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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주석/이사야서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6:8)

1. 성경 (사6:1 ~ 8)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1)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2)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3)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4)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5)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7)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8) 

 

2. 묵상 (Calvin 선생주석)

"1.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이 귀절은 6장의 시작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귀절이  이 책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이사야의 예언을 편집하면서 하나의 과오가 저질러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다. 여기서 이 선지자는 교사의 직임을 사양하는데, 만일 그가 지금까지 그 직임을 이행해 왔다면 지금 그것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아직 부르심을 알지 못한 단순히 초신자인 것같이 보이며 그는 지금 여호와를 보게되었고 전에는 뵌 적이 없었다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러한 논거는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너무 약하고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그가 자신이 선지자임을 잊어버린 만큼 이 특별한 현상에 의해 완전히 압도되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의 감정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시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자기의 지각을 잃은 사람처럼 그는 스스로 어둠을 향하여 자신을 내던졌다기 보다는 생명을 포기한 사람치럽 스스로 죽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은 주께서 그들이 낮아지고 완전히 깨지도록 자기 임재의 표징을 주실 때 이와 갈은 모습으로 감동되는 것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이 보는 데서 그 반역하는 백성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으로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무서움을 당하고 찬란하게 보여진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나서. 지금 그가 느끼는 것만큼 자기 직무의 중대성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여 변명하는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는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환상이 그에게 시초에 보여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었이었는가?  나는 그가 그의 직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점점 더 확고한 사람이 되도록 그 시간에 연관하여 꼭 그렇게 되었어야 했다고 답하고 싶다. 우리는 이러한 선례를 사도들에게서  찻아볼 수 있다.  처음에 그들은 유다의 경계를 넘지 말라는 밍령과 함께 파송되있다(마10:5). 그러나 그리스도께시 부활하신 다음에 주께서는 그들을 새롭고 엄숙한 방법으로 구별하여 세우셨다.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 20 : 22)" 라고 말씀하셨으며 불의 혀같이 갈라진 모습으로 자기의 엉을 하늘로부다 보내서서 특별한 능력을 그들 속에 넣어 주셨다(행 2 : 3). 이와 같이 여러 시대의 변천과정이 바뀐  이유로 이사야는 용기를 얻어야 했고 새로운 환상으로 다시 가기 소명에 대한 중거를 얻어야 했다.  이는 그가 참기 위하여 새 힘을 얻고 그의 길을 더 큼 담력으로 전진해 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이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가 붙들어 주고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것이 시초에 환상이 그에게 나타나지 않고 그가 교사로서의 직무를 얼마동안 이행한 뒤에 나타났던 이유로써 충분하다고 본다. 이 사건이 그의 예언의 시각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머리말이 본서의 시각으로서는 훨씬 잘 어울리며 본장에 있는 것이 보다 더욱 적합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도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일단 시작했던 모든 방법을 그들이 심히 완고한 마읍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는 이 강렬한 방법에 의해 힘차게 나가야 했던 것은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이 예언이 선포되기 전에 사망했다고 생각되는 옷시야왕의 다스림 아래서 그가 교사로서의 직임을 오랫동안 이행했었으리라는 사실은 있을 법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선지자가 자신의 직무를 시작하여 계속 수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에개 나타났다는 사신을 의미한다.

 

어연 사람은 본문이 말하는 ‘죽음’이 문둥병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왕이 사람들의 사회에서 쫓겨나 다스리는 권세를  포기해야 했을 때(왕하15 : 5) 그는 공민권의 생명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죽음율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이사야가 이전에 했던 예인은 옷시야왕이 다스릴 때와 그가 문둥병에 걸린 후에도 계속했던 것이라고 성각한다. 그리고 그가 사망하자 요담이 그의 뒤를 이이었는데, 그때에 이 환상이 이사야에개 이미 나타났었다고 생 각한다.  왕들이 바뀜으로써 여러가지 소동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사야가 자기의 소명을 다시 확인 받는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곧 이어 기록되어 있는 예언 자체가 그가 주를 뵙기 전 어느 기간 동안 대중을 위한 교사로 있었음을 충분히 말해 준다.  왜냐하면 예언의 말씀은 그 백성의 눈이 멀었음을 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경험했던 그들의 고집은 대단하여 그는 자기가 하려던 것을 그만두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뻔 하였다.  그는 자기가 아무런 성과 없이 일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반대가 있더라도 그가 그의 직무를 용감하게 이행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가 하려 하였던 일을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뭇알 것을 이 환상으로 그에게 확신시키신다. 

