지다 (증가되다)라고 번역한 Abeavou(아우크사노메논)은 어 떤 사본에는 없다. 그렇지만 이 말은 문맥을 볼 때 잘 어울리는 말이므로 나 는 이 말을 생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대의 주석가도 항상 이 말씀이 있 는 것으로 보아온 것 같다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 이 말의 뜻은 크리소스톰이 말한 바와 같이 '영적인 사랑 이라고 본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 이라는 표현에는 동 의할 수가 없다. 영적인 사랑이란 세상에 그 관심이 있지 않고 경건한 생활에 집중하고 있으며, 육적인 우정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에 의존하고 있지 만 영적인 사랑이란 내적인 것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9. 이로써 우리도" ; 바울은 앞에서 자신의 감사 속에서 골로새 교인들 속에서 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준 것처럼 이제는 자기 기도의 간절함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면 사람에게 더욱 현저하게 임할수록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특별히 사랑하고 보살펴서 그들의 축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구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더욱 충분하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바울은 아직도 골 로새 교인들에게는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여서 그들을 가르치기 위한 길을 예비하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충분한 교훈의 진술에 커를 기울이 도록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들이 모든 값진 것들을 얻었다고 생 각하는 자들은 또다른 어떤 유익한 것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서 이러한 사상을 제거하여 그들이 기꺼이 나아가 장애물이 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이 시작한 바를 마칠 수 있도록 야 할 길에 해준다. 그러면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부슨 지식을 구했는가? 바울은 "하 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인간적인 생각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모든 헛된 생각들을 배격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신령한 지혜~~~~~" ; 이 말은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뜻이 올바른 지식의 유일한 척도가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낸선 것 중에서 그분이 기 머하시는 것만을 단순히 알기를 바라는 자는 무엇이 진실로 총명하게 되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우리는 단지 우매하게 될 뿐이요, 합당한 범주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될 것이 다. 우리가 총명이라고 번역한 ouvedeos(쉬네세오스)란 말은 이해력에서 나 오는 분별력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지혜와 총명을 바울이 불 다 영적인 것이라고 부른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다른 방도를 통해서 얻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 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 라"(고전2 14).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 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지식을 추구하고 있는 한 단지 허무해질 뿐이 요, 자기 도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의 신학 가운데에 는 철학자들의 책에 들어 있는 것과 세속적인 사람들이 고안해 낸 지식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바울이 명한 지혜만을 마 음에 품어 하나님의 뜻과 비교하도록 하자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 첫째로 바울은 신령한 지혜의 목표가 무엇인 지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학교에 서 정진해 나가야 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는 것은 우 리 생활에서 헛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표를 향해 자기의 노력 을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큰 수고와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실제 적으로 조금도 진보함이 없이 끝없는 주변만을 배회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도록 주의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생각을 포기 하고 우리의 육적인 모든 기질과도 작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또 이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만족으로 (obsequium), 그 들이 흔히 하는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기쁘게 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므 - 문제가 생긴 요컨대 모든 한 복종을 하 로 만일 어뗘한 종류의 생활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인가 하는 다면 우리는 항상 바울이 정의한 대로, 사람의 뜻에 맞는 것, 육체적인 것으로 기우는 것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여기에서부 터 선한 행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들이 따라 나오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 바울은 또다시 반복해서 골로새 교인 들이 더욱 자라야 할 필요가 있는 한 아직 다 이루지 못했다고 말합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훈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하고, 또 한편으 로 장성하기 위해서는 더욱 열심으로 자기 자신들이 듣고 교훈을 받을 준 비가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여기 골로새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 은 모든 신자들이 자기 자신에게 하신 말씀으로 알아 이 말씀 속에서 일 반적인 권면을 찾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갖게 되는 일 반적인 교훈은 죽을 때까지 거룩함의 교훈에서 항상 자라가야 한다는 것 이다
"11. 그~~~~~~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 다윗은 앞에서 골로새 교인 들이 건전한 지혜를 가질 것과 또 그 정당한 사용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같 이 이제는 그들이 용기를 얻어 변치 않을 것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 방법으 로 바울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자기들의 연약함을 깨닫도록 해준다. 바울은 그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강하여질 것을 말한다. 뿐만 아 니라 이 은혜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 "그 영광의 힘을 좇아"라고 말한다. 이 것은 자기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해서는 도저히 설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끝으로 바울은 '신자들의 힘 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 이어야 할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십자가를 계속해서 져야 하며 하루에도 수천 번 시험을 당하여, 이것들에 짓눌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허무한 것으로 여기도록 강 요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놀라운 인내로 자신을 무 장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 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 : 15)이라고 하신 말씀 을 성취해야 한다.
