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성경 주석/이사야서

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사7:16)

1. 성경 (사7:1 ~ 17)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1) 어떤 사람이 다윗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4)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5)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6)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7)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8)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99)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1)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2)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영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13)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5) 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16)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17)

 

2. 받은은혜

아하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서 은총가운데 있었으면서도 불신앙의 태도를 보인다.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500년 후에 오실 메시야의 예연과 더블어 신약시대를 바라보게하는 소망의 말씀과 더블어 당시의 풍전등화와 같았던 국제상황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를 확증해 주는 당시에 태어나는 아이가 악을 버이며 선을 택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될것을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 하신것이다(Calvin선생 주석) 오늘을 사는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읗 신뢰하며 믿음으로 전진해야 함을 오늘의 본문은 깨닫게 한다.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믿지 못하는 아하스에게 오죽했으면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을까?   신자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고,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전진하며 믿음의 길을 가야 한다.

 

3. 묵상 (박윤선박사주석)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예언은 역사성(歷史性)을 지니고 있어서 그 시대의 경계선을  언제나 명확히 한다.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 계시는, 이교(異敎) 종교의 공환(空幻)과  달라서 그 때의 연대적 위치를 여러가지로 보여주고 있다.    "올라와서"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 알라(*      )는, 전쟁하기 위하여 올라옴을  의미한다.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예루살렘을 친 사실은, 왕하 16:5에도 기록되어  있다.

 

"2.  혹이 다윗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  - 여기 이른바, "다윗집"이라는 것은 유다 왕 아하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람"과 "에브라임"(북국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공격에 실패를 본 후 이제 다시 공세(攻勢)를 취하기 위하여  동맹(同盟)하였다. 왕하 16:5;대하 28장 참조. "동맹"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나카(*      )이니 새들의 무리나 메뚜기의 떼가 모임 같이, 어떤 나라의 군대가 다른 나라의  군대를 돕기 위하여 서로 집결(集結)해 있음을 이름이다(삼하 8:5,10:10,14:15,18).  이렇게 두 나라가 동맹하였다는 사실이 아하스에게 보도되매 그와 그 백성은 극도로  겁약하게 되었으며 동요(動搖)되었다. 여기 이른바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고 한 것은, 그의 마음이 극도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당황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이것은 물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 세력만 의지하던 자들이, 그 세력을  잃어 버릴 때에 가져지는 심리(心理)이다.

 

"3절" : .  여기 이른바 "스알야숩"(*               )은, 히브리 말의  음역(音譯)이니  남은자가 돌아온다는 뜻이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일시 환난을 당하는 하나님 백성이 가질 수 있는 소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이 일시 동안 징벌을 받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은 그 정화(淨化)된 분자들이 구원을 받고야 만다.   이사야가 곤난 중에 빠진 유다 민족에게 구원의 위로를 주기  위하여,  자기  아들 "스알 야숩"을 데리고 아하스를 만나도록 되어 있다. 그 당시에 유다  민족이  환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 만큼, 걱정할 것이 없음을 이사야는  경고하게 되어 있다.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 -  여기 "삼가며 종용하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히쏴메르 웨하쉬케트(*  )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를 지켜 고요히 하나님께 부착(附着)함을 가리킨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조절하기 어렵다. 그러나 힘쓰면 된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서 마음이 지켜진다. 가령 사람이 남을 비평하면 남에게 대한 증오감이  일어나지만 같은 사람에게 대하여서도 좋은 말을 하면 그 사람에게 대한 호감(好感)이 생긴다.   위경(危境)에 빠진 아하스는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적(敵)의  세력을 보고 당황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할 것이다.


   "종용"함은 신앙 생활의 특징이다. 갈릴리 바다에 바람이 종종  일어남같이,  우리마음에 죄악 바람이 자주자주 일어나면 믿음이 보존될 수 없다.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라는 말은, 위의 두 왕이 동맹하였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지 않을 것인 만큼, 그들은 큰 불을 부칠것 같은 허세(虛勢)만 보이는  의미에서 연기를 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끝) 같아서 별로 큰 불을 가지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들을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한다. "두려워 말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보다 그것을 능력 있게 보는 우상 숭배의 심리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죄중 첫째로 꼽힌다(계 21:8).


   "낙심치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명심해야 된다. 이 세상에는  인생에게  부딛치는 많은 파도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을 믿음으로 이긴다고 하였다(요일5:4,5). 비유컨대, 바다 위를 배가 무사히 통과하는 것은, 그 배가 바다의 힘과  같은 큰 힘을 가진 까닭은 아니다. 그 바다에서 능히 항해(航海)할 수 있게  하는  장비(裝備) 때문이다. 그 배에는 부력(浮力)이 있고, 지남침(指南針)이 있고, 푸로펠라가  있다. 그와 같이 사람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대로 가면 세상을 이긴다. 따라서  그는 낙심하지 않는다.