 

"내가 본즉 주께서~~~~~~" ; 영이시기 때문에 (요 4 : 24)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이사야가 어떻게 볼 수 있었을는지 의문이 생긴다. 더우기 인간이 가진 이해력은 그의 무한히 높으신 존재에 이를 수가 없다. 그렵다면 그가 보이는 모습으르 보여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곧, 하나님께서 조상들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그분께서는 자기 실재 그대로가 아닌 사람들의 이해 능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땅 위를 기어다닌다. 최소한 하늘 저 아래서 산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거울이 그의 영광의 광체를 반영하게 하는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내려오신다고 생각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사야에게는 그의 능력에 맞추어 하나님의 그 상상할 수 없는 위엄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보좌". "옷자락",  그리고 형체를 갖춘 의모를 하나닙의 모습처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유익한 교운을 얻는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임재에 대한 어떤 표적을 허락하실 떼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는 우리와 합께 계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안에 따라시 그를 악하게 손상하듯이 부질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속이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나타내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입재에 대한 기만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기 뻬문에 이사야는 자기가 주를 보았다고 당당하게 선언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요1 :32)" 라고 말했을 때, 성령의 명칭이 외적 표적에 시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모습을 나아내 보임에는 속임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영의 본질을 본 것은 아니다. 단지 선명하고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갖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 위에 머무셨음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그 주는 누구였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요한은 그분이 그리스도였다고 우리에게  말한다(요 12 : 41). 그리고 그의 말은 옳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말씀과 독생자 외에는 조상들에게 자신을 결코 나타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어떤 이들이 그렇게 하듯이 이분을 그리스도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오 히려 이 선지자가 그를 막연히 하나님이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는 특히 그리스도깨 적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아도나이 ;주' 라는 말로부터도 어떤 지지를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말이 때로는 절대적이면서도 한정되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께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는 하나님이 비한정적으로 언급되었다.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 확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시간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 이셨기 때문이다. 

 

"보좌에 앉으셨는데" ;  그는 하나님의 신분에 대하여 재판자보다 더 나은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위엄이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더욱 큰 두려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주께서 그의 심판대로부터 내리시는 그 두려운 심판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선지자는 하나님을 과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고 생각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 주시고 보여주신 바로 그 모습을 성실하게  묘사함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선지자가 성전으로 이끌려 갔었는지 혹은 미몽 사몽간에 이 환상을 보았는지는 의문스럽다. 어느 쪽이든 그것을 증명 할 만한 여러 가지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명도 이 사실을 여전히 의문 중에 남겨 둘 뿐이다. 그가 성전 안에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집안에서나 들판에서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그러했었던 것 같이 이 환상은 그에게 나타날 것이라는 어떤 가능성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莊 1)." ;  이 말은 그의 십판대의 꿉운 가리키며 그것의 크기논 성전의 구서까지 미칠 만뭉 망대하다는 사실을 알게 빼 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둘은” 이 말이 하나닙의 옷자막을 의미안다고 안고 있다. 그는 인간의 어떤· 모순윤 훨씬 넘어선 어떤 장업한 면모를 하나 님께서 갖고 계십윤 의미한다. 하나님께시 "성전"에 나타나신 사실에는 중 대한 의미가있다. 왜냐하면 하나닙께서는 거기어1서 그의 며성을 만나 주 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분명히 말렸던 것같이 (왕상 8:30) 그 백성온 그곳에서 하나님의 웅답울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에 .관련된 이 모든 사실온 그둘이 베일 그 이틀을 부르고 :::L 둘이 자만심을 갖게 하는 그릇된 자신강을 그들 스스로 두는 하나닙끼1로부 터 왔옴윤 그 백성이 알게 하기 위하여 이 환상온 ‘성건에서’ 이 선지자에 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 말씀은· 죽을 수밖에 없는 어연 사람에의하여 선언 된 것이 아니타 그둘이 어떤 타무니없는 주칭율~:한 대면 언제나 구실로 오 만하게 내세우는 그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의 예언에 의 한 것이 었다. 이것을 그가 꽁꽁연하게 선포한 것은·이 말씀의 확실성울 중 명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 왜냐하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이 예 언은 달갑지 않게 들리 고 반발을 , 일으키 며 큰 확증을 필요로 할 것 이 기 때 문이다. 그리고 주께서 ‘그의 성전으로부터 혹은 그의 성소로부터’ 말씀 하셨다는 말은 선지자들에게는 혼한 말씀이다.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그는 하나님께서 충만한 위업과 영광으로 자기에게 나타나셨다고 선언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선지자는 이 천사들을 그들의 빛나는 상태 때문에 스랍이라고 부른다. 이 말의 어원은 잘 알려져있으나 그 어원에 대한 근거는 여러 가지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기 때문에 스랍으로 불려진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은 그들이 불치럼 빠르기 때문에 그리고 다론 이들은 그들이 찬란한 빛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생각한다. 근거야 어떻든지 간에 본문의 설명은 마치 태양광선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위엄의 광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기하고 압도적인 영광올 보고 찬양하기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많은사람들온 중거궤를 둘러싸는 그룹이 둘이었던 것같이 여기에도 두 명의 스랍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이 말하지 않온 데서 어떤 주장을 내세우려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서도 이 견해를 기꺼이 채택한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익숙하게 있려진 표지에다 그 설명을 적응시키는 것이 관례다. 그리므로 이 선지자가 이와 같은 식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나는 이 견해가 그런 듯하다고 주장은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다른 해석도 받아들일 마음의 여지를 갖는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두 천사만을 본 것이 아니라 수천의 천사를 보았기 때문이다(단7:10).

