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전 9:15 ~27)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5)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6)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7)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8)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19)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0)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1)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2)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3)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4)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5)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6)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2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앞으로 바울에게 사례비를 지출하기를 갈망하는 것 같은 인상이 주어 졌을지도 모르므로 바울은 그런 어떤 암시라도 있었다면 그것을 재거하기 위해서 교만 때문에 그에게 주어전 그 무엇을 상실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즉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봉사하였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자만에 대한 이 동기에 그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놀라운 일o]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의 권위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 사도들에게 그률 조롱 할 수있는 그런 기회를 주었을지도 모르며, 고린도 교회교인둘이 그를 경멸스럽게 대하는 위험성과 또 그둘에게 큰 찬성을 주었을지 모른다. 그는 그의 생애만을 위하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이 확장되는 기회를 갖기를 더 원하었다. ·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 라도~~~~~" ; 바울은 자만 때문에 이 근거를 빼앗기지 않아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만일 그가 그의 사역을 면하는 일 이상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즉,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불가피한 필요성으로 그에게 부과해 주신 것보다 일을 하지 뭇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점에서 그는 자만에 대한 근거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가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온 바울이 여기서 의미하는 자만은 어떤 류의 것인가, 그가 디모데 후서 1장 3절에서 말하는, 교사로서 그가 그의 임무를 ‘청결한 양심’으로 수행하는 그런 자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거짓 사두들이 바울을 해방하기 위한 구실이, 마치 다음에 더 분명히 나타날 것처럼 내다보고 있을 때, 그 거짓 사도들에게 도전 할 수 있기 위한 자만의 근거를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놀랄 만한 문장이다. 먼저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사역자들이 받는 소명의 본질과, 또한 그들이 얼마나 굳게 하나님과 연합하고 있는 가를 배우게 되며, 두번째로, 사역자들의 임무가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그들이 감당하고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일단 어떤 사람이 소명을 받으면, 예를 들어, 만일 좌절감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혹은 고통이 그를 업습하여 올지라도 그 소명이 그에게 적용된 이상, 그 자신이 그 소명에서 결코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리 속에 깊이 심어주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에 바쳐졌으며, 스스로 그 끈을 끊어버리는 것은 죄악일 수밖에 없는 거룩한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요점은 만일 그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자신이 저주를 받으리라는 위협감이 그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파할 소명을 이미 받았으며, 그 이유 때문에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동일한 사역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후에 이 구속을 피할 수 있는 것일까? 가르치는 임무보다 그들의 본무에 더 모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 각하는 로마 교황과 사교관(司敎冠)을 쓴 감독들의 겅우에 그러면 어떤 종류의 ‘사도적 계승권’ 이 있다는 것인가?I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상(賞)은 라탄어로 곧 ‘고통하는 자에 대한 상' 이라고 하며 , 또 그는 전에 그것을 자만에 대한 근거라고 말하였다. 다론 사람들은 이것을 다론 방법으로 설명한다. 즉 그 상온 자신의 임무를 신실하며 온 마음을 다 기울여서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 나 나 자신은 ''자기 임의로 행하는 사람' 이라라는 말을,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메우 열정적이고 성실하여서, 교회에 대한 봉사가 되리라고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일에 그의 코를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이해한다. 같은 방법으로 그는 ‘임의로 아니 한다 할지라도' 라는 말로써 , 다론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부과된 필요한 어떤 것을 행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그것이 그들의 뜻과는 일치 하지 않으므로 악의를 품고 하는 사람들을 분명히 의미하고 있다.
