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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고전9:12)

1. 성경 (고전 9:1 ~14)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1)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2)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3)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4)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5)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6)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7)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8)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9)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0)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1)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2)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3)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 ;바울은 그가 좀 전에 말하였던 형제를 실족케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실제적인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그가 몸소 실행하지 않은 어떠한 일도 그들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그것을 지킬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 자연적인 정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교사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교훈을 자신이 친히 실천하고 있음을 그의 생애를 통하여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훈련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요구한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제한하여야 하는 것 말이다.

 

바울은 그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 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널리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참으로 그는 자신이 친히 그렇게 하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 때문에 미래에 대한 단순한 약속에 대해 그를 신뢰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과거에 이미 행한 것을 그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그가 다른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그의 자유를 포기한 놀라운 실례를 인용하고 있으며, 또 그를 비난하려는 기회를 갖고 있는 거짓 사도들을 막기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보조로 자기의 생활을 유지하기보다는, 친히 자신의 수고로 말미암아 생계를 이어가는·길을 택하였을 때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사도들에게 속하는 음식물과 의복을 공급 받는 권리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에게 그를 본 받으라는 더 큰 격려를 하기 위함이며, 또 형제를 위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완고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렇게 한 또 다른 이유는 그를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부당성을 깨닫게 하여 주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실 비난한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어떤 일로 바울을 멸시하려는 구실로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논증을 더 철저히 납득시키기 위하여 수사학적인 질문법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라는 질문은 일반적인 질문이다. 그가  "내가 사도가 아니냐"고 덧붙였을 때, 그는 질문을 자유의 특별한 형태로 축소 시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만일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왜 나의 신분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낮아야 한다는 말이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는 사도로서의 그의 존재에 근거한 그의 자유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 그는 자신이 다른 사도들 보다 어느 면으로 지위가 낮다는 인정을 받지 않기 위해서 이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적개심과 질투를 가진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하여 계속 되풀이하여 주장하면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 즉  바울이 복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사람의 손에서 받은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결코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 후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육신의 옷을 입고 계실 때보다, 불멸의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더 큰 특권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8절에서도 그가 그리스도를  봐온 사실을 밝혔고, 또, 사도행전 (22:16 이하,. 26:13 이하)에서도 두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잘문은그의 소명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 그를 알려주신 그 결정은 그보다 권위가 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두번째 귀절에서 그는 이제 그 의 사도성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에 의하여 그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얻게 된 그 결과에 대하여 입증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그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그의 일이라고 스스로 선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새로운 창조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그가 고린도전서 3장 7절의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씀과 조화될 수가 있겠는가?  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동인(動因)이 되시므로, 인간이 그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뿌릴지라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한 도구일 뿐이므로, 우리는 선교의 유효성을, 모든 찬양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려 드리는.그런 방법으로 말하여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복음 전파가  인간을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으로 언급되어질 때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씀과 잘 조화가 된다. 만일 인간 그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분배를 한다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러므로 성경은, 복음 사역을 하나님과 연관시켜 논할 때, 사역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역 그 자체만에 한한 문제로, 그리고 하나님과 비교 되지 않는 것으로 될 때, 그 효과는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열렬한 표현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없이 그 자신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인 동인(動因)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도구인 인간과 연합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노력에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이 그 자신의 동력으로 일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사도가 아닐지라도~~~~~" ;  이 문장의 요점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의 사도성의 권위에-대한 것을 문제 삼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다.  그는 만일 나의 사도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자들이 있다면그것은 결코 너희들에게 문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불신자들이었을 때이든지, 혹은 너희들이 나를 사도로 인정하였을 때,  내가 선교로 너희 교회를  심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말로만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사도성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믿음의 형태로 하나님의 인(印)을 쳐주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은 역시 사람들을 자신에게 모으는 거짓 사도들에게도 작용되는 것이라고 반기를 든다면, 나는,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 결과로써 그의 복음 사역이 확고하게 된다면, 그 순수한 교훈이 첫째되는 본질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만일 사기꾼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일부를 속이고, 그 위에 또, 백성들이나 왕국들이 사기꾼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면, 여기서는 그들의 날개를 치장하는 논거를 그들에게 제공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을 '순전하게'  (빌립보서 1장 17절에 나타난 것 처럼) 선포하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때로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데, 바울은 그의 사역의 결과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추론하는 데 아주 정정당당하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의 구조가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하게 그 안에서 보이는 그런 축복을 받았으며, 그것은 또 바울의 사역을 확고히 하는 결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나를 힐문하는 자들~~~~" ; 그가 지금 취급하고 있는 중심 주재 ’이의에도, 그는 여기서 그의 소명에 대하여, 마치 그가 사역자들 중의 평범한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반기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제거하려는 부수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었던 것처 럼 보인다.  그는 ‘나는 나의 사도성의 명예를 삭감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언재나 나의 방패로서 너희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결과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를 해치고 있고, 또 그둘의 유익을 손상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의 믿음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중대한 중거였다면, 그리고 그의 수비가 그를 중상하는 자들을 대적하였다면, 그 한 가지는 다른 하나와 나란히 병행하여 붕괴됨이 없이는 도저히 다른 하나를 넘어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심문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나는 ‘나의 신분을 조사하는 사람들’로 번역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사도성을 논쟁거리로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소받은 사람이 법적으로 심문받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헬라어 저자들의 해석에 동의 한다. 그러 나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아나크리 네 인'이 나의 표현에 의하여 더 분명하여진 것처럼, 나에게는 보인다.