 

"각기 여섯 납개가 있어~~~~" ;  이 모습은 교훈적이다. 그처럼 갖추어졌던 그 날개는 어떤 신비를 간직하였다. 이 신비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지 않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었다. 그천사들이 난고 있었던 그  날개는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신속하게 기꺼이 이행함을 의미한다. 이 점에 있어서 학자들의 견해는 아주 명백하게 서로 같기 때문에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이를 즉시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이 얼굴을 가리였던 그 두 날개는 친사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 빛의 간탄함을 견디어낼 수 없으며 우리가 태양의 광채를 바라보려할 때 그런 것 같이 그들의 눈이 부시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위엄 및에서 이처럼 압도당한다면 만일 사람들이 감히 그 위엄 앞에 나갈 때 그들은 얼마나 더 빨리 압도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바르고 합당한 한계를 결코 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자. 우리는 지식을 통하여 우리 능력의 한계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것을 진지하고 겸손하게 맛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천사들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받지 못할 만큼 그들의 얼굴을 가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부로 날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능력에 따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


아래쪽에 위치한 그 나머지 두 날개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더욱 어렵다.  어떤 사람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늘 그렇게 하듯이 그들이 땅을 디딤으로써 어떤 더러운 것에 닿지 않도록 천사들은 '그들의 발을 덮었다'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걸을 때 우리는 발에 더러운 것과 먼지를 묻히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땅에 사는 동안에는 언제나 어떤 감염에 의하여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높이 들려서 다시는 땅에 붙들리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천사들과 교제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어떤 주석가에 의한 설명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아래에 위치한 날개들의 사용은 위에 위치한 날개들의 그것과는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와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빛난 광채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기 위하여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우리들의 눈으로부터 자신들을 감추기 위하여 아래에 위치한
날개를 가지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빛나는 광채 중에 작고 약한 광선만 보아도 압도된다면 우리의 정신
모두를 뒤잎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밝고 영광스러운 위엄을 어떻게 바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  이처럼 사람들은 친사들에게도 가까이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율 온전히 아는 지식에는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음을 알도록 하자. 이
해설이 더욱 정확한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위에서 말한 해설도 틀린다고 보지는 않는다.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더욱 강력한 인상율 그 백성과 이사야 자신에게 주기 위하여 이 모든 상황은 환상 중에 이 선지자에게 보여져야 했다. 사실 그 환상은 모든 백성에게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필요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앞에는 심하고 고통스러운 싸움이 그룹 기다렸으며 그가 우선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그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백성 역시 최에 대한 이러한 선고를 내리신 하나님의 위업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지에 대해 이와 같은 환상을 통하여 경고률 받으므로써 크게 놀랄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되었다. 지금 대중의 눈앞에 나타나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천사들도 멀며 그룹 향하여 끊임없이 큰 소리로 찬양한다. 그리고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복종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자기의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도 그를 향하여 고집을 부리고 거스르면서 반항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일에 사용되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보여주는 모범은 우리가 본받기 위한 것임을 알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봉사는 그의 이름율 찬양하는 일에 우리의 몸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천사들과 연관시킨다. 이는 우리가 땅 위에 머무는 동안에 하늘에 있는 자들울 닮고 그들과 행동율 함께 하기 위해서다. 우리와 천사들과외 조화가 모든 면에서 완전하도록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우리의 혀에서 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의 온갖 행위가 우리가 하는 고백과 임치되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우리 행위의 주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  옛사람들은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세 위가 계심을 증명하고자 한 때에 이 귀절을 인용했다. 나는  그들의 견해를 틀리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단들과 씨위야 했다면 나는 더욱 강력한 증거를 사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확정적인 것이 못되는 논증을 할 때 그들은 더욱 강팍해지고 의기양양해지기 때문이다. 그비고 이 귀절에서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셋'이란 수가 '완전'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쉽게 주저 없이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천사들이 심위로 계시는 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음을 의심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찬양을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친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믿음의 조항을 증명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단자들의 비난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는 더욱 결정적인 귀절을 인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말의 반복은 지칠줄  모르는 참을성을 지적해 준다. 이 선지자는 그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노래의 가락을 그치지 않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가 그를 찬양할 이유를 끝없이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그 영핍이 온 땅에 충민하도다." ;  이 귀절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온 땅의 충만'이다. 이 말은 실과와 동물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부요케 해 주심으로 밀미암은 여러가지 풍부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세계를 장식하는 것과 세계의 매우 다양한 물질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심히 많은 증거물이기 때문에 그것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빛난다는 의미를 전해 준다. 그리나 더욱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계를 꽉 채운다' 혹은 '하나님의 영광은 땅의 모든 지역에 미쳐 있다'이다. 나는 이 말씀에 하나의 암시된 대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대조로써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들 외에는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영광을 자기들의 성전 안에 가두어 두고자 했던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자랑을 한마디도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영광이 그처럼 좁은 한계 안에 갇혀 있기는 커녕 "온 땅을 채운다고 말한다. 바로 뒤이어 나오는 예언(10절)은 이 말씀에 일치한다. 이 예인은 유대인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며 그들의 눈이 멂으로써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받아들여졌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유대인들이 버리고 빈 자리로 두었던 곳을 점유했던 것이다. 