"기쁨으로~~~~" ; 이 말씀은 이 문맥에 잘 어울린다. 다른 번역이 라틴어 역 본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번역은 헬라어 사본들과 더욱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인내는 오직 기쁨으로만 유지된다. 자신의 몫을 기쁘게 여기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확고하고 용감한 마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12. 우리로 하여금~~~~~.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 바울이 계속해서 성부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말한 바와 같이) 그가 우리 구원의 시 작이요, 유효적 동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라는 이름 이 엄위하심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둣이 '아버지 라는 이름은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경외 심을 불러 일으키는 그의 엄위와 우리에게 확신을 가져다주는 그의 아버지 같으신 사랑을 모두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벌게이트 역이나 다른 어떤 매 우 고대의 헬라어 사본들의 경우에서 보는 대로 바울이 이 두 가지 것을 함 께 연결시킨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바울은 '아버지 란 말 한 마디로 만족했다는 말의 반대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 란 표현에서 그 의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생각해야 할 필요성에 못지않게 '하나님 이란 이 름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도 낮추셨다는 크신 축 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께 드린 감사는 무슨 자비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자 신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도록 하셨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노의 자식들로 태어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 겨났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심에서만 되어진다. 이제 하나님의 입양은 값없는 선택에 달려 있다. 중생의 영은 양 자가 된 표시이다. 바울은 '빛 가운데서 라고 덧붙임으로 사단의 나라의 어 두움과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골로새 교인들에 게 임한 축복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함과, 그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이르고자 또다시 감사를 드리고 있다. 왜 냐하면 거짓 사도들이 골로새 교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파놓은 모든 함 바를 완전하게 파악 정들에서 그들을 구해주는 것만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우리가 깨닫지 않고서 그 많은 교훈들을 어떻게 기억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만이 다른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만드신다. 그러므로 사단이 짙은 안개를 일으켜 그리스도를 가릴 수가 없다. 바울은 이 방법을 모든 종류의 거짓된 것들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순수한 교훈을 유지하게 할 뿐 아니라 회복 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축복과 함께 하 시둣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눈앞에 두고 그의 능력을 진실되게 깨닫는 것이 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이름에만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교황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우리들과 함께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들 과 그들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차이점들이 있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 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후에는 그의 능력을 다른 것으로 바꾸 어서 그 능력을 이리저리 홑어버리고 그 다음으로 그를 빈 껍질만 남게 하 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에게서 대부분의 영광을 탈취해 버리기 때문이다. 따 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우 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그런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만일 교황주의자들이 이 본문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 리는 모든 로마 교회의 교리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곧 일치하게 될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 제1 장의 중요한 줄거리만 생각해 본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 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중간이요, 또한 나중이 되신다는 것을 알 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그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해야 하고 다른 곳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바울이 우리에 게 그려준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서 주의깊게 그리고 조심해서 살펴보 도록 하자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 우리는 이 귀절에서 우리 구원의 시작, 즉 하나님께서 멸망의 깊은 곳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나 있지 않고 어두움이 있는 곳에 있다고, 즉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 에 나타나리니"(사60 2)라고 말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어두움이라 불리어졌고 그 다음으로 온 세상과 사단을 어두움의 권세잡은 자라고 부른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와질 때까지는 어두움의 압제 아래 붙잡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온 세상이 지혜롭고 의로운 것처럼 가장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다만 어두움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 밖에는 빛이 없기 때 문이다.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우리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 지는 때는 우리의 축복이 시작되는 때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력으로 그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와 사망의 종 노룻하던 자리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인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도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의 사랑의 아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의 영이 만족을 누리고(마17 5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또 그를 통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 다른 방도로는 하나님을 받아 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바울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반목이 중보자의 사랑이 비취지기까지는 제거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가 없다.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 바울은 이제 우리 구원의 모든 부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것과, 어떻게 그 분만이 빛을 비추고 모든 피조물들보다 월등하게 보여지며 만물의 처음과 나중이 되는가 하는 것을 열거한다. 첫째로, 바울은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고 말하고 곧이어 구속은 '죄사함 이라고 설명한다. 이 둘은 서로 동격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때는 우리를 영원한 사망의 정죄에서 면하게 해주심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의 자유요, 이것이 사망을 이긴 우리의 영광이다. 바울이 이 구속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세상의 모든 죄는 그의 죽으심을 회생물로 드림으로써 속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유일한 속전이라는 것과 고해성사에 대한 로마 교회의 모든 어리석은 교훈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함에 있어서 더 높이 올라간다.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다른 방도로는 보이지 아니하신다는 뜻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 : 18). 나는 왜 고대 작가들이 이러한 설명을 사용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아리우스파(Arians)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아들의 동등성, 즉 '호모우시안'을 강조했지만 아버지께서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모든 강조점을 '형상' 이란 말을 옹호하는 데에 두고 피조물은 조물주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논쟁을 벌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대단한 약점이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나"라고 했다(고전 11: 7).