 

"5~6절";   "아람과 에브라임"(북국 이스라엘)이 유다를 "대적"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한 것과 같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백성(유다 나라)을 침략할 의도(意圖)를 가졌기 때문이다.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여기 "곤하게 하고"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 =네키츠)는, "놀라게 함"을 의미한다. "그것을 파하고"라는 말(*  =나브키엔나)은, 요새(要塞)와 같은 지대를 파열(破裂)시키고 뚫고 들어감을 이름이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 왕으로 세우고저 하였는데,  "다브엘의 아들"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에브라임 나라와 친한 유다 사람인 듯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 아닌 것을 강행(强行)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사람을 향한 일이라 할찌라도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꾀가 된다.

 

"7-9절" ;   사람들이 아무리 강한 세력을 가지고 꾀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세워주시지 아니하시면 이루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아람과 에브라임은 유다를 침략하여 저희의 국경을  넓히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국경이 저희의 마음대로 폐지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말씀하시기를,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라고 하였다.  곧,"아람"의 수도(首都)는 "다메섹"인 것만큼 언제나 다메섹일 것이고, 그 이상  영토(領土)를 확장하여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르신"은 "다메섹의 머리"(王)가 될 뿐이요 예루살렘의 머리는 될 수 없다. 또한 "에브라임"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에브라임의 머리(首都)는 사마리아요" 그이상 더 클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르말리야의 아들"은 사마리아의 머리(王)가 될 뿐이요 예루살렘의 머리는 될 수 없다.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하였는데  이 말씀은 후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곧, 이 예언을 하던 해인 아하스 2년에서  므낫세왕 22년까지 65년인데(대하 33:11), 므낫세왕 22년에 앗수르 왕 에살하돈이  에브라임을 침략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곧, 유다  왕  아하스와 그 백성이 이사야의 이 예언을 믿지 않으면 실패를 보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이 예언을 믿고 하나님께 귀속(歸屬)하면 장차 타국의 침해를 받지  않으려니와, 만일 그들이 이 예언을 믿지 못하고 앗수르를 믿어 그 원조를 의뢰(依賴)하면 그 앗수르로 말미암아 유다가 실패 볼 것을 의미한다.

 

 "10~11절" ;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아하스"가 아람과 에브라임을 두려워할 것 없고 따라서 앗수르의 군사적 원조(軍事的援助)를 의지할 필요 없이 다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태세를 갖추기 원하신다. 구약 시대에 유다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달리 여호와를  의지하므로  잘 되어 가도록 된 것이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의 교회와 꼭 같은 처지에 있었다. 그것은 이런 의미에서는 교회의 그림자였다.   하나님께선 유다 나라가 여호와를 믿는 신앙에 확고히 서는 것을 간절히  원하셔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다. "징조"(*      =오드)라는 것은 어떤 이적(異蹟)이거나 예언이거나 상징적 행위를 가리킨다(Alexander). "징조"를 구하는 것은  일반적  고상한 신앙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유치한 자들에게 한하여  그것을  구하라고
하실 경우도 있는 고로,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아하스더러 그것을 구하라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아하스의 불신앙이 너무도 심하였던 고로 그에게 신앙을 발생시키기  위하여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다.

 

"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  - 여기서 "아하스"는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 신앙이 있는듯이  경건(敬虔)한 모양을 낸다. 곧, 그는 모처럼 하나님께서 저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에 응하지 않고 자기가 오히려 하나님보다 지혜 있는 듯이  처신(處身)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그가 그렇게 아니하겠다는 이유로서는, 징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 하면서 징조를 구함이다. 아하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참으로 가증(可憎)스럽다. 그는 벌써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앗수르를 믿는데 있어서, 굳어졌다. 그가 그리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잘 믿는 자인 듯이 징조도 구하지 않겠다고 경건한 모양을 나타낸다.

 

 "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찌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 여기 이른바 "다윗의 집"이라는 말은, 다윗의 계통을 이어 왕으로 있는 아하스를 가리킨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한다는 말씀은, 그 임금들이 일찍부터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므로 그를 괴롭게 한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 "작은 일로  여겨서"(*         =메아트  미켐)는, "너의 보기에 작은 일로 여겨서"란 뜻이다. 그러므로 저희가 그렇게  "사람(선지자)을 괴롭게"한 것은 실상 큰 죄악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나님께서  아하스더러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으나 그것마저 간교하게 순종하지 않았으니 이는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는 큰 죄악이다.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 아하스가 징조 구하기를 거절하매 하나님께서는 기정 방침(旣定方針)대로 징조(徵兆)를 주시겠다고 여기  말씀하신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란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해석이 몇  가지 따른다. (1)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되실 마리아에게서 될 일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다만  이사야  당시에  있었던  어떤  처녀에게서  될  일을  가리켰다고  하며(Isenbiehl, Bauer, Cube, Steudel), (2)또 다른이들은 말하기를 여기 "처녀"는  실제적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假想的)으로 언급(言及)되었다 하고, 그런 가상적 인물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어머니 아버지를 찾을 때 즈음하여 아람과 에브라임이 패배(敗北)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Eichhorn, Paulus, Henslen, Ammon). (3)여기 "처녀"라는 말은, 히스기야왕의 어머니를 의미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사야가 이 예언을 할 때에 히스기야는 벌써 9살 되었겠으니 이 학설은 성립될 수 없다. (4)또 다른 학자들은,여기 "처녀"라는 말이 이사야의 아내를 가리켰다고 하나, 이 때에 이사야에게는  벌써 아들이 있었으니 어떻게 이 해석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


