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몬1:1 ~25 )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1)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4)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5)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6)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7)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8)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9)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0)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1)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2)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3)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4)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5)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6)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7)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8)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19)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0)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1)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2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3)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2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바울의 숭고한 정신이 비록 그의 보다더 중요한 글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지만 이 서신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 서신에서 그는 그의 통 상적인 방법에 따라 그 자체로서는 하잘것없는 문제를 하나님께 말씀드리 고 있다. 그는 도주한 노예요, 도둑인 사람을 주인에게 돌려 보내면서 그의 용서를 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유를 변호하는 뜻에서 그리스도인의 관용 을 얼마나 신중하게 다루는지 한 개인의 사적인 일보다는 전체 교회의 유익 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더없이 신분이 천한 사람을 위 해서는 우리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온순한 성격을 생생하게 알이볼 수 있을 정도로 겸손하고 온건하게 나오고 있다.]
"1~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 다른 곳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한 사도나 사역자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죄수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찼던 쇠고랑이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했던 사명에 대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것 을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그가 자선의 권위를 보강할 필요를 느꼈거나 자 신이 무시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빌레몬이 얼마나 존경했던지 그가 그의 주장을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는 점은 확실하다---도망한 노예의 사건으로 인해서 주로 그의 용서를 빌려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빌레몬과~~~~~~" ; 바울이 빌레몬을 자신의 동역자 로 부른다는 점과 여간해서는 사사로운 개인에게 이런 칭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빌레몬은 목사의 직위를 갖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또한 아킵보 에게도 인사를 하고 있는데, 그도 역시 그가 골로새서 마지막에 나오는 동일한 사람 이라면 교회의 한 사역자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일 수 없는 것은 그가 그를 동역자로 부르는 이 명칭은 특별히 사역자들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기수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싸워야 마땅하며 사단은 대부분 이들을 더욱 더 맹렬하게 억압하기 마련이다. 추측컨대 아킵보는 바울의 동료로서 그가 관련된 투쟁의 일부에 참여했던 사람인 것 :같은데, 그 까닭은 바울은 박해를 언급할 때마다 이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빌레몬의 식구들을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 그 식구들을 아주 잘 다스려서 그 가정이 교회와 같게 되며, 자기 집에서 목사의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찬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바울이 그의 .아내를 그처럼 칭찬하는 것을 볼때, 그녀 역시 그와 같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4~5.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감사를 드리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점이다. 제 아무리 높은 칭찬을 받고 있는 완전한 사람들이라도 우리는 그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끝까지 불굴의 인내를 허용하실 뿐 아니라 날마다 향상시켜 주실 것을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가 빌래몬에게 주는 이 찬사에는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완전이 간략하 게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자기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유인즉 우리 생활의 모든 임무는 이 둘 가운 데 그 어느 하나와는 꼭 관련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을 가리켜 그리스 도에 *대한 (towards) 믿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특별히 그리스도 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를 통해서요, 그분 안에서만 신앙을 찾는 모든 축복이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크는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져야 함을 부정할 정도로 성도들에게
만 국한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가르침은 자신의 육신을 무시하라는 것 이 아니라 인성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존귀하게 대하라는 것이요, 따라 서 거기에는 온 인류가 포함된다. 그러나 신앙의 권속에 속하는 자들은 필 1 연적으로 더 밀접한 관계에 의해서 뭉쳐지며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들을 우리에게 추천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맨 먼저 우리의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 귀절의 배열은 어느 정도 혼잡하지만'항상' 부사가 .첫째 소절 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둘째 '소절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만 제외한 다면 그 ,명확한 의미를 캐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우리는 그 의미를이 사도가 빌레몬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에 대한 감사를 포함시킨 것은 그의 경건성이 참으로 큰 즐거움을 가져왔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의 경건성이 참으로 큰 즐거움을 [가져온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대부분 :우리는 슬픔과 눈물밖에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기도하 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항상'이라는 단어를 둘째 소절과 일관련시키는 것이 더 좋 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곧 바울이 빌레몬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 항상 그를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 내게는 첫째 의미가 더 좋은 것으로 보이지만 독자들은 자유롭게 고선택하기 ]바란다.