 

"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그가 이미 선명한 것으로부터 그는 그들로부터 먹고 입을 것을,공급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교회에 부담을 끼치지 않는 그런 방법으로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가 그의 자유를 양도한 것 중의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것은 그가 아내를 갖지 않았다는 것인데, 아내를 갖게 되먄 그 아내 역시 그들의 책임이 될 것이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이 말 씀에서 바울이 결혼하였다고 추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바울이 아내 때문에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아내를 어떤 특정 장소에 남겨 두었다는 것아다. 그러나 이것은 찰못된 억측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 한 사람에 의 하여 쉽게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아내를 ‘자매'타고 부름으로써, 바울은 무엇보다 먼저 믿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결합이 얼마나 강하고 사랑스러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중 결속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부분에서 그는 서로를 대함에 있어서 그들이 대단히 겸손하고 신중하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교역자들에게는 결혼이 적합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으로부터 추리하여 내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다. 나는 사도들이 그것을 활용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둘의 실례에 대하여서는 곧, 언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결혼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  주님의 위임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이 늘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견해로 그의 권리를 포기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단계적으로 진행해 가고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사도들의 경우를 실례로 들고 있다. 그보다도 더 그는 주의 그 형제들이 아내를 갖는 데에 아무 어려움을 갖지 않았다. 그렇다. 그리고 그보다 더 제 1 인자로서의 지위에 일반의 찬성을 받았던 베드로 자신도 같은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주의 형재들’ 이라는 말로써 ,그는  요한과 야고보를 의미하고 있는데, 그들은그가 갈라디아서(2:9)에서  나타낸것처럼 기둥같은 명성을 얻은자들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되는 관습과 같은 말씀에서, 그는 출생으로 그리스도에게 관계된 자들을 '형제들'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귀절에서 교황권에 대한 근거를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을 어리석은 바보로 만들 뿐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 가운데서 참으로 제 1인자로 인정 받았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지도할 책임을 말은 지도자는 항상 어느 단체에서든 팔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둘은 베드로의 특출한 온사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남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 다른 사람들 위에 뛰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높은 존경과 명예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우월성은 지배권이 아니며, 그것과 지배자의 절대적 권력 사이에 비교는 참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가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 뛰어났다 하더라도 그는 그의 동료들에게 적합한 사람이었다. 교회에서만 홀로 재 1위가 되는 것은 한 가지 일이고, 온 세계를 지배하는 통치권을 갖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가 비록 베드로에 관한 한 이 모든 것에 동의할지라도, 교황이 그렇게 해야 할 무슨 권리가 있다는 말인가?  맛디아가 유다를 대신한 것처럼, 다른 어떤 유다가 베드로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그의 후계자들이 900년이 훨씬 더 지난 시대 후에, 혹은 유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자들이 그의 후계자라고 뽐내고 있는 사실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런 문제를 논의할 곳이 못된다. 나의 〈기독교 강요〉(4.6)을 보시라.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요점으로서 사도들이 결혼을 그렇게도 꺼리는 가를 로마교 성직자들처럼 결혼을 기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결혼은 그들의 성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만일 성칙자들이 그들의 법적인 아내와의 부부생활을 한다면 성칙자들이 더럽혀진다고 사람들이 놀랄 만한 지혜 나부랭이를 밝힌 것은 사도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마지막에는 교황 시리시우스(Syricius ; A.D~ 384~399)가 결혼을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드릴 수 없는 '육체의 부정’ 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그렇다면 죽을때까지 이 불결한 생활을 계속할 불행한 사도들에게 무손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교황 정치 예찬자들은 그들 자신의 창안(創案)인 교활한 추리의 그럴듯한 파편으로써 그 논쟁을 회피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들은 부부생활을 억제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아내들을 그들과 함께 있게 하였다고,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들의 경비부담에 대해 그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랑을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교회가 그들을 지원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또한 그 아내들이 그들 자신의 자유의사로 곳곳을 돌아다니므로 아떤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는, 단순히 공적 비용으로 게으르게 살려고 하는 것처럼 그 설명은 그들이 무엇윤 가르쳐야 하는가를 들으려고 사도들을 열심히 따라다니는 다른 사람들의 아내들을 말 하는 것이라는 암브로스(Ambrose)의 설명은 참으로 억설이다.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 동사의 현제시제가 '군인으로서 봉사하고 있다'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거친 것을 부드렵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완료시상으로 한다.  그들 모두가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이끌어 온 세 가지 비교의 용법을 계속하기 위하여 바울은 만일 그가 원하기만 하면 교회가 지불하는 내용으로 그가 살아가는 것이 아주 순리적인 일이라고 확언하고 있으며, 그는 정상적인 인간의 생각(humanitas)이 요구하는 것보다 스스로 선포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 첫째는 군대 법칙에서 이끌어 왔는데 , 왜냐하면 군인들은 통상적으로 공공비 용으로 그들의 양식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포도원 원정(園丁)에 기원하고 있는데 원정은 포도를 재미로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얻으려고 가꾸기 때문이다.

