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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골로새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4:6)

1. 성경 (골4:2 ~ 18)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2)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3)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4)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5)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6)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7)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8)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9)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0)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2)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3)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4)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5)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6)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2, 기도를 항상 힘쓰고" ;  바울은 일반적인 권면으로 돌이키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확한 순서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처럼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바울은 기도 속에서 두 가지의 것을 명하고 있다. 첫째는 힘쓸 것이요, 둘째는 깨어 있는 것, 혹은 가장 성실하게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항상'이라는 말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냉담하거나 관심이 없이 '바라보는 것'을 반대한다

 

"감사함으로~~~~"지금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되 이미 받은 은총들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수다장이처럼 떠벌이면서 졸라대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즉각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을 늘어놓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간에 만족하게 받아야 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이 빌립보서 4장 6절에서도 말한 바 있다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  바울은 조성의없이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의 기도로 도움 받기를 간절히 원했고, 또 그들의 기도가 유익을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바울이 형제들의 도고를 필요로 했다면 누가 감히 그것을 경시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우리들이 피차 사랑함으로 우리 가운데서 사랑을 행하라고 이 방법을 주신 것은 공연히 주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피차간에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필요 할 때마다 내 편에서 기꺼이 형제들의 기도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유치하게도 이 귀절에서부터 죽은 자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간청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 귀절이 죽은 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친교를 갖고 있었던 형제들에게 직접 기도를 요청한다. 이 귀절이 죽은 자들에 관해서 말한 것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에서 떠나 바울에게로 돌아가도록 하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도움을 요청하는 바울에게서 현저한 겸손의 증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위험에 눌려 있을 때, 복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인내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도 말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자기로 말미암아 교회들이 서 있기를 바라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또 그의 놀라운 열심을 생각해 보라. 바울은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았고, 교회로 하여금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사망의 위험에서 건짐을 받도록 기도하기를 구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복음을 고백하는 일에 있어서 정복을 당하지 않고, 겁을 내지 않으며, 오직 인내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참으로 바울은 두려움 없이 자기 생명을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전파에 매이도록 만들었다.

 

"전도할 문(말씀의 문칼빈 사역)~~~~~" ; 이 귀절은 단순히 바울이 에베소서에서(6 : 19)에서 입을 벌려 라고 한 말이나 그리스도께서 "구재"와 지혜"(눅21 '15)라고 한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표현은 형식에서까지 다른 것과 차이가 없다.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이 빗장이 걸려 있고 잠겨진 문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쉽지 않음을 홀륭한 비유를 들어 말하고 있다. 이 일은 실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 하셨듯이 하나님의 일이다."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 20). '그러므로 바울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자기의 혀를 움직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바른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골로새 교인들에게 더욱 기도할 것을 고취시킨다. 둘째로 바울은 복음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일의 존엄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토록 중대한 일을 조심없이 아무렇게나 할 수가 없다. 세째로 바울은 역시 자기의 위험을 말한다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  이 귀절은 이 일이 평범한 일이 아님을 암시하여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서(6: 20)에서 '히나 파레시아소마이'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자신을 위해서 바라고 있는 것은 마치 복음의 권위와도 같이 두려움이 없는 확신을 갖는 것임이 드러난다. 더우기 바울은 여기서 오직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만을 바라고 있으므로 우리들도 이와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대적들의 맹렬함에 물러서지 말고  죽기까지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 한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께 확신의 영이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5. 지혜로 행하여" ;  바울은 믿음을 지킨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대조시 키고 있다. 교회는 마치 모든 믿는 자들이 서로 친척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 는 도시와도 같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왜 믿는 자들보다도 믿지 않는 자들을 생각하기를 바라는가?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소경이 가는 길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우리가 경솔함으로 인하여 더한층 나빠진 것을 좇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저들은 마음에 상처 를 입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고종교를 피하려 한다. 둘째로 어떠한 경우에도 복음을 깔보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웃고, 대적하며, 혼란케 하며, 더욱 핍 박을 강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끝으로는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서로 사회적인 교제나 일반적인 행사로 뒤섞여 사는 동안 그들이 타락을 본받아 더럽혀지거나 점점 세속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월을 아끼라." ;  이 말도 역시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그들과 더불어 교제 하는 것은 위험스럽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서 바울은 때가 악하 니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상의 매우 크나큰 타 락 속에서 우리는 선을 행할 기회와 방해물들과 겨루어 싸울 기회를 포착해 야야 된다 는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이 공격을 받아 막히면 막힐수록 더욱 조심하여 우리의 발이 비틀거리거나 게으름에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6. 너희 말을" 바울은 듣는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유쾌한 말을 하라고 한다. 바울은 사악하고 불경스런 말을 공개적으로 정죄할 뿐만 아니라 가치가 없고 게으른 말도 정죄한다. 그래서 그는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고 한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소금을 가지고 있 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바울은 재담은 유쾌한 것이라 해서 믿는 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고자 하여 이것을 사용하거나 실천하는 일이 없도록 간접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을 일으켜 주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맛이 없는 것 으로 보았다. 은혜란 말도 해를 주거나 공허한 수다, 조롱, 그리고 모든 종류의 농담과 반대되는 말로 사용되었다