다음 귀절에는 일본래의 순서가 도치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에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이라는 말을 덧 붙이고 있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그리스도라는 점을 생 각할 때, 믿음 다음에 바로 그리스도가 언급되어야만 의미가 통한다는 이야기이다.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 이 귀절은 어느 정도 모호하지만 독자들이 바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점은 사도가 빌레몬에 대한 찬양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기도에서 그를 언급할 때 그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가 간구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믿음이 선행으로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고 무익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가 이것을 가리켜 ."네 믿음의 교제"라고 부르는 것은 믿음이란 무기력하게 내면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실제 결과를 .통해서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마음 속에 은밀히 숨어있지만 선행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그 자체를 알린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 자체를 알림 로써 네 믿음이 모든 선한 것으로 그 효력을 입증할 것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선을 알게 하고~~~~~" ; 이것은 체험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믿음이 그 효과를 통해서 스스로 효력이 있다는 점을 입증하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알게 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너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에이스 크리스톤' 이라는 귀절은 '그리스도에게' (unto Christ) 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나는 만약에 이것이 허용된다면, 이것을 '엔 크리스토'의 의미로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머물러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바로 앞에 '너희 동안에' 라는 단어가 나오므로, 이 거친 표현은 그것을 용납할 없게 만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단어를 하 나도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독자들에게 언급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취사 선택하게 하였다.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평안함을 얻었으니(원기를 되찾았으니)" ; 바울이 평안함을 얻었다는 것은 고통 받는 자들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한 것이거나 파산 당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의미로서 그들이 모든 고통과, 비탄으로부터 마음이 평안함을 얻고 자유롭게 되도록 하여 그들이 안식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은 느낌을 뜻하고 '아나파우시스'는 평온을 뜻한다. 따라서 이 귀절의 헬라어를 직역하면 창자가 된다는 근거에서, 위(stomach)와 그것의 영양보충과 관련시키는 자들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느니라." ; 헬라어는 '은혜'로 번역하는 편을 택하지만 나는 우리가 이것을 기쁨으로 번역해야 옳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나하면 '카린'과 '카란 '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실수로 단어 하나가 바뀌어지는 것도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최소한 이 문제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따른다면, 바울이 '카린'을 기쁨의 의미로 사용하는 대목은 이 귀절만이 아니다. 은혜와 위로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여하튼 그의 명백한 의미는 빌레몬이 경건한 자들의 곤경을 덜어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가 큰 기쁨과 위로를 찾는다는 뜻이다. 남에게 베푼 선을 보고 그런 기쁨을 맛보는 것은 일반적인 사랑을 능가하는 것이다. 더우기 이 사도는 자신의 개인적인 기쁨만 표현할 뿐 아니라 빌레몬이 친절하고 자비하게 경건한 자들을 도와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 이것은 곧 "비록 내게는 그대를 명령할 권위가 있지만 그대의 사랑 때문에 내가 요청한다" 는 이야기이다. 그는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두 가지 근거, 곧 그가 연장자 (eldei)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한 죄수'라는 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빌레몬을 사랑하기 때문에 명령보다는 요청하고 있노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사실 우리가 권위를 행사하며 명령을 발하는 것은 사람들이 주지 않으려는 것을 강제로 뺏으려 할 때 쓰는 수법이다. 