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네번째 나타나셔서 아들을 낳을 것이란 약속에 아브라함의 웃음은 불신앙이었는가?(창17:17 Calvin 선생주석)
1. 성경 (창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2. Calvin선생 주석)
아브라함이 엎드리니 이는 그의 경외함뿐 아니라 믿음의 표징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감사함으로 아들에 관하여 약속된 것을 받고 품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웃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멸시하거나 환상적이라고 여기거나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추론합니다. 그러나 가장 기대하지 않은 일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부분적으로는 기쁨으로 기뻐하고, 부분적으로는 감탄으로 자신을 초월하여 그는 웃음을 터뜨립니다.
나는 이 웃음이 오로지 기쁨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아브라함이 놀랐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다음 심문에서도 확인된 바에 따르면, 백세 된 아이가 그에게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가 천사가 한 말을 헛된 것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마치 그가 어떤 놀라운 소식을 받은 것처럼 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물의 참신함은 그를 충격에 빠트려 잠시 동안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숭배합니다. 이것은 의심하는 자의 언어가 아니었음을 바울이 로마서에서 증거하였으니(롬 4:19), 아브라함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요 사라의 잉태하지 못하는 태가 죽은 줄로 여겼음을 부인하는 또는 그가 불신앙으로 비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희망에 반하여 희망을 믿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말한 것, 곧 아브라함이 마음속으로 말한 것을, 나는 그가 이것을 그의 마음에 분명히 생각한 것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과 반대되는 많은 것들이 우리를 훔쳐갈 때, 그 혼란스러운 생각이 갑자기 그의 마음에 달려들었습니다. '백세에 한 아들이 태어난다는 것이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육신의 이성과 믿음 사이의 일종의 경쟁인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엎드려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시켰지만 그는 그 사건의 참신함에 여전히 동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의 행로를 방해하지 않는 이 감탄이 믿음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아니, 그토록 험난한 장애물을 넘은 믿음의 힘은 더욱 빛났다. 그러므로 그는 사라가 다음 장에 있는 것처럼 웃기 때문에 징계를 받지 않습니다(창 18:1).
@ 로마서 4장 19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