 

세째로는 양치는 사람으로부터 이끌어 왔는데 , 목부(牧夫)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양을 치는 것이·아니라, 양때의 젖을 즐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에게서 나오는 소출이 그를 유지하여 주는 것이다:  자연적인 정의가 일하는 가장 훌륭한 길로서 이것을 제시하여 줄 때에, 누가 교회의 목자에게 생활 필수품 제공을 부정하는그런 부당함을 범할 것인가? 그러나 예를 들면, 어떤 로마 사람들이 공물과 세금을 바치기 전 시대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만일 그것이 어떤 사람들이 자비(自備)로 군인으로서 봉사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공통적이고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관습으로부터 논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8~~9절.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관계되는 한, 그것은 아주 다론 문제라는 말을 확신하기를 거부할지도 모르는 경우에, 또 그래서 바울이 그런 많은 직유(直"lfi)를 소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 그는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사람의 예(例)대로 말한다는 것은 로마서 3장5절에 나타난 것처럼 때로는육체의 잘못된 이해력을 따라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오로지 인간들이 친숙한 그런 일들만을 취급히는 것이며, 그것들은--사람둘이 말하듯이-- 인간의 시정에서만 유효한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온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들이 그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 임금을 받기를 원하신 것이었다. 바울은 소가 곡식을 밟아 떨 때에 그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하나남의 말씀으로부터 증명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그가 다루고 있는 상황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소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시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로, 율법서를 예를 둘떤 신명기 24장 15절에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는 말씀과 갈이 그가 이용할 수 있는 더 분명한 예증들이 많이 있는데 왜 바울은 이 말씀을 륙별히 선택하려 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이 말씀에 더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면 이 말씀 속에 더 큰 위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가축에 대히여 관심을 기울이라고 말씀하셨다면 보잘것없는 것에서 더 중요한 것을 추리해 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기에서 말 못하는 짐승을 소중히 대하라고 하셨을 때, 인간을 대하는 데 있어서 상호간에 더 중요하게 대하라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그가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바울의·관심이 하나님의 섭리가 소둘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인 양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극히 작은 참새 한 마리에게도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는 바울이 계명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려 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천박한 사람들이 모든것을 비유로 전판하는 구실로 삼아서, 그들은 개를 사람으로, 나무를 천사로, 그리고 성경 전체를 즐거운 게임으로 개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즉 아무리 하나님께서 소들에 대하여 생각하실지라도, 그는 소들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인간둘을 더 위하고 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는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를 취급하는 인간의 태도가 언간 상호간에 서로 생각하고 공정하게 대하도록 자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홀은 잔인이니라"라고 잠언 12장 10절에서 밝힌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율법을 만드셨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소는 오직 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그런 정도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생각하셨으며, 또 그는 인간들이 신중하계 행동하여 일꾼의 품삯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만드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소는 경작하는 일이나 곡식을 떠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하지 못하고, 인간이 하며, 소가 일을하게 하는 것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밭 가는자는 소망(所望)을 가지고 갈며" 라고 그가 덧붙인 것은 계명의 해석으로 그것은 그가 일반적인 방법으로써, 근로에 대한 어떤 보상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갈다.

