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빌1:1 ~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3)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4)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5)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6)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7)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8)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9)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0)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11)
2. 묵상 (칼빈선생 주석)
"1. 바울과" ; 바울은 자신이나 자기의 사역에 대해 명성을 얻을 만한 칭호를 사용하기에 의숙해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자기가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됨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빌립보 교인들에게는장황스런 찬사가 필요 없었다
"감독들과" ; : 바울은 그 존귀함 때문에 목회자들에게 각각 다른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여기서 '감독'( bishop)이라는 말이 한 교회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보아 모든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독 ( bishop)과 목사 (pastor)는 같은 뜻이다. 제롬(Jerom)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에바그리우스(Evagrius) 에게 보낸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사도에 대한 설명에서 이 귀절을 인용했다. 그러나 후에는 대학에서 지명한 개교회의 장로들에게만 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이것은 인간적 습관에서 나온 것이요 성경적 권위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실로 내가 알기로는 사람의 마음이나 습관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주관하지 않고는 말씀의 사역자들이라 할지라도 질서가 유지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개개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어떤 나라 전체나 전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단어에 대해 논쟁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생각해낸 잘못된 것을 택하는 것보다는 방언의 창시자인 성령을 따라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장로들이 동급이기 때문에 동일한 직분을 가졌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 중에 한 사람을 말의 와전으로 인해서 새로운 이름의 미명 아래 타인의 영역을 침범케 하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기 때문이다.
"집사들"; 이 명칭은 가난한 자를 돌보고 도와주는 자에게 또는 도덕적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지정된 장로들에게 두 가지로 사용된다.바울은 전자의 의미를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했는데 나는 구제품을 주고 받는 것을 관리했던 청지기로 생각한다. 다른 부분은 이전 주석을 참조할 것
"3. 내가 감사하며~~~~~" ; 바울이 이 같은 기쁨으로 지적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즉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함과, 둘째로는, 교인들의 지난 생활을 칭찬함으로써 앞으로도 또한 더욱 인내하기를 권장하고자 한 것이다. 바울은 그가 기도 중에 썼던 것을 열망함으로 자기의 사랑을 다른 방법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즐거운 일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곧 이어 감사를 드렸으며, 이것들이 우리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행해져야 할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빌립보 교인들과 교제를 나눔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는 점이다.왜냐하면 이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너회를 생각할 때마다' 라고 말 함으로 내가 '너희를 자주 생각한다'는 뜻을 보여주고 있다.
"4. 간구할 때마다. 항상~~~~" ;...정확히 말하자면 '항상 나의 모든 기도 중에 너희 모두를 위하여 간구한다' 는 뜻이다. 바울은 앞에서 그들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기뽐이 된다고 말하고 이제는 그들이 자기의 모든 기도 속에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는 기쁨으로 그들을 위해 간구한다고 말한다. 기쁨은 과거에 대한 것이고 기도는 미래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교인들이 복된 출발을 한 것과 완전해지기를 열망하는 것에 대해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부족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우리를 항상 즐겁게 하여주고 있다.
"5. 첫날부터~~~~" ; 이 말 속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는 교리를 곧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알아 영접할 준비가 있었음을 칭찬하고 있다.
"이제까지" ; : 이 귀절은 인내를 가리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즉시 따른다는 것과, 끝까지 변치않고 인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덕인지를 알게 된다. 왜냐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순종하기를 게을리하고 심지어는 변절하여 돌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바울은 이제 자신이 누리는 기쁨에 대한 또 다른 이유와, 그 근본적인 상태에로 넘어간다. 바울이 누린 기쁨은그들이 복음의 교제 안에 들어온 것, 즉 우리가 아는 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참여자가 되어진 것에 있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그것을 소유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교제라는 말은 비록 바울이 복음을 믿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함께 모이는 것을 가리켜 말했다고 할지라도, 일반적인 성도들의 교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6.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 교인들의 장래에 대한 바울의 확신은 그에게 기쁨을 더하여 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렇게 말했다. 어떻게 인간이 육체의 질병과 나약함, 위험, 방해 속에서 감히 내일을 약속할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은 분명히 이 확신을 인간적인 우월성이나 불변성에서 찾은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빌립보 교회 교인들 얻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장래에 잘 되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때이다. 왜 냐하면 이러한 은혜가 즉시 하나님께서 선(춈)하심과, 우리들을 아버지같이 돌보아 주심을 증거해 줌으로써, 앞날에 대한 확신이나 좋은 용기가 없이도 감사함으로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 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선을 행하기에 지치고 기진하여 있는 인간과 같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하여 묵상하게 하심으로 장래에 대한 용기와 확고한 소망을 갖게 하고, 항상 다음과 같은 삼단 논법을 마음속에 생각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선지자가 증거한 대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시지 않는다 (시 138 : 8: 사 64 : 8). 