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요17: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3)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4)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여러가지 위로를 제시하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고 계속 전진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면서 그는 그들에게 보다 나은 소망을 일깨워 주시며 그의 나라의 영광과 광채에 대해서 그들과 말씀을 나누셨다. 그리고 여기서는 손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있는데, 교의에 신령한 효력이 따르지 않을 경우 그것 자체로서는 싸늘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사들은 여기서, 그들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만 전념할 뿐 아니라 거기에 기도를 섞어서 그의 축복으로 그들의 일이 결실을 맺도록 해 주소서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해야 한다는 본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기도는 이것으로 그 가르침 자체가 확인될 뿐 아니라 그것이 제자들에게 충분한 권위를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서명과 같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상한 열정에 대한 표시이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마음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 있으며 인간들을 뒤로하고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점을 선언하신 셈이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보신것은 온 땅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갇혀 있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위엄이 주로 그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다. 손을 높이 쳐들고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곧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굼뜨고 우둔하며 그들의 지상적인 정신에 이끌려 내리막 길만 가고 있는 만큼 그들을 하나님께 올려 놓기 위해서는 그러한 각성 내지는 들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본받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의식에 표현 될 수 없는 만큼 마음속으로 우러 나오는 눈짓, 손짓, 혀의 동작, 그리고 기타 모든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세리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를 드렸으며(눅18:13) 여기에 기록된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비록 그가 자신의 죄악 때문에 당황한 나머지 겸손한 자세를 취했지만 그 겸손한 자세가 그로 하여금 자신 있게 용서를 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끄러워 할 일이 전혀 없었으므로 다르게 기도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가 아는대로 다윗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하여 기도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라를 영화롭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 주십사 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의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비록 그가 많은 기적과 온갖 종류의 일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되었지만 곧 이어서 있게 될 그의 영적 나라는 아직 희미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가까와 온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뿐이었는데 이것이 무슨 영광스러운 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죽음에서 우리는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감추어 지고 있는 무한한 영광을 본다고 대답하겠다. 즉 속죄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께 화해되고 저주가 도말되며 사단이 정복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그의 죽음이 하늘의 영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따라 예정된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는데 그가 여기서 말씀하시는 시간은 인간의 뜻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정해 놓으셨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쓸데 없는 말의 중언부언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하시는 가운데 자신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꼭 일어날 것을 바라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전부 잠들어 있다 해도, 아니 세상이 그를 대항해서 반기를 든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한번 작정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실천하시고야 마신다. 그러나 그가 약속하신 것을 그에게 다시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임무인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자극하는데 약속의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 이것은 그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광을 빛내는 것이 상호 연관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이유는 우리를 아버지에게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모든 존귀는 아버지의 존귀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증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귀절에서 어떤 위치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는 여기서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과 중보자로서의 그의 직무상 말씀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그의 영원한 신성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 그는 다시 그가 아버지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원한다고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다 구하는 그러한 자세보다 무분별한 일도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려 하는 것 이상의 것을 구하지 않는것이 기도의 일반적인 원칙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왕과 머리로 임명하셨을 때 그에게 허용하신 권위를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것의 목적이 그의 모든 백성에게 영생을 부여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권위를 받으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굴복해야 하는 것은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는데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종보다 더 귀한 것이 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순종이야말로 우리의 영생의 원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이 자기 손에 주어진 목적은 무분별하게 생명을 부여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다 . 그는 이 은혜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국한하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아버지께서는 버림받은 자들 또한 그에게 굴복하게 하지 않으셨는가 ? 여기에 대해서 나는,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그의 자신의 양무리에
하며 그는 이들의 목자로서 지켜 주신다고 대답하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만민에게 미치지만 연구원을 받는 자들은 목자의 음성에 기꺼이 순종하며 따르는 선택받은 자들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억지로 그를 순종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을 뿐이요 마지막 날에, 가서 그는 그들을 그의 철퇴로 진멸 하고야 마실 것이다.