 
"4. 문지방의 터가 요용하며" ;  이 요란한 소리는 이 신지자가 들었던 것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음을 암시해 준다. 왜나하면 어떤 사망이라도 "문 지방율 혼들 만큼의 힘 있는 목소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린데 여호와메시는 이 선지자를 향하여 자기  지닌 인위를 확신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권위문 세대마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확고히 하디는 의도를
갖고 계셨다. 그 권위는 진고 잊어서는 안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신 매면 언제나 우리가 무려운 마음을 갖도록  요란한 소리는 하나님의 읍성이었음을 오늘도 확중해 주고 있음을 안도록 하자. 생명이 없고 만을 못하는 피조물이 그 소리에 의해 멀렸다면 느낀  안고 냄새 맡고 맛율 보며 이해한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까 ? 이 소리에는
우리가 기록하고 공손한 대도로 그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깃 외에 다른 목적이란 없기 때문이다.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이는 여호와께서 옛난에 자기 백성에게 사용하 있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표징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세가 성막에  어잔 때면 언제나 "연기"가 그 안에 가득 차 백성들은 모세와 성막을 알아 볼 수 없었음을 성경에서 읽기 때문이다(33:9). 그러므로 이사야가 말하 하나님께서는 여느 때처럼 백성률 는 그 "연기"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에게 심판을 내민 때 자기 능력율 드러내십을 보이며 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외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표칙보다 이것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신 이유는 무엇인까? 이 의문은 무 가지로 대답한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사람들이 정당한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위엄을 알아 보려고 한 .때 그들의 무례함율 억제하려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이 점에서 거의 모든 사만은 지나치게 성급하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사망들은 자기들의
반 옆에 있는 것도 잔 알지 못하면서 구름 위에 율라 하나님의 비밀 속으로 침입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오의 미궁에 이르게 되며 그들의 마읍이 거기에 만뎌관계 된 때 거짓되고 형식적인 예배의 형태를 미하게 된다.왜냐하면 사만들이 하나님에 대한 잡못된 어떤 생각을 스스모 백하게 된 때 하나님을 거스며서는 과감히 나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만들모 하여금 그들의 인익함을수가 없는 것이다.깨닫게 하기 위하여 연기를 사용하신 데에는 그민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눈민고 어리시게 되는 것을 의도하시지는 련 교황주의자들이 단순성이라는 이용하에 감추고 있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 어리석유과 과오를 그들이 갖게 되기를 원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신 것을 넘어서 묻고 ~~ (작성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