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주석/창세기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세기13:18)

은기철 2025. 6. 25. 08:39

1. 성경 (창세기 13장)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1)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2)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3)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5)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6)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7)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8)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9)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0)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 지라 (11)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2)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3)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4)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5)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6)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7)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1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 이 장의 서두에서 모세는 아브람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 때문에 아브람이 안전하게 돌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재물도 함께 가지고 갔던 것을 알수가 있다. 다음 상황은 또한 우리의 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그가 가축과 보물들을 많이 가지고 애굽을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여행길을 편안히 갈 수 있게 인도해 주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애굽인들이 아브람이 취득한 것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보여주기를, 이 재산도 아브람이 제안 받은 목적을 계속 중요시하는 것과 조금도 해이됨이 없이 그 목적을 향하여 발걸음을 움직여 가는 것을 방해하고 늦추게 하는 데에 충분한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대로, 심지어는 건전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방해하여 그들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금하고 있는가?  정말로 풍요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나태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전적으로 땅에 얽매어 죽음을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아브람의 덕성을 다른 사람들의 공통된 사악과 대조를 시켜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다시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것을 어떤 장애로 인하여 방해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한 때에 그 사실을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그럴듯한 핑계를 붙여서 많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첨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 그토록 풍부한 복을 주신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사실상 그에게는 거기에 머물려 있는 것이 옳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하에서도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조금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족쇄가 풀린 사람처럼 그는 자기가 부름 받은 곳으로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부자들이 이 세상 것에 깊이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소명에 무관심한다면 모든 변명의 여지를 박탈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극단들을 우리가 경계해야 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다 천사같은 안전성을 두고 있다. 그래서 마치 부유함을 내팽개치지 않으면 절대로 경건을 지니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몇몇 사람은 정말로 데베(Thete) 사람 크라데 (Crates)를 본받고 그대로 하는 것이다. 그는 그 모든 재산과 보물들을 버리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의 보물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자이다. 그러나 많은 광신자들은 아직도 부유한 사람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배제시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빈곤이 하늘나라의 문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가난이 부요보다 더 많은 장애를 인간들에게 야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지혜롭게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부자와 가난한 자는 똑같이 생명의 유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나사로도 아브라함의 품에 영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반대의 잘못에 대하여도 주의를 해야 한다. 부요가 우리의 길에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거나 또는 우리들을 너무도 부담스럽게 하여 그만큼 우리가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재빠르게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생기지 않게 부요 자체에도 주의를 해야 되는 것이다.