우리는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시작하신 것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내가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한 말 속에는 단순히 창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어 그의 아들로 삼아주진 것을 뜻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면 사람이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성령은 자기의 소명에 대해서 자기에게 증인이 되어주신다. 성령은 선택 받은 자 개개인의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성령의 밖으로 나타나는 효험 외에는 알 수가 없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보여주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의 확신이란 자기 속에서 일어나서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번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어떤 증거를 드낄 수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선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지 않고 사랑으로 공평하고도 인간적인 관단을 받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법칙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껜 대하여서는자신의 노력을 없애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식싸움의 끝까지 이다 싸움은 죽음으로라야 끝난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말할 때 성령이 이러한 말로 자주 언급되었으므로 육신의 부활을 하나님의은혜가 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 냐하면 멸망할 육체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이 더 이상 육체적인 욕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기때문이다. 반면에 그들은 아직 자기들이 소망하는 점에까지 도 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진보하는 중에 있다거나 바라는 행복과 영광을 아직도 누리지못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말은 있을 수가 없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소망 중에 감추어져 있는 보배들이 나타날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실로 소망에 대해 말할 때는 항상 우리의 눈을 우리 속사람이 싫어하는 그 이상으로 축복된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7.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하게 깨닫기 위해서는 참된 경건의 표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이 표식은 양자 (구)의 영이 자신을 드러냄으로도나타나진다. 따라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와 함께 은혜의참여자가 되어진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이 끝까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마땅하다고 말한다. 나는 에라스무스(Erasmis)가 분별력이 있는 독자가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귀절을 독특하게 번역한 것에 대하여 일리가 있다고 본다고왜냐하면 그는 바울이 근본적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잘 되기를바라고 있었다는 견해를 말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들이 복음을 옹호하고 복음 안에 묶인 바 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은혜의 참여자이었다고 말한다.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 드이 말씀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그의있음을 말한다. 빌립보 교인들은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사랑하고항상 할 수 있는 능력껏 바울을 도와줌으로써 복음의 동기를 유지함에 바울과 친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처럼 그들이 비록 육체는 서로 멸어져 있다 할지라도 모든 일에 능력대로 봉사하고자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묶여 있는 것으로 생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너회를 가짐은 은 신실하게 그리고 거짓이 없이, 조금치도 의심하는마음의 없는 확실성으로를 의미한다. '은혜에 참여한 자 나 '나의 매임 은복음으로서 보장이 된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이와 같이 함께 매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픗
"나의 매임과~~~~~~됨이라" : 1 갇힌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 것은 세상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은 일로 보여질 것이지만, 진리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고 난 당 한 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베풀어 주신 혼치 않은 영광임을 깨닫게 될것이다. (왜 냐하면 "나를 인하할 때여 너회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회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 : 11)하신 말씀은 공연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인 그리스
도의 십자가와 친구되는 것을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의 변명과 확정함 에 총매임2'을 첨부합으로써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대적들과 대항하여 복음을 증거한도록하게 하시는 것이 영광스러운 봉사임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음을 변호케 한 것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실로 순교자들은 이러한 사상으로 무장함으로써 모든 불신세력을 경멸하고 각종 고 문 속에서도 찬송할 수있었다. 이오늘 날에도벌이 사상이 신앙 고백을 위해 부름받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그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호자로 택함을 받을 수가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이런 사상을 가진 자는 보다 큰 용기를 얻어 배반하고 버림받는 자리로 쉽게 돌아서지 않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 면 사람은 복음의 확정함이 인간의 꿋꿋함에 인 가고묻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 코 자체는 (너무도 '확고하여 외부적인 요소가 첨가될필요가 없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거짓말장이가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진리에서 뗘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나약한 양심이 앞에서 말한 방법의로 도/움을 받아 확고하여진다는 데는 애매한 점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므로 말한 확정함은인간에게 관계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도 많은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복음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 속에 그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인쳐져 있다는사실을 경험을 통해 얻게 된다. 그러므로 터틀리안은 그들의 피가 교회의씨앗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나 거룩한 피 곧 하나님의 영광의 우승자는자녀들을 자라게 하는 씨가 되어질 것이다. 라는들어면 시를 흉내내어 본다.