어떤 일에 흥미를 가지고 그 일에 임하는 사람은 또한 고통도 기쁨으로 감당 할 수 있지만 그 일에 대한 태만은 그 일의 완성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 언제나 사실이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는 바울은 다만 형식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적절하게 도움을 주고 그의 교훈을 더 향상시키도록 활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통하는 자에 대한 상'이었으며 바울이 자만할 수 있는 근거이었다. 그는 쾌히 그의 권리를 포기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기쁨으로 그리고 참된 정성으로 하여야 할 일에 자신을 헌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이것을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그 참된 의미는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행하는 인간의 봉사, 말하자면 마지못해 하는 일은 하나님께 전혀 열납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셨을 때, 우리가 그것을 억지로 하였으면서도, 그것을 잘 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기뻐하면서 열심으로 그 일을 하고, 또한 아무것도 주저함이 없이 곧 행함으로써 그둘의 기쁨을 증명하기를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뱌울은그의 소명을 바르게 수행하려는 그 길만이 오로지 그의 책임을 자원하는 심정으로 또한 무한한 열정으로 행하는 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8. 그런측 내 상이 무엇이냐" ; 앞에서의 논증으로부터 그가 이르게 된 결론은 그의 자만에 대한 이유란 그가 아무 보수도 없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봉사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 자신이 기쁨으로 가르치는 임무 수행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여주는 이유이다. 그는 복음을 저해하는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한 고통을 감내하였으며, 또한 그가:가르쳤다는 것과 교훈을 남겼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복음의 영향이 모든 방면으로 그 영향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하여 항상 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가 말한 말씀의 요점이다. 측 ‘나는 복음을 전파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가 나에게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기쁨으로 하지 않는다면, 설교하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그의 직무에 적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만일 내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나는 자만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에 대하여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함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만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로마교도들은 이 귀절에서 그들이 창안해 낸 적선(積善)에 대한 근거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바울은 그에게 요구되는 것을 다만 복음울 전파하는 것으로 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위에 뭔가를 추가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해야 할 것을 넘치도록 하였으며,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자발적으로 해야 할 것과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사이에 그는 구별을 두었다' 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 참으로 바울은 목회자둘에게 그들의 소명에 있어서 정당하게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그는 행하였는데, 그는 주님께서 목회자들이 취하도록 허락하신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그렇게 한 것이댜.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죄에 대한 모든 가능성들에 대하여 조치를 취한 것으로써 그의 의무의 일부분이었다. 이제 그는 만일 그가 그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더 이상 복음의 발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었다. 그러나 그것이 뭔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닐지라도 나는 그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 이상의 것을 바친 것 온 아니라고 주칭한다. 나는 '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폐하는 것이 좋은 목회자의 의무가 아닌가? 그것이 그의 권한에 속하는 한에 있어서 말이다' 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다시, 그리고 다시 나는 ‘바울이 그것 외에 정확하게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께 빛지지 않은 것 이외의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생각할 권리를 갖지 뭇한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긔의 직무에 요구되는 것을 행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정상적이 아닌 긴급성이옸을지라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적선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감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사악한 환상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말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용어 자체의 사용도 금하도록 하자. 왜 냐하면, 그것은 극악 무도한 자만심을 과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해석을 리끌어 내기 위해서 이 귀절이 악용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이제 로모교도둘의 오류는 다음과 갈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논박을 받고 있다.
즉 율법의 주제 아래서 타락한 모든 행위를 ‘적선’ 이라고 부르는 것온,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너회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 17 : 10)는 말씀에서 분명히 밝히신 것처럼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내포되지 않는 어떤 행위도 선이 될 수 없으며, 또 하나님께 열납될 수가 없는데 동의한다. 나는 이 둘째 진술을 다음과 갈이 증명한다. 선행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둘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봉사나 혹은 사람중의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 나 그 어느것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근본 원리에 만일 입각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아니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갈이 사랑하라"(막 12 : 31)는 교훈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사랑의 의무도 없는 것이다. 로마교도둘은,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수입의 십일조를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실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만일 그가 더 바치고 또 10분의 5릏 바친다면, 그는 적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궤변을 무너뜨리기는 쉽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행위가 불완전성과 부적당함이 그들을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하고 있는 것보다도 백배나 더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께 입은 은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복음으로 인하여······이것이로라." ; 우리에게 주어전 자유를 취하여 장애물을 놓는 것은 무책임한 방종이고, 자유의 악용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분명하여 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에 대한 근거를 제기하지 않는 법칙을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귀절은 내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울이 그의 직무에 관해 본연적으로 그에게 부과되어진 팔요조건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자유는 어떤 방법으로든 남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9~20. 내가 모른 사람에게…… 얻고자 함이요~~~~" ; '에크 판톤' 즉, 모든 사람에게는 중성이나 혹은 남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중성의 경우에는 사물을 언급하고, 남성의 경우는 사람을 나타낸다. 나는 남성을 택하고 싶다. 바울이 한 특별한 실증만을 나타내는 한은 그가 자신을 약한 자들에게 적응시키는 데 얼마나 신중을 기하였는가, 이제 그는 특별한 실례(實例)들이 따르는 일반적인 면밀한 언급을 덧붙이고 있다. 그 일반적인 언급은 아무도 그를 제어할 권위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제어하는 힘을 가진 것처럼 살았으며, 또 그는그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구속을 받고 있지 않온 약한 자둘에게 스스로 그 자신을 복종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특별한 실례들은 그가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이방인 가운데 있었으며, 또 유대인처럼 처신하여 유대인 중에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유대인들 중에 살았을 때에,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의식들을 주의깊게 관찰 하였으므로, 그 종교 의식들을 지킴으로써 그는 이 방인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였다. 