   이상의 모든 해석은, 이 말씀에 대한 사도적 해석(使徒的解釋)을 그대로 받지 않은 잘못이다. 마태는 이 귀절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으로  해석하였다(마1:22,23). 그런데 이제 문제는, 여기 있는, "처녀"라는 말이다. 여기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알마(*        )니 트리보(Trypho)와 킴키(Kimchi)의 잘못된  말에 의하면, 이것이 그저 젊은 여자라는 의미를 가질 뿐이라고 한다. 설혹 이것이 젊은 여자라는 의미만을 가진다 하더라도 처녀를 의미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는, 이 말이 젊은 여자를 의미하면서도 결혼한 젊은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고조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는 알마(*        )라는 말이, 구약에서 흔히 처녀를 의미하는데  있어서 다른 말 베툴라(*          )보다도 전문적으로 사용된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


사람들이 흔히 잘못 말하기를, 히브리 원어에서 특히 베툴리는 처녀를 가리키는  전용 술어(專用述語)인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正反對)이다.  베툴라보다도 알마(*        )가 처녀를 가리키는 전용 술어이다(출 2:8). 특별히 창 24장에서 리브가를 가리켜 거듭 거듭 알마(*        )라고 하였다. 우리는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곧, 70인역(LXX)에서 이 말을 헬라어 팔데노스(*                =처녀를 의미함)로 번역된 사실과 및 사도 마태가 그것을 그대로 인용한 사실에서 히브리어 알마(* )가 처녀에 대한 전문 술어인 것을 결론한다.

 

"15~16절.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 이 두 귀절의 말씀은, 위에 관설된 임마누엘 아이의 영아 시대가  끝나자말자  유대민족이 미워하는 두 왕(아람과 에브라임의 두 왕권)이 폐한바 되리라는 것이다. 이 일은 아하스왕 때(곧, 이사야의 때)에 될 것이다. 왕하 16:9-17:6 참조.   그렇다면 임마누엘 아이가 아하스 시대에 날 것을 14절에서 의미하지  않았을까  ?


그것은 그렇지 않다. 임마누엘 출생은, 이사야 시대부터 800여년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할 뿐이다. 이사야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 할 때에  여기서 이중(二重) 의미를 가진 술어(述語)로 사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곧, 임마누엘이란  말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멀리 가리키는 동시에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기도 하였다(사 8:8,66:7-14). 그리고 15절에서부터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는 말씀은, 역시 동일한 임마누엘을 염두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유다 백성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15절에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지 않고 다만 아이로 비유된 하나님 백성을 생각한다. 임마누엘 아이로 비유된 하나님 백성은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다. 사 8:8 참조. "그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는 뜻은, "때에 미쳐(*  =레)"란 말을 "때까지"로 번역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가 영아 시대의 끝나기까지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뻐터와 꿀을 먹은 것은, 북쪽 나라 이스라엘과  및 아람의 침략으로 인하여 땅이 황폐된 까닭이었다. 22절 참조. 그 아이의 영아  시대가 끝날 때는 전쟁으로 말미암은 황폐가 끝날 것이라고 여기 말하였으니 그 이유는 그 아이의 영아 시대가 끝나기 전에 유다의 미워하는 두 왕국(에브라임과 아람)이 그  이상 유다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앗수르의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왕하 16:9-17:6 참조.

 

"17절 " ;    이 귀절 말씀은, 이스라엘이 남북국으로 갈라진 이후 일찌기 당해보지 못한 큰  환난이 앞에 있으리라고 한다. 그것은 곧, 앗수르가 유다를 침략할 사실이다. 사  36,37장;대하 36:7-22 참조.    이사야는 믿음이 없는 아하스로 하여금 먼 장래에 임하실 그리스도를 관망(觀望)하게 하였다(14절).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가장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만 이루어지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현재부터 유대 민족이 당할 일은  거듭거듭 환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만  있나니 사실상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바라볼 것이 없다. 그들도 땅 위에서 가끔 가끔  환난을 면하는 때도 있고 소강 상태(少康狀態)의 평안한 시대를 만나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눈떠 보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궁극적인 구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지닐 수 있는 평강을 사모해야만 된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과 기타 족장들이 그 나온바  고향을 사모하지 않고 땅에서는 외국인과 같이 나그네로 지내면서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한 것과 같다(히 11: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