"8. 심장으로" ; 바울은 육적인 마음과 그리스도의 심장을 대조함으로 자기의 사랑이 거룩하고 신적임을 암시한다. 그가 육신 따라 자기의 이익을 좇아 사랑했다면 환경과 계절이 바꿜 때마다 그의 마음이 시시각각 변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제 우리에게 믿는 자의 마음은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향해 노저어 감으로써 그라스도의 지배를 받아야할 것을 가르쳐준다. 참된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심장에서만 나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심장을 여시는 것처럼 우리를 찔러 깨우치는 막대기가 된다면 우리는 성숙한 사랑을 간직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사모한다'.는 표현을 통해서 논리적인 형식을 구분했고, 우리가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것들을 사모하는 것이 사랑의 중표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더욱 명백하게 말하면서 이를 증명하고자 맹세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가 장성하는 것을 얼만나 기머하시는가를 알고 있으므로 이맹세가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제일로 중요한 문제는 바울의 사랑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철저하게 알리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가르치는 자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을 알게 될때에 그의 교훈에 대해서 크게 신용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하나님을 진리의 증인으로 부른 것은 하나님만이 진리이시기 때문이요. 자기 사랑의 증인이라 함은 하나님만이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 바울은 과거에 단순히 한번 말했던 것에 대해 기도로 돌아간다. 따라서 자기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간구한 모든 것을 통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기도하는 요령을 배우게 하고,간구하는 은혜가 점점 더 풍성케 되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람이 자기들 자산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너회의 존경: 너희의 주라는 무식한 말을 한다.그러나 이 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런 어리석은 말을 한 일도 없고 그 실례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칭찬할 만한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말의 의미에서 뗘나 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성장은 지식과 총명과 사랑에서 점점 풍성하게 될 때에 오는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어의 습관을 따르면 '안에'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말을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했다. 왜냐하면 도구적 혹은 형식적인 원인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풍성해지면 풍성해질수록 더욱 우리의 사랑도 증가되어야 한다. 이 의미는 '너회의 사랑이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증가할 것이다' 는 것이다. 모든 지식은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충만하고도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
"10. 너희로 분별하며" ; 그리스도인의 지혜란 선하고 유익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서 쓸데없고 무익한 생각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 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믿는 자들이 무익한 것을 베움으로 열매없게 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소르본 학파 (Sorbonnist)의 신학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신학은 우리의 일생
이 천국 생활을 바라는 점이나 영적인 유익을 얻는 점에서 유크리드(Euchlid)보다도 못한 교훈을 한다. "만약 이 교훈을 옳다고 가르친다면 영적 교리에 대한 치명적인 신성모독 이상으로 비판을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이 성경은 유익한 것 (딤후 3: 16)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억지 이론만을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신실하여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좋은 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홍미를 교묘하게 기대함에서 떠나 순전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하여준다.
"허물 없이~~~~~~" ; 이 말이 뒤따라 온다. 헬라어 '아프로스코포이' 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크리소스톰은 적극적 의미로 보아 해석하기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정직하게 되어지기를 원했던 만큼 인간들 앞에서도 칭찬받을 만한 생활을 하도록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생활로 말미암아 해를 끼치는 일이 없기를 기대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해석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소극적 의미로 보는 것이 보다 문맥에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지식을 간구함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들의 부르심 안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빈번히 자빠지고 비틀거리며 방황하게 되는 것은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단이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시시때때로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을 던져 우리를 돌아서게 했는지를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11. 의의 열매가 가득~~~~~" ; 선한 양심은 그 생활에 선한 열매를나타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외면적 생활에 관계된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빌립보 교인들이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라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열매틀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있어진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 열매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한 행동은 성령으로 성별될때에 시작하기 때문이요. 우리는 발그리스로의 풍성함을 따라 모든 것을 한 수 있기 때문이다.두바울은 이런 경우를 나무에다 비유했다. 우리는 돌감람나무이어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받아 열매 맺는 나무가 되도록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나 (요) 15: 1)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일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임을 보여준다으 왜냐하면 외모로는 지극히 선하다고 할지라도이 목표를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부패한 것이요 냄새 나는것이기 때문이다. 보드번호 음광일시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행함의 의는 믿음의 자유로운 의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의의 열매가 있는 곳이 라고 해서 반드시 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이것은 율법에 절대적이고도 완전하게 순종함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라고 할 수 없으며, 참 성도들 중에서는 이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경우이다. 분명히 선행은 좋고 아름다운 의의 열매의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은 성령의 중생을 통해 우리 가운데 의를 창조하시고, 죄를 용서하심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하신다. 따라서 모든 의는 믿음에 의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