그는 '~~~~와 같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가 하였던 행위를 분명히 한 것온, 그가 자유를 많이 누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아무리 자신을 사람들에게 적 응시킨다고 하여도,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와 동일한 것이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러 모양이 될 것’이라는 의미는 어떤 상황에 요구되는 모든 적절한 자세를 취하였다는 각각 다른 그런 방법에 조화되는 각각 다른 그 의미에서, 혹은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그런 방법에 조화되는 각각 다른 그런 역할들을 취하였음을 나타낸다. 그가 율법없는 자가 되었다. 또,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되었다고 말하였을 때, 우리는 그가 다만 의식적인 율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법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에게 모두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또 바울은 그것에 관한 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원리는 중성적인 물질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21.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자가 아니요 .~~~~" ;이 삽입구로써 그는 그 표현의 가혹함을 완화하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_그가 '율법 없는 자’가 되었다는 말은 처음 듣기에는 가혹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부터 잘못된 뜻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수정의 방법으로, 그의 마음에 항상 한 가지 법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 위에 더하여, 나쁜 인상은 불법하게 그리고 부당하게 그를 대적하도록 선동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노예로부터 모세의 율법으로 면제를 가르치면서, 제어되지 않은 방종의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짓 사도들이 복음에 누명을 끼치고 있는 부당한 치욕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참으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여기서 바울은 그가 자신을 적응시키는 그런 류의 사람들과 그 목적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 중에서는유대인의 생활 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 앞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완고하고, 또 바리새인과의 영향 아래서 교만하고 악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모두 억압 당하는 것을 보기 원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같은 정도로 양보하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염려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그냥 두어라 저회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마 15 : 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 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적응하여야 하며, 완고한 자들에게 적응하여서는 안된다. 그의 목적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고, 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호의를 간직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요점에 세번째 요소가 추가되는데, 우리의 자유에 속하는 중용적인 일들을 제의하며 그는 그 점에서 약한 자들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제 만일 우리가 그런 정도의 겸손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하여 본다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을 그와 비교하여 볼때에 만일 우리가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약한 자들에게 우리의 콧대를 낮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또 어떤 면에서든지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까지도 바울의 명령을 우리의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이 옳은 것을 깨달으면서,·우리 자신은 약한자들에게 적응시키고, 중용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게 하며, 또, 한편 약한자들을 생각하여야 한다. 부정한 사람들은 그들의 관심이 고통스럽게 살지 않으려는 것이며, 또 그런 이유로 약한 자들에게 보다는 약한 자들에게 공격 거리를 주지 않으려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더구나 중용적인 일과 금하여진 일을 구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갑절 더 악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을 거침없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더할 나위 없는 죄는, 그들 자신의 악한 위선을 변명하기 위하여 바울의 이 문장을 악용하고 있는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내가 간단하게 취급한 이 세 가지 요점을 잘 기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충분히 논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잘 사용하고 있는 귀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그가 그들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일반적인 진술을 수식함으로써 끝내고 있다 (만일 당신이 ‘나는 모두를 구원하기를 원한다’라는 벌게이트 역본을 따른다면,,이 내용은 오늘날 어떤 헬라어 사본에서도 역시 발견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귀절에서 그는 ‘나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어떤 사람을 구원하고 싶다’는 것을 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고려라는 이유가 때로는, 결과에 관계되는 한 무시되어진다. 이 제한은 아주 적절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가 아무리 모든 사람들에개 봉사하지 못할지라도,그는 결코 극소수 사람들의 복리에 대한 그의 관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참예하고자 할이라" ;고인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이 행한 일은 그가 복음사역울 맡았기 때문에 바울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들의 머리속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이 목표하는 관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그가 '복음에 참여 하고자 함이라'는 소원을 선포하였을 때 그는 그가 하는 것처럼,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의 친교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복음의 참여자가 되는 것은 복음의 열매를 얻는 것이다 ..
"24. 운등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그는 그가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을 끝마쳤다. 이제 그것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심어주기 위해서 그는 권고를 덧 붙이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그는 만일 그들이 견고히 지키지 않으면, 그들이 성취한 것이 무가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들이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주님의 길에 들어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마태복음 10장 22절에서 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그리고 참으로 그는 직유(直哈)를 경주장에서 빌어오고 있다. 참으로 경기장에처 달리는 사람은 많지만, 그러나 목적지에 제 1위로 이르는 사람은 단 한사람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우리에게 명한 경주로에 들어선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할 수 있는 비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이런 면에서 세상의 경주와 갈지 않다. 운동장에서 달리는 경기는 다론 모든 사람을 재외하고 단 한 사람만이 승리자가 되고, 또 상을 받지만, 우리의 경주 경우에 있어서는 더 좋은 경기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목적지까지 모든 길을 끈기있게 끝까지 달려 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길로 들어서서는 안되며,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경주로를 달리는 사람들은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을 모두가 서로 돕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는 말씀에서 다른 방법으로 갈은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여기서 우리는 비교의 응용을 배우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전 생애를 롱하여 ‘달리기’를 계속하지 않는 다면 출발하는 그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 이 다• 그러 므로 경 주를 시 작 한 조금 후에, 예를들면 절반쯤 달린 후에 곧 피곤하여지는 일이 있을 수는 없다. 죽음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복음의 경주를 중단시킬 수는 없 다. 불변사 이 와갈이 (나 후토)라는 말은 두 가지 방법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다음과 같이 앞에서 말한 것에 일치하고 있다. 즉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는 경주자들이 결코 쉬지 않는 것과 같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 동안에 인내하여 달리기를 멈추어서는 안된다.' 그 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경기 중간에서 낙오하는 그런 방법을 취하여서는 안 되며, 여러분은.승리를 얻는 그런 방법으로 달려가야한다'고 바울이 아태에 서 말한 것과 아주 잘 일치된다. 나는 경기창과"다른 여러 종류의 경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에 대한 정보는 사전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경주는 말을 타고, 또 다른 경주는 도보로 하는 것이었다 는 것은 일반이 알고 있었다. 더구나, 바울이 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일들올 더 열거할 필요는 없다.