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교훈 이외에는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형상' 이란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말이 아니라 우리들과의 관계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호모우시아/ 형상' 란 말에서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이 아니시라면 하나님을 진실되게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피조물의 공유적 속성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 선, 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이것들은 피조물 안에서는 완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 속에서 아리우스파들을 대항할 수 있는 힘있는 무기를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내가 말한 것과 관련해서 말해야 하고 본질 그것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요컨대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본래적인 엄위는 육신적인 눈으로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사고력을 통해서는 볼 수가 없고, 다만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우리는 마치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그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의와 인자, 지혜, 능력, 요컨대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모습은 우상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 이 이름을 사용한 이유가 곧 뒤이어 나온다. '이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바울은 18절에서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처음 난 자라고 한 것은 그가 시간상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앞서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아버지에게서 독생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으며 그가 만물의 본체 혹은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귀절을 기초로 하여 결국에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들의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귀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스스로 계시는 분이 라는 것이 아니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완성케 하시는 분이라는 내용이다.
"16. 만물이~~~~~~~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 이 두 종류는 다 앞에서 하늘과 땅에서라고 한 구분 속에 포함된다. 그러나 바울은 특별히 천사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으므로 이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언급한다. 우리에게 보이는 하늘의 피조물들 뿐만 아니라 영적인 피조물들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곧이어 나오는 "보좌들이나............. 말씀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보좌들을 천사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처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마음으로 파악할 수가 없는 하나님 자신에 속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해와 달, 그리고 하늘과 모든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우리의 지각으로 감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요, 하늘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보좌들이라는 말을 모든 변화무상한 것들에서 해방된 영원한 축복된 자리라고 생각 하도록 하자 바울은 그 외의 말들을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바 울이 천사들을 주관들, 정사들, 권세들이라고 부른 것은 천사들이 자기들 의 어면 영역을 갖고 있거나 권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 라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나라의 수종드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한, 피 조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꾸어진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은 유일하신 주 요 아버지(Fathers)이시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영광으로 지위를 높여주셨기 때문에 아버지(fathers)나 주(lords)라고 불리어진다. 또 이 귀절 에서 천사들을 가리켜 능력이 있는 칭호를 사용해서 말한 것은 그들을 자기 들 스스로, 즉 하나님을 뗘나서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 서 그들과 함께 하사 그들에게 기름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다. 우리는 이것들을 하나님의 독특하신 영광을 조금도 손상시킬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천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자신을 배우도록 하시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역사하사 자 신의 능력을 그들에게 양도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그들 안 에서 나타남으로써 자신이 가리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바울이 의도적 으로 천사들의 존엄성을 장중하게 말한 것은 그리스도만이 그들보다 훨씬 능가한다는 생각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 로 바울은 이 이름들을 양보의 방법으로 사용해서 그들의 얻은 명칭이 아무 리 고상하다 할지라도, 또한 그들이 아무리 탁월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조금도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름들을 철학적으로 생각 하여 천사들의 계급을 고안하여 스스로 만족해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바울 의 마음에서부터 멀리 멸어져 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바울은 천사들을 그리 스도에게 예속시켜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우지 못하게 한다. 여 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천사들은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요, 둘째, 그들이 지음받은 합당한 목적은 그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 요, 세째, 그만이 그들이 지음을 받기 이전에 항상 존재하고 계셨기 때문이 요, 네째,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붙드사 그들의 신분을 지키도록 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천사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세상에 관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가장 높 은 영광의 자리에 올려 그는 사람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주관하시는 분이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명령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 바울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모든 피조물들을 주관하시는 그의 주권적인 통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한 후 특별히 교회와 관련된 것으로 돌이킨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 라는 말 속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이 비유를 마치 머리가 모든 지체들에게 생명적인 힘을 넣어주는 근원인 것처럼 교회 생활은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 나중에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귀절에서는 통치의 머리가 되심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 가지신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요, 신자들은 오직 그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지체들의 연합은 오직 그에게만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잔악한 그들의 폭군을 지지하고자 할 때 교황은 머리이기 때문에 교회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것처럼 교회는 '아케팔론'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영광을 천사들에게 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울은 교회의 머리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이러한 이름들을 요구하기 위하여 신실하게 그 직분을 행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구차스러운 변명으로 교황이 행정상 머리가 된다는 말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머리라는 이름은 너무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핑계를 구실삼아서 그리스도의 명령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옮겨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레고리는 보다 조심스럽게 그의 92번째 서신 제4권에서 베드로가 참으로 교회의 으뜸가는 지체이었지만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한 머리 아래 있는 지체들이었다고 했다.