 

"대답할 것을 알리라." ;  스스로 신중한 말을 하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은 수다스럽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빠졌던 많은 모순 속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이를 실천해야 바르고 적절한 답변에 익숙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어리석은 자들은 어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기들의 조롱 거리를 꼭 드러내고야 말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어리석은 수다스러움에 마땅한 형 벌을 받는다. 바울은 '무엇을' 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가 아니라 '각 사람에게' 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적은 양의 보잘것없는 성질의 것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7~9절. 내 사정을~~~~" ; 바울은 자기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의 사정, .말하자면 담보물을 줌으로 그들을 확신케 해준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위한 관심을 게을리 하지 않고 두기고를 그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이해를 불러 일으켰다. 이 귀절에서 개인의 열심과 거룩한 사도의 자부심이 함께 나타난다. 바울은 죄수로 붙잡혀 있는 동안,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극심한 위험 속에 놓여 있는 동안, 복음을 증진시키고 모든 교회를 위해 일하는 데 자신을 사용하기를 결코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적은 문제가 아니다. 이처럼 몸은 갇혀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열심으로 더욱 멀고 넓은 곳으로  분주하게 돌아 다녔다.  그의 자부심은 필요할 때 적합하고 지각이 있는 사람을 보내서 교인들을 확신시키고 거짓 사도들의 술책을 막아내게 한 점에서 보여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모든 참된 교사들에게 배운 교훈들이 무엇이 또 어떻게 일치하는가를 볼 때까지, 즉 그들이 전에 에바브라에게서 배운 것과 똑같은 것을 두기고에게 듣게 될 때까지 자기 옆에 에바브라를 머무르게 함에서도 그것이 보여진다. 우리들을 같은 관심으로 닮아가도록 해주고 있는 이 실례들을 주의 깊게 묵상 하도록 하자.  바울은 그의 사절이 좀더 무게 있게 하기 위하여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오네시모가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바로 이 사람이 빌레몬의 종을 말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도둑과 악명자의 이름을 사용했다면 쉽게 비난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들의 이름을 훌륭한 칭호로 구별하여 그들이 일하는 데 더욱 좋도록 했다. 특별히 가르치는 직분을 수행했던 두기고에게 그러했다.

 

"10. 함께 갇힌~~~~~~" ; 이 귀절을 볼 때 바울이 로마로 붙잡혀간 후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나타난다. 또 그의 원수들은 바울과 같은 위험으로 경건한 자들을 취급함등으로써 바울을 도와주지 못하도록 방해 했을 것이며, 이 방법이 처음 얼마 동안은 효과가 있었을 것이나, 후에는 몇 몇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자기들을 위협하려는 모든 것들을 멸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성이 있다

 