"25. 이기기틀 다투는 자마다~~~~~~" ; 이런 관점에서 그는 그들이 인내하도록 그들을 격려하였고, 그들이 어떻게 인내하여야할 것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구는 이제 권투 선수의 비유를 들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참으로 철처 하게 모두를 그런 방법 으로 하라는 것 이 아니 라, 그가 취 급하고 있는 문제에 한해서만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형제의 연약함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제한하였다. 그러나 그는 만일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기를 싫어한다면, 우리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또 권투 선수가 특별한 음식을 먹고, 또 양을 조금만 먹는 것은 과식을 안하기 위해서이거나, 모든 면에서 우아해지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가 올 싸움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말함으로써, 사소한 일에서 중요한 문제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곧 시들어버리고 말 잎사귀로 만든 화관을 그렇게 귀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그 영원한 면류관을 더욱 귀하게 생각 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 된다. 경기자들이 그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소박한 식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다•,.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 하기를 ~~~~" ;·바울은자'-시의 경우를 실례로 둘면 서, ~ 교훈에 더욱 비중을 두기 위하여, 자신의 문제로 되돌아오고 있 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 겨온 소망에 .대한 충분한 확신의 언 급이타고 생각하고 있다. 즉 그가 “나는 주님의 약속을 가졌으며, 또 걷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의 일에 있어서, · 헛되이 달리지 않으며, 어 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리석은 자가 되는 위험에도 결코 빠지지 않을 것이 처럼, 그러나 나는 바울이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길을 찾아 그들의 목적지 에 정확하계 이르며, 불신 속에서-방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인 도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나타내려고 하 였는지 모른다 .. "주님께서는 여기서 ·우리가 달리기'와 ‘다투기’에 전념하 도록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를 우리 앞에 설정해 놓으셨으며, 또 우리가 묵적없이 피곤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무기’ 에 대한 정확한 규칙을 정해 주신 것이다 .,, 바울은그가인용한비유 두가지 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나는 어디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가를 알고 있으 며, 또 노련한 프로 권두 선수가 자신의 강타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업 려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박차를 가하여야 하며, 또 그들에게 더 큰 열정으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의 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전 환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
"27. 내가 내 몸을쳐" ; ‘내 몸을……의 아래에 두다'라는 말을 브데우스 (Budaeus)는 ‘감시 의 눈 아래 나를 둔다' 타고 풀이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노예처럼 일한다’는 의미에서 동사 '휘포피아제인' 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방종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육신을 지배하는 어떤 힘을 갖지 않으면, 그리고 야생의 길들이지 않은 말이 순종하도록 길들여져 욕망을 제어하도록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지시에 따르기를 원했던 오래 전의 수도승들은 많은 훈련적인 연습을 생각해 내었다. 그들은 의자에서 잠을 자는 습관을 들였으며, 오랜 철야를 계속하기도 하고, 또 생활에 있어서 모든 사치를 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요점을 놓쳐버렸으며, 또 그들의 마음 속에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름13 : 14) 는 교훈 이외의 다른 생각을 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도록 말한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전서 4장8절에서 밝힌 "육신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라는 말씀은 항상 좋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음탕함으로 말미암아 종교적인 의무에서 우리 자신을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육신을 노예처럼 취급하도록 하자.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곧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그들을 실족케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도록 하자•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 어떤 사람은 이 맡을 이렇게 해석한다. 즉 ‘다른 사람들을 신실하게 그리고 잘 가르쳤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악의 길로 인도하였다는 정죄는 받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귀절을 다른 것들에 대한 관계를 언급하는 것으로써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즉, '나의 생애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성품과 행위가 나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그런 생활을 하기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여야 하며, 또한 형제들에게 불명예와 그들을 실족케 하는 심각한 허물의 원인들을 포함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한 그런 일들에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이 귀절은 또한 그가 앞에서 말한 이 효과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것이다. 곧 내가 복음을 속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