"그가 근본이요" ; 헬라어 '아케' 는 때때로 만물이 맞게 될 종말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아케' 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는 시작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기 때문이다. 부활에는 모든 것들의 회복이 있다. 부활은 제 2의 시작이요, 새 창조이다. 그것은 먼저 것은 처음 사람의 멸망 속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셨기 때문에 시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는 말이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새로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때인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말한 것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회복시켜 주고 계시므로 그가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난 자들의 첫 열매라는 부름을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고전15 20)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 바울은 이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만물을 자기에게 속하도록 하는 최고의 권세를 가지셨다는 결론을 내린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지으신 자요, 또 회복시키시는 자라면 이러한 영광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마땅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만물의' 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하나는 '모든 피조물들보다' 라는 의미요, 다른 한 가지는 '모든 일에 있어서' 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못된다. 이 말씀의 본래적인 뜻은 만물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속해 있다는 데 있다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자기의 피조물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자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기서 그 피를 "십자가의 피"라고 한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는 담보 물이요, 속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 제물이 되사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피"는 하나님의 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드려진 희생의 피를 의미 한다. "그로 말미암아"란 말을 추가한 것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것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우리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만이 화목케 하시는 자이시요, 그러므로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새겨주고 있다. 그리스도 밖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오직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는 것이다.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 만약 이 말씀을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만 국한시킨다면 이 말씀은 사람들과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외가 없이 '모든 만물들을 다 가리키고 있다' 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매우 교묘하게 철학화 할 생각은 없고 이 말씀은 천사들과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이해하고 싶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곤란한 점이 없다. 그러나 천사들의 경우에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불화나 반목이 없는 곳에도 화목이 필요한가?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천사들이 사람들과 동일하게 하나로 취급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피조물들이 땅에 있는 피조물들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회복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억지 해석인 것이다. 천사들과 사람들의 화목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야 할 이유를 사람들이 예전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요, 또 사람들은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멸망에 이르도록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를 달래기 위한 중보자의 은혜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화목케하는 자의 본성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불화를 없게하고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천사들간의 관계는 사람과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는 반역이나 죄가 없기 때문이요, 따라서 분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첫째는 그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았다면 타락의 가능성을 넘어서지 못한 피조물들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타락하거나 반역할 우려가 있는 한,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가 올바르게 유 지되어야 한다는 것은 적지않게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순종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완전하여 모든 면에서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욥기 4장 18절의 말씀은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천사)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라는 의미이다. 만약 이 말씀이 마귀에 대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성령은 말씀하시기를 가장 순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비추어 볼 때는 더렵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도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하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의를 갖지 못했으므로 그들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그들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들기 위해서 화목케 하는 자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은혜는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에게도 똑같이 존재한다고 말 한 것은 정당한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이 이 표현의 획일성을 구실 삼아 마귀들의 경우에도 '그리스도가 그들의 화목케 하는 자가 되사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 이 것은 악한 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씀이다'. 라고 답할 것이다. 악한 자들에게도 구속의 은총은 마련되어 있으므로 악한 자들과 마귀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말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떤 모양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만물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다는 것 뿐이다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 다른 방도로는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다고 하는 이 말씀은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크나 큰 찬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행복이란 하나님과 굳게 연합되는 것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면 다만 더욱 비참하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바울은 우리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으며 그가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로 묶어주실 때에 한정된다(vinculum nostrae cum Deo coniunctionis) 고 하고, 또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들이 그를 떠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내쫓김을 받아 가장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독특하신 방법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 이와 같은 찬송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한 바울의 말을 마음 속에 잘 간직하도록 하자. 