그러나 그들은 권위의 행사보다는 필요한 것에 대한 침착한 설명을 듣고 더 자발적으로 행동하려 하므로 바울이 순종적인 사람을 상대하면서 간청하는 편을 택하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이 본을 통해서 그는 목사들에게 자신들의 생도들을 몰아붙이기보다는 온순하게 인도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간청하는 입장을 취하고 자신의 명령권을 포기함으로써 그의 소원하는 바를 더욱 더 강력하게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수여하신 임무 때문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스스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들로 택하셨던 그들이 권위가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토 아네콘; 마땅한 일' 이란 교사들에게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뭐든지 요청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위는 마땅한 것, 곧 인간의 임무와 일치하는 것의 한계 속에 국한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지적 했듯이 교역자들의 이 방법은 언제나 성공적인 것 같은데, 그 교인들의 마음을 가장 호의적인 방법으로 얻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아주 부드럽게 인도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해야 할 것보다는 더 적게 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연장자 (elder)라는 단어는 나이가 아니라 직분과 관계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가리켜 여기서 사도로 부르지 않는 것은 그가 말씀 사역의 동역자를 상대로 친밀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 설득력 있는 설명의 지지를 받지 않는 요청은 대개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오네시모를 위해 중재하는 데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도망간 노예이며 도둑을 가리켜 친 자식으로 부르는 그의 진심을 우리는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네시모를 자기가 낳았다' 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중재를 통해서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만드는 것은 그 어떤 인간도 해낼 수 없는 일이며 그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도 이 영적 중생의 행위이다. 그러나 영혼의 중생은 믿음에 의해서 되며 믿음은 말씀을 듣는데서 온다는 점을 생각할 때(롬1017) 가르치는 사역에 종사하는 자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생명의 씨앗을 전해주는 주인공을 가리켜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인간의 사역이 영혼의 중생에 있어서 효력이 있는 그것은 사실이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그 의 영의 능력으로 중생시키신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결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무슨 대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통해서 행동하신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갇힌 중에 오네시모를 낳았다는 말은 그의 천거를 더욱 더 의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12. 저는 내 심복이라." ; 빌레몬의 노를 진정시키는 데에는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그가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바울에게 잔인하게 대우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도둑이며 도망자인 하찮은 노예를 그의 주인의 분노로부터 보호하려고 서슴없이 자기 품(heart)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 역시 놀라운 친절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을 우리가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동일한 방법으로 진지하고 순수하게 회개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자들을 우리에게로 맞아들이도록 하자.
"13. 저를 내게~~~~~~~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 바울도 꼭 필요로 하는 노예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그를 달래려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만약에 바울로부터의 그러한 관심을 거절한다면 이것은 더없이 무례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네시모를 되돌려 받는 그것을 반가운 선물로 여기겠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렇게 대함으로써 그를 그 집에서 학대 받지 않고 되돌아오게 하고 있다. 그는 또 첫째,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을 대신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 둘째 겸손한 마음에서 빌레몬의 권리를 박탈하고 싶지 않다는 점, 세째 자기 종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돌아간 뒤에 그를 되돌려 보낼 경우, 이것을 더없이 반갑게 여기겠다는 점 등을 덧붙이고 있다. 마지막 요점에서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이 복음의 증거를 위해서 수고할 때,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곧 유랑, 옥살이, 매맞음, 모욕, 재산압류 등이 복음에 속한 것임을 믿는다면 이 일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자신을 그리스도로부터 끊어버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복음을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책임이다. 따라서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하나의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전체 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복음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된 임무인 만큼 그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것을 한 사람에게만 맡기는 일은 없어야겠다.