"너희가~~~~영접하라" ; . 어떤 사본들에는 '영접하라' 가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받은 명령의 성격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나바나 마가 중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칭찬으로 후자일 가능성이 더 많다. 헬라어로는 부정법으로 되어 있으나 내가 취한 방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거짓 형제들,위선자, 사기꾼, 수많은 부랑자의 무리와 선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증거를 갖는 데 관심이 많았음을 주의하도록 하자. 이와 같은 관심은 오늘날에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좋은 스승들은 냉담하게 받아 들여지기 때문이요, 또 속기를 잘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기꾼들에게 매우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11. 유스도라~~~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 이 귀절은 다시 말해서 "할례당"이라는 말이다. 바울이 후에 부른 다른 사람들은 무 할례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에는 복음을 돕는 자로 나타나는 유대인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모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반대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역사하는 자들"이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은사를 받은 자들만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당시 베드로는 어디에 있었는가? 의심할 것도 없이 베드로는 수치스럽고 매우 부당하게 여겨 그곳을 그냥 지나쳤던지 아니면 그 당시 베드로는 로마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말이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홀이요 이것으로 말미암아 영생으로 택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표현 방식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12절.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애써~~~~"  이 말씀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교회를 잊어버리게 할 수가 없고 바다 건너에 있다고 해서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할 수가 없는 선한 목자의 본보기이다. 또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애써" 라는 말로 나타낸  간절한 소원이다. 사도는 여기서 감정의 격렬함을 표현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목사의 기도를 평가하지 말고 그와는 반대로 그 기도로 말미암아 큰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훈계한다. 끝으로 우리는 바울의 말을 읽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완전한 생활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서서 다른 곳에다 인생의 계획을 세우지 아니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자

 

"14. 누가와~~~~~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나는: 이 사람을 전도자 누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뜻을 같이할 수가 없다. 그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이 필요 없었고, 또 만약 그였다면 그는 이보다 더 훌륭한 이름을 받았어야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와 ,함께 도와주는 자를 말했든지, 아니면 최소한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그의 신실한 동료를 말했음이 틀림없다.  전도자 누가는 그 때에 없었고,  여기의 누가는 또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도자 누가와 구분하기 위해서 의사라고 부른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이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추측할 뿐이다. 여기서 '데마'는 바울이 후에 자기를 떠났다고 말했던 자임에 틀림없다(딤후4: 10). 바울이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를 말할 때 우리는 바울이 한 가정을 들어,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수많은 작은 교회로 되어져야 함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집을 주 앞으로 끌어 올려야 할 책임과 거룩한 교훈 아래 보존시킬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자. 요컨대 자기의 집을 교회의 모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6.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  이 글은 비록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진 것이지만 다른 교회들에게도 유익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서신들을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모든 서신들은 특별한 교회에 한 차례 보내진 것이지만 그 동안에는 항상 능력이 있고 모든 세대에 걸쳐서도 다 공통되는 교훈이 들어 있으므로, 그 이름이 가진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 나하면 그 주제가 우리에게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언급한 또 다른 편지는 바울이 기록한 것이라고 지금까지 잘못 생각되어 왔다. 바울이 라오디 게아인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나는 그것이 바울에게 보내진 편지라고 확신한다.  흔히 서로 가까운 도시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읽는 것이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유익했다. 그러나 :가치없는 자를 친구로 삼을 때는 매우 큰 기만을 당한다. .나는 이 문맥을 보고 한 서신을 모조해 내는 뻔뻔스러운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연약해서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 아깁보는 에바브라가 없는 동안 목회자의 직분을 수행했던 자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했고 부흥도 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온 교회가 그에게 권면해서 아킵보에게 열심이 일어나고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고 있다. 바울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그를 권면할 수 있었지만,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 일을 위임함으로써 만약 자기들의 목회자가 냉담하고 교회의 권면 받기를 거절한다면 스스로가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준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큰 능력을 부여받으나 율법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 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에 충분하다면 자신이 가르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바울은 또 다시 자기의 매인 것을 말함으로써 그의 매임이 가볍지 않은 괴로움임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은 마음에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었고, 또 자기 안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했으므로 모든 거룩한 자들이 자기의 괴로움을 기억해 주는 것이 매우 시급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도움을 사면에 요청하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가 아니다. 친필로 기록했다고 밝히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그 당시에는 거짓 서신들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가짜임을 막기 위해서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