이 반 정립 개념에는 이 찬송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해 있는 특권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돌려질 수 없다는 말이 보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천사들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중재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뻐하심이라." ;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끌어들인다. 진실로 우리가 이 신비에 대해서 경외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근본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모든 충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위에 부어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요한복음 5장 20절의 말씀과 같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동시에 우리들이 구원을 위하여 바라고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말미암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자신이나 은사들을 인간들에게 주지 않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므로 그를 뗘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말하려 한다. 그리스도를 손상시키거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축소시키거나, 그리스도의 직분을 그에게서부터 빼앗거나, 마침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부터 한 방울이라도 덜어내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연약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21. 전에~~~~멀리 떠나~~~~~"; .바울은 이제 일반적인 교훈을 특별히 골로새 교인들에게 적용시켜 만일 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 새로운 날조에 떨어졌다면 이는 대단히 큰 배은망덕의 죄를 범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까닭은 교훈의 특별한 적용은 더욱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기가 말한 구속의 은총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너회들 자신이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부어주셨다고 말한 그 은총의 모형이다. 너희가 '멀리 떠났다 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뗘났다는 말이요, '원수가' 되었던 너희는 이제 은총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 은총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노가 가라앉으사 하나님께서 너희와 화목케 되셨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라는 의미와 같다. 동시에 이 귀절에 인칭의 변화가 있는 것은 바울이 성부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말했던 것을 이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말씀을 '그의 육체의 몸으로 라고 설명해야 한다. '디아노이아스' 라는 말은 그 의미를 확대하기 위해서 사용된 말로서 그들 모두가 그리고 그들의 모든 생각들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멀리 뗘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철학적인 상상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를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추리해 낼 수가 없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 격리를 저급한 욕망에 국한시킨다. '실제적으로' 바울은 '너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싫어하도록 하는 것이 너회 모든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고 말한다. 요컨대 바울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져 있는 사람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과 원수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벌게이트역은 이 말을 '감각'이라고 번역했고, 에라스무스는 '마음'이라고 번역하였다. 나는 이 말을 프랑스 사람들이 '의향'이라고 부르는 의미와 같은 cogitationis라는 말로 사용한다. 이것은 헬라어의 지지도 받고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 주고 있다. 또 '원수들' 이라는 말은 능동적 의미 뿐만 아니라 수동적 의미도 갖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이 두 의미가 모두 우리에게 잘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육신의 모든 생각들은 하나님을 거스려 반목을 하기 때문이다
"악한 행실로~~~~~" ;.바울은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내적인 증오의 결과들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겉으로 인정을 받을 때까지 자기들에게서부터 모든 비난을 없애려고 애쓰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장 19절에서 더욱 자세하게 말씀하셨둣이 겉으로 나타나는 행실로 말미암아 그들의 경건치 못함을 보여주신다. 여기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그들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이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사 그들이 죄를 범하기에 앞서서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를 깨뜨리지 못하도록 막아주시는 사람과 일생 동안을 대부분 방황만 하다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에게 우리를 화목케 해주시는 분으로써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죄의 노예들이요, 또 죄가 있는 곳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기 때문이다.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 이 표현은 애매한 것같아 보이지만 '육체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과 똑같이 되신 그 인간적인 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성질을 가지셨고 자신에게 이러한 낮고 땅에 속한 육체를 취하사 많은 나약한 것에 매임으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려 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이 "죽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또 다시 희생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사 우리의 육체를 취하셨으므로 그는 우리의 형님이 되실 수가 있고, 그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회생 제물이 되셨으므로 그의 아버지에게 우리를 화목케 하실 수가 있다
"너희를 거룩하고 흥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 우리들의 구원에 있어서 제 2원리가 되는 것은 삶의 새로와짐이다. 구속의 모든 축복은 주로 죄의 용서와 영적인 중생, 이 두 가지 것으로 구성 되어 있다(렘31 33). 바울이 이미 강조해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 바 되었으므로 우리의 죄는 없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이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똑같이 중요한 또 다른 은혜를 우리에게 첨가해서 가르쳐주는데 우리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지음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값 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부어질 수 없으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케 하시사 의에 순종하도록 하신다는 말씀은 주목할 만하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신다고 가르친다(고전1 : 30). 우리는 의를 값 없이 거저 얻는다.