"14. 다만~~~~~~~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 이것은 오직 자발적으로 바쳐진 제사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일반적인 원칙에 대한 한 가지 예이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9장 7절에서 구제를 두고 똑같 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토 아가돈'은 한 가지 친절한 행동을 뜻하며, 필연은 자발적인 행위에 대응된다. 다시 말해서 강요를 받을 경우에는 요구되는 바를 실천함에 있어서 자발적인 의사를 표현할 기회가 전혀 없으나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일은 참으로 칭찬을 받을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빌레몬이 자기 종이 변화된 성품과 새로운 행실로 돌아오는 문제에 대해서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개인적인 체험으로 그의 회심을 입증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5~16.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 우리는 악의로 행해진 일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사용되어진 것을 볼 때 화를 풀어야 마땅하다. 행복한 결과는 악에 대한 치유로서, 곧 하나님이 그의 손길을 우리에게 뻗쳐 우리의 잘못을 도말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창45.:5) 노예로 팔려간 자신이 자기 부친과 형제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높은 지위에 까지 오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때문이라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고서 형제들의 배신과 잔인을 잊으면서 자신이 그들을 위해서 먼저 보낸 바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의 노예가 도망간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크게 불쾌히 여기거나 실망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다시 말해서 빌레몬이 만약 그를 집에 데리고 있었더라도 그는 이미 마음으로는 도망자였으므로 그는 실제로 그를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하고 불순종하는 .상태로서는 자기 주인에게 아무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가 잠간동안 배회하게 된 것은 그의 위치를 변경시켜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돌아오려는 뜻에서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그의 도망을 떠남으로 말하며, 그것 역시 잠시 동안 뿐이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또 오랜 기간의 유용성을 잠간동안의 손실과 대조시킴으로써 모든 것을 현명하게 누그러뜨리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떠난 것의 또 다른 좋은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네시모가 그것을 통해서 새 사람이 되어 유용한 노예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자기 주인의 형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빌레몬이 그것이 최근에 있었던 일이기에 아직도 그것에 대해서 노를 품고 있거나 오네시모를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바 울은 먼저 그를 자기 자신의 형제로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빌레몬이 그와 훨씬 더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점을 추론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네시모가 비록 주 안에서 성령에 따라서는 바울과 빌레몬 모두에게 동일하지만 육신적으로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식구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무가치한 노예를 형제로 부르며 그를 자기의 가장 친한 형제로 부르는 바울의 태도에서 탁월한 겸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의 숫자에 넣는 자들을 자기 형제로 여기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면 그것은 못된 교만의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하물며 ~~~~네게랴"라는 말은 빌레몬이 성령에 따라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 그 의미는 그가 특별히 나에게 형제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네게는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 까닭은 '너와 그는 두 가지 관계로 서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충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경솔하게 추천하거나 그가 신앙에 대한 충분한 단련과 거기에 대한 증거를 보이기 전에는 그의 신앙을 칭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오네시모에게서 회개에 대한 특별한 본을 받는 셈이다. 노예들이 얼마나 악질적이었든지, 백에 하나도 아무 쓸모가 없을 정도였다는 점은 잘 알고 있는 바 대로이다. 우리는 그의 도망에서 오네시모가 오랜 동안의 습관 때문에 악에 마음이 굳어 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성품을 더럽힌 여러 잘못을 바울로 하여금 그가 참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점을 선언하게 할 정도로 멀리 떨쳐버린 것은 회귀하고 경이적인 탁월성이 아닐 수 없다. 이 경우에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들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나쁜 수단과 .함정을 통해서 뜻밖의 방법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네시모는 경건하고 거룩한 집안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악한 행동으로 거기서 추방당한 나머지 고의적으로 하나님과 영생으로부터 멀리 떠났던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숨겨진 섭리에 따라서 패망의 도주를 경이적으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그가 바울과 접촉하게 하셨다.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 그는 자신의 권리와 위엄을 도망자에게 양보하고 그를 자신의 위치에 둘 뿐 아니라 그를 위해서 보증을 섬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을 낮추고 있다. 오네시모의 주인이 그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나옴으로써 그가 당면한 학대 때문에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바울이 이것을 바로 성취하기 위하여 애를 쓴 것이다. 그의 본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회개에 대한 증거를 준 죄인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도와야 하는 가를 배우게 된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는 자들의 용서를 위해 서로 중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면, 우리는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그들을 대해야 하는지 모른다.