 

"10.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헬라어 사본에서는, 이 귀절에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그러나 내가 취하려는하나는 더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으로써, ‘곡식 떠는 자는 자기에게 돌아 올 몫을 바라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두번째 절에서  ‘소망' 이란 말을 두번 사용하지 않은 독법이 더 간단하고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러므로 내가 선택한다면 나는 그것을 이렇게 하겠다. 즉  ‘발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곡식 떠는 자는 분배의 소망을 가지라.' 그러나 거의 모든 헬라어 사본이 처음 독법(讀法)에 따르고 있으며, 그 의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므로, 나는 굳이 그것을 반대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9절에 인용한 계명을 설명하고 있으며, 또 그 관계에서 농부가 경작을 하고도 추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농부가 수고하는 모든 목적은 열매를 거두려는 소망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경우 그것을 더우기 소들에게 적용하는 추리는 옳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것을 더 광범위한 영역으로 적용시키고 또 특히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제 농부는 그가 추수한 소산물을 얻었을 때, ‘소망에 참여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위하여 발을 갈 때 분명히 소망하였다.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 즉~~~~" ; . 주저할 한 가지 근거가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생활에 관계되는모든 일은 아주 분명히 음식물과 의복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반대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밭가는 것과 곡식 떠는 것은 보상을 받으며, 실제로 수고한 사람이 그 몫을 얻게 된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그 영역이 다르다. 왜냐하면 그 열매가 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의 수고에 대한 보수로서 결실을 원한다면 말씀의 사역자는 어떤 물질적인 것을 요구하여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지 몰라서, 바울은 더 중요한 것으로부터 그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려 하였을지 모른다. ‘음식물과 의복이 복음 사역과는 다른 범주에 속할지라도, 만일 당신이 대단히 값싸고 쓸모없는 무가치한 어떤 것을 위하여 값을 지불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잃는 고통을 감내할것인가? 본질적으로 영혼이 육체보다 더 소중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인 음식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12. 다른 이들도~~~~~.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  다시 한번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서 자신의 권리률 나타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권리로 주장하는 것을 왜 홀로 바울만이 거절해야 하는 것일까?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의 그 누구도 그보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은 없으며 아무도 그보다 상을 더 받을 만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가 한 일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발적으로 권리 사용을 삼가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그의 권리로 무엇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 그는 이제 사건의 핵심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무도 그에게 금할 수 없는 자신의 권리를 자신의 자유 의사로 복음 확장에 장애가 될지도 모르는 그런 자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즉 그는 신의 자유를 만끽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유의 향유를 인내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의 본을 따르게 하기 위하여 그둘 앞에서 이 목표를 설정하여서 복음의 길에 장애물을 두지 않았으며, 또는 복음의 발전을 저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편에서는 바울이 행한 것을 그둘도 행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전에 말한 것 , 곧 우리는 무엇이 최대의 유익인지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13. 성전의~~~~~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그가 논하고 있는 주제를 떠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적절하게 받아야 할 칭호를 부당하게 하는 그들의 비열한 태도를 간접적으로 꾸짖기 위해서 바울은 이 점에 대한 논의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만일 바울이 자원하여 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다면, 복음의 길이 방해를 받을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미 그렇게 되고 있었던 망은(忘恩)이 그들의 잘못된 해석에 대한 방법을 분명히 밝혀주지 않았다면, 거짓 선지자들은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물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용감하게 배격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극단적인 경솔은 나타내어 만일 바울이 그의 권리의 유익을 취하였다면 그들은 바울을 곧 배반하였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그런 멸시와 사도들에 대한 인식 부족은 이 보다도 더 큰 책망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언급할 다론 기회를 찾으면서 바울은 그들을 모욕하지 않고 권고하기 위하여 사실상 그의 일상적인 중용의 태도로서 그렇게 년지시 그리고 부드럽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리를 그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른 직유(直哈)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실례들을 다론 출처에서 이끌어내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이 그둘의 교역자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귀절에는 실제로 두 가지 비교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