그리고 거룩함은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을 때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진다. 이 두 은혜 사이에는 불가분리의 연관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거룩은 다만 우리 속에서 시작하고 매일 매일 계속될 뿐이 요,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회복이 나타나도록 하실 때까지 완전해질 수 없다 는 사실에 주의하도록 하라. 옛날 코엘레스틴파(Coelestinians)와 펠라기우스파(Pelagians)는 이 귀절을 악하게 이용하여 죄 용서함에 대한 은혜를 배제했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생활은 하나님의 판단을 만족케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긍휼은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 무엇이 결코 아니고 우리의 부르심 끝에 이루어질 것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축 복들이다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 하 말씀은 인내하라는 권면의 말이다. 바울은 이 권면을 통해서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만약 그들이 복음의 순 수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받은 모든 은혜들은 헛된 것이 되리라는 점을 깨우쳐주고 있다. 바울은 또 이 말씀에서 골로새 교인들은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도 계속 중도에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때 그들의 믿음의 견실함이 거짓 사도들의 꾀임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라는 말로 바울은 믿음의 견고함에 대해서 역력히 말하고 있다. 믿음이란 여러가지 변하는 것들로 말미암아 흔들림을 당하는 단순한 하나의 견해가 아니 고, 모든 지옥의 음모에도 맞설 수 있는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는 것이 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로 하여금 항상 은총의 현재 상태와 끝까지 인내함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도록 하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는 교황주의자들 의 신학은 참된 믿음 중 가장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도 가르쳐 주지 못 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믿음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기를 골로새 교인 들이 믿음 안에 설 수가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의 소망, 즉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춰지는 소망에서부터 떨어지지 않을 때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있는 곳에는 영원한 구원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들은 다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간직하도록 하자. 바울은 여기서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 여 사람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이키려고 하는 모든 교훈들을 피하라고 한다.
"너희 들은 바" ; 그리스도를 갈기갈기 찢고 쪼개는 거짓 사도들까지도 공공 연하게 복음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단의 일반적인 속임수는 복음을 거짓 위장하여 사람의 마음을 번민하게 만들어서 복음 진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에바브라에게서 들은 그 복음이 순전하고 확실한 복음이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반대가 되는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것이다. 또 바울은 동시에 그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는 말로 이 사실을 확 증한다. 내가 알기에는 골로새 교인들은 그들이 자신들과 일치하는 전체 교회에 속해 있고 그들이 따르는 교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각처에서 받 아들여진 교리와 다름없다는 것을 듣고 있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확실하 다. 교황주의자들은 우리의 교리를 공격하여 말하기를 그것이 다른 곳에서는 찬성과 박수갈채로 전파되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거 의 동의할 수가 없다. 저희가 아무리 애쓴다고 할지라도 옛날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의해서 전파되었고, 또 모든 성도들이 순종함으로 받아들였던 것 을 오늘날 우리가 가르친다는 사실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 다. 바울은 복음이 모든 세대가 받아들이면 인정이 되고 반대하면 그 권위 가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 상에 퍼지라고 선포했던 선지자들의 수많은 예언들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 15)고 하신 명령에 대 해서 말하고 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바울이 의도하고 있는 바가 골로새 교인들도 예루살렘에서부터 솟아나 온 세상에 흘러넘친 생명의 물로 말미암 아 마심을 받았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겠는가? (e) (s lefic 10- 역시, 우리도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만 백성들 가운데 전파되었고, 모든 교 회들이 받아들였으며, 모든 경건한 자들이 삶과 죽음으로 고백했던 것과 같 은 복음을 가졌다는 것을 쓸데없거나 놀라우신 열매와 위로가 없이 좋아하 지 않는다. 우리가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졌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공격에서부터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특별한 도움이 된다. 즉 나는 그 복음이 최고의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 미하고 있다. 우리는 또 도나시우스파(Donatists)들은 특별히 교회에 대해 서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채 복음으로 나아온 자들이라고 논박 했던 어거스틴의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진실로 만약 참된 복음이 전해졌지만 어떤 교회의 찬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온 세상이 복음 전파가 행해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에서부터 모아질 것 이라고 예언된 많은 약속들이 공허하고 거짓된 것이 된다는 말은 사실이 다. 그런데 교황주의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들은 선지자들과 사도 들에게 작별을 고하도록 명하고 고대 교회를 소홀히 하면서 복음을 반대 하고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어디에 같은 점이 있는가? 우리는 교회가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때 여기 바울의 경우 처럼 사도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뿐만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보편성의 표적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려 하지 말고 바울은 단순히 멀고도 넓은 모든 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드의미한다고 해석하도록 하 자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 바울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성급하게 자신을 교훈의 직무에 돌입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스스로 권리와 권위를 구하여 이 직무에 부여한다. 실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 들의 믿음에다 자기의 사도직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복음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바울의 교훈은 반대할 수가 없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