”3 영생은 ~~~~~것이니이다” ; 이것은 그가 선 택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참된 지식으로 깨우치실 때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곧 그는 여기서 우리가 소망하는 생명의 결실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에 이르는 방법을 두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고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우리는 먼저 홀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죽음 가운데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일단 빛을 비추어 주시면 우리는 신앙으로 그를 소유 할 뿐 아니라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에 대한 지식을 가리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옮고 당연하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는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의도 하는 것은 어떤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꾸어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러한 것 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합병되고 신령한 입양과 하늘의 상속에 대한 참여자가 되는데 사실 이 정은 바로 이 믿음과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생생한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있는 만큼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라고 말씀 하신다. 아버지의 이름 을 먼저 놓는 것은 믿음의 순서 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곧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먼저 알고 다음에 그리스도를 안다는 식이 아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우라가 중보자의 중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유일한' 과 ' 참 ' 이 라는 두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먼저 믿음이 하나님과 인간의 헛된 착상을 구별하는 가운데 하나님만을 "한결같이 붙잡아야지 결코 비틀거리거나 방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둘째이유는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결합이나 불완전한.것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신앙이 오직 하나님으로만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들이 홀로 하나님이신 당신을 아는 것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빈약하다. 그 의미 는 '그들이 오직 당신만을 참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의 권리와 명칭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성부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도 적용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성령 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이 제기 될것이다 . 왜냐하면 오직 성부와 성자만 한 하나님이라면 성령은 그위 (rank)에서 제외 되는 것인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말씀하고 있는 방법에 유 의 한다던 해답은 간단하게 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수차에 걸쳐 지적한 바 있으므로 독자들은 지금쯤 거기에 익숙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능력, 본질; 그러고, 위엄을 지시 . 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해서 그가 과거에 구속자를 세상에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신격 (Godhead) 의 통일과 진실성이 발견되는 것은 그가 우리를 높은 곳에 올려 주려고 낮아지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게 되면 그의 신령한 위엄은 저절로 나타나며 우리는 그가 완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 께서 완전히 그 안에 계시다는 접을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성부의 신성 과 구별하는 사람 은 유일한 참 하나님 되시는 그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요 스스로 이상한 신을 고안해 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과 그가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라는 당부를 받고 있다. 하나님 께서는 그가 보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손을 쭉 뻗어 우리를 자신에게로 초청하신다.
인간이 단지 하나님 대한 무지 때문에 멸망한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당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 이외의 곳에서는 생명의 근원이 없으며 그에게서 소외된 사람들은 모두 생명을 박탈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않는 데서 오는 생각이다. 하나님께 가는 길이 믿음 이외에 따로 없다면 붙신앙은 우리를 사랑 가운데 가둘 것 뿐 이라는 것은 명백한 이치이다. 여기서 믿음 문제만 아니라면 의롭고 죄가 없는 사람들 인데 그들이 정죄 받는 것은 부당 하지 않느냐고 반박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곧, 인간들이 자신들의 본성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에게서는 올 바르다거나 진실한 것을 전혀 찾을 수없다,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는 지식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와진다 (글 8 ; 10).
이 세 조항을 중합해 보자, 첫째, 생명과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둘째, 모두가 그에게서 생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직무는 모두에게가 아니라 성부께서 그의 관리로 위임하신 선택자들에게만 생명을 주는 것이다: 세째, 이 생명은 신앙과 일치 하는 데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복음 의 신양을 일깨워 주는 자들에게 이것을 부여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조명의 은사와 하늘의 지혜는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라 선택자들에게 득유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복음이 모두에게 제공되는 것이 사실 이지만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만을 신왕으로 이끄시는 은밀하고 효과적인 가르침의 방법을 두고 말씀하고 있다.
“4 내가 이루어~~~~~영화롭게 하였사오니” ; 그의 가르칭과 기기적들을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 때 이것은 그에게 영광이 된다. 그 에게 주어진 일을 성취했다는 말씀은 그의 소명의 전 과정을 완 수 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그가 하늘의 영광으로 받아들여 질 때가 이제 무르 익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가르침의 직무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다른 부문도 여기에 포함 시키고 있다. 곧 그의 사역의 핵심 부문인 우리 모두의 죄를 속죄 할 그의 죽음의 제사도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죽음의 시각이 눈 앞에 다가와 있었으므로 그는 그것도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약 하자면 아버지께서 그에게 나라를 소유 하도록 보내실 것이 었다는 내용이다. 그의 과정을 다 마쳤기 때문에 그에게는 그가 지상에서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행한 모든 것에 대한 결실과 효력을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는 일 밖에 없었다. 바울의 말대로,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으며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 빌 2:?7,9).
“5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되시겠다는 말씀은 아버지게서 아무런 증인도 없이 은밀하게 그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려는 뜻에 서가 아니라, 하늘에 받아들여진 다음에 그가 그의 위엄과 능력을 영광스럽게 나타내어 모든 무릎이 그 앞에 절하게 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빌 2:10). 그러므로 이 절은 앞 절의 지상적이요 잠정적인 영광과 대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죄 에 대해서 죽으신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께 살아 계시다는 말로 써 그의 복된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는 바울의 가르침 그대로이다(롬 6:10)
. 이어서 그는 자기에게 생소한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 이니라 그의 육신의 모습을 통해서 창세 전의 모습 그대로 나타날 것을 원하고 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가 항상 지녔던 신령한 위엄 중보자의 신분 (Person)과 그가 지금까지 덧 입고 있는 인간의 육신 속에서 이제 드러날 것을 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일종의 신기한 또는 잠정적인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훌륭한 귀절이다. 곧 그의 영광이 영원 하다면 그 자신 또한 언제나 그렇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뜻이다. 더우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위와 성부의 위에 대한 명백한 구별이 제시 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영원한 하나님일뿐 아니라 만세 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남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추론 할 수 있다.
@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롬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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