 

그 첫째는 참으로 하나님의 성직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그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갈은 일을 묘사하기 위하여 다른 용어를·사용하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방 풍속에서 기원된 논법은 확실히 빈약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제들의 수입온 음식물이나 의복같은 것이 이니었고, 값 비싼 가구와 제왕 같은 호화로움, 그리고 극도의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무엇이나 성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바울이·다른 종류의 성직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그 견해를 힐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더 높은 계급의 사제들이 있었으며, 그 후에는 그들보다 낮은 잘 알려진 레위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요점은·아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갈다;  즉 레위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교회의 교역자들이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사역으로부터 생활 필수품을 공급 받도록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정당의 원리가 오늘날 그리스도인 교회의 사역자들에게도 적용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교회의 사역자둘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이귀절은 교회 법학자들에 의하여 인용되었는데, 굶주린 사람들이 그들의 희생 울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을 때 교회법학자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바로 그 자녀들이 결정하도록 남겨둔다. 이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교역자들은 생활비를 공급받아야 한다거나, 혹은 그들이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어떤 것을 곧 포착하여서는 그것을 그들 자 신에게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나의 독자둘이 바울이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독려 하는 것이다. 그의 논증은 복음을 선포하는 책임을 진 목회자들에게 생활을 유지시켜 주어야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제사장들에게 생활비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고 오래 전에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옛날의 사제직과 오늘 우리 시대의 그것 사이에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율법 아래 있던 당시의 제사장들은 재물을 드리는 책임과 재단을 섬기고, 성막과 성전을 돌보는 책임을 맡았으며, 오늘의 성직자들은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베푸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성칙 수행을 위하여 오늘의 성칙자둘이 자신 스스로 제물을 사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으며, 또한 그들이 제물을 드려야 할 제단도 오늘날에는 없다. 희생제물로부터 이끌어 온 이 유추법을 복음을 설교하는 일보다 다른 것에 적용하는 사람둘은 분명히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것보다 더한 것은, 로마교 사제들이(한 우두머리로부터 중요하지 않는 구성원에 이르기까지) 성전 강도들(sacrz'legos)이라는 사실을 이 귀절로부터 쉽게 추리하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직자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는 이행하지도 않으면서 순수한 성직자들이 받아야 할 보수만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역자둘에게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고 바울사도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그런 사역자들을 보조하여야 하는 것이다. 무슨 권리로 로마교 사제들이 성직자들에게 베풀어져야 할 보수를 자신들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있는가?  그 대답온 그들이 기도문을 읊고 제물올 드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떤 일들도 그둘에게 요구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수를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레위 제사장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자''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라고 말하였을 때, 그는 환유법(換哈法)을 사용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짐승의 제물은 온전히 자신들의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덜 중요한 재물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른쪽 어깨, 신장, 꼬리, 또한 십일조, 재물, 그리고 첫 수확물 등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에 있어서 두번째의 '히에론'은 성전율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