"18.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오네시모가 도망하는 노예들의 습관처럼 자기 주인에게서 무엇을 훔친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는데, 그는 이 악한 행동을 "네게 진 것이 있거든"이라는 말로써 완화하고 있다. 노예와 주인은 국가법으로 묶여 있었을 뿐 아니라, 노예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칠 경우, 노예는 주인의 채무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범죄에 대해서까지 보상하려고 자발적으로 나오는 바울의 자세에서 우리는 그의 친절이 더욱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 하노라* 라는 말로써 자신의 청이 허락되기를 얼마나 간곡히 바라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너는 만약 내가 네게 요구했더라도 내게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다음에 나오는 후한 대접과 그 외의 내용 역시 동일한 의미이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바울이 교회가 그에게 준 도움이 아니라면 어떻게 돈을 갚겠노라고 약속할 수 있겠는가? 그의 궁핍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실제로 우스꽝스러운 약속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바울이 이런 식의 표현을 통해서 빌레몬에게 그의 노예에게서 아무것도 되받으려 하지 말기를 간청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말에는 냉소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에게 이 계산을 무효화 시킬 것을 간접적으로 비치고 있다. 그의 의미는 '나는 네가 그를 대신해서 나를 채무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네 노예에게 불리하게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원치 않노라' 라고 하는 식이다. 그 까닭은 그는 곧 이어 빌레몬이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으며, 어떤 사람을 통째로 자신의 재산으로 요구하는 자는 돈을 갚는 문제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0. 오 형제여! " ; 그는 자신의 간청을 더욱 간곡하게 하는 뜻에서 이 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너와 내가 의견이 다른 것이 아니라, '네가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고 나에게 그처럼 가까운 이 사람을 호의로 받아들일 경우 너는 참으로 나와 밀접하며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가 쓸 수 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앞에서 사용한 평안하게 하다. (내 마음의 원기를 복돋우라)는 표현을 여기서 또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복음, 신앙이 국가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말소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빌레몬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의 포도원을 가꾸는 일꾼으로서 '바울의 동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법이 허용하는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리가 그에게서 박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그들에게 사면을 허용함으로써 그를 친절하게 받아들일 것을 지적 받고 있을 뿐이다. 사실 바울은 겸손하게 그에게 과거의 자리를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겸손한 간청은 '자신들이 전혀 죄를 저지른 일이 없다'는 식 으로 오만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변명하고 아무 수치심이나 검손의 표시도 없이 그 잘못을 고백하는 자들이 얼마나 참된 회개로부터 거리가 먼 사람들인 가 하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분명히 오네시모는 그처럼 뛰어난 그리스도의 사도가 자기 일을 두고 그처럼 간곡하게 요청하는 것을 보고서 더욱 더 겸손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자기 주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 마음을 갖도록 행동했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동일한 이유에서 자신이 빌레몬이 자기가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 것으로 알므로 이처럼 담대하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점을 들어 양해를 구하고 있다.
"22.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 이 확신은 빌레몬에게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자신의 도착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그에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감옥에서 풀려났는지 풀려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시적인 친절에 상대한 자신의 소망이 성취되지 않았다 해도 이 발언에는 아무것도 모순된 점이 없다. 자신의 석방에 대한 확신은 그것이 하나님께 유익하게 보여야 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했으며 그는 항상 사건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낼 때까지는 자신의 마음을 확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자들이 그들의 기도에 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이야기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기도가 성과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것이 승리하는 것은 우리 기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대해서 주어지는 것이 값없는 은혜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24. 데마~~~~~~" ; 이 사람은 바울이 후에 슬퍼하면서 디모데후서 4장 10절 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바울의 동역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지치고 낙심하여 후에는 세상의 허영에 이끌려버리고 말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신의 열성이 지속될 것으로 너무 확신할 것이 아 니라 아직도 긴 여정이 앞에 놓여있다는 점을 기억해서 확고부동하게 되기 를 하나님께 요청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