"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 이 말에서 모세는 아브람이 벨엘에 도착하기 전에는 쉬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그가 여러 곳에서 장막을 치기는 했지만 그 어느 곳도 자기의 항구적인 처소로 발을 굳힌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이집트와 관련된 남방을 말하지 않고 단지 유다의 남북 지역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여러가지 문제와 수고를 한 후에야 그가 전에 머물기로 결심했던 곳에 도착했다. '모세는 그 다음에 이렇게 추가하고 있으니 전에 그가`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 그리고 그가 거기서 새롭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이 거룩한 사람이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했으며 그의 경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설명하기를 그곳의 정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순수하게 경배하였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혀ˆ가능성이 회박할 뿐만 아니라 모세의 말에서는 전혀 추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곳에서 '그 이름으로 간구하다' 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의 표현이 하나님을 진실하고 순수하게 경배하는 것을 공언하는 데에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그의 생의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단지 열두번만이 아니고 그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기념할 때마다, 엄숙한 의식으로 자기는 이방인들이 따르고 있는 공통적인 미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밝힐 때마다 하나님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날마다기도하는 생활에서 자신을 단련시켰지만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외부적인 공언으로 그의 경건성을 날마다 증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덕성을 특별히 모세가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반드시 제단과 연관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드려진 희생제물로 그는 자신이 경배하고 있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증거하여 그들 이방인들이 공통적으로 따르고 있는 우상들에 빠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나안 사람들이 알게 했기때문이다.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 다음에는 아브람이 자기의 부요로 인하여 겪게 되었던 불편한 점이 게재되고 있다. 이를테면 자기가 낳은 친 자식처럼 그가 무척 사랑했던 조카와 갈라지게 되었던 점이다. 확실히 그에게 양자택일이 주어졌다면 외아들처럼 보살펴 왔던 그와 헤어지는 것보다는 자기의 부요를 버리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언쟁을 피하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의 잘못을 그가 지나치게 까다로왔다는 것에 전가시켜야 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조카가 조숙하여 건방지게 굴었다는 것에 돌려야 될 것인가?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반드시 고려해야 된다고 보고 있다. 번영이 많은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고 있으니만큼, 아브람도 자기의 성공으로 지나치게 자만하게 만들어 주는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통함으로 부요의 달콤함을 경감시키시고 그분의 종의 마음이 지나치게 그 재물에 매혹되지 않게 하셨다. 그리고 부요에 대하여 현혹시키는 평가가 무절제하게 그것을 탐하게 우리를 유인할 때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교훈을 회상하여 그 재물들에 대하여 불건전하게 집착되는 것을 절제하는 데에 적용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것들이 초래하는 엄청난 불리한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부자들이 자기들의 재물로 인하여 어떤 문제가 야기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때 그때마다 이 약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여 현세의 좋은 물질에 지나치게 탐닉되지 않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호와께서 간헐적으로 인간들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이 번영으로 차고 넘치게 되면 과연 그들이 얼마나 깊은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가? 다른 한편으로, 만약 우리가 가난으로 쪼들린다면 이 방법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 속에 있는 숨겨진 죄악을 교정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가시들로 에워싸여 있다는 사실과 그것에 찔리지 않으려면 반드시 주의를 해야 된다는 사실을 부자들은 잊지 말아야 될 것이며 또한 자기의 일들이 잘 풀리지 않고 곤경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악하고 유해한 올무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조카 롯과 분리되는 것이 아브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그러나 잠재되어 있는 많은 악한 것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적절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부요가 그의 열심의 열을 묵살시키지 않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브람이 그런 해독제가 필요했을진대 하물며 우리야 오죽 하겠는가? 만약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징치를 하심으로 우리의 지나침을 억제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로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가 타락할 때까지 언제나 기다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 멀리 미래를 바라보시고 그렇게 하심을 기억하자. 그래서 하나님은 사실상 그분의 종 아브람의 탐욕과 교만을 교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측된 치료방법으로 사단이 어떤 유혹으로도 아브람의 마음을 감염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7. 서로 다투고." ; 내가 부요에 관하여 암시하는 것은 또한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에 관해서도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야심을 가지고 거의 큰 백성의 무리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종들을 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아브람의 가족은 그에게 너무나 귀중한 희생을 치르게 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적은 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리고 여호와 앞에 우리가 가족이 전혀 없이 지내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도한 그렇게 가족이 없는 것으로도 만족해야 되겠다. 한 집안에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거를 하고 있는 경우에 큰 혼란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가지 많은 나무에 다.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의 진리가 사실이라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이제 만약 정양과 평온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가 작은 집을 지니고 개인적으로 가족의 방해가 전혀 없이 조용한 시간을 보낼 때에 과연 진정한 우리의 복지를 위하여 가장 훌륭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에게 제기되고 있는 이 모범으로 사단이 간접적으로 우리를 분장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된다고 경고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들 상호간에 적개심을 일으킬 수가 없으며 우리를 다른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롯과 아브람은 둘이 서로 한 마음 한 뜻이었다.

 

 그러나 분쟁은 그들의 부자들 사이에 일어나서 그들은 망설이면서 서로 멀리 헤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마음에 내키지 않은 작별을 서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아브람은 자기 목자들에게 그렇게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여러번 강조하여 지시하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원과 노력대로 그 집에 붙어 있는 불화의 가장 파괴적인 불을 예방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야기되는 소란들을 볼 때에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므로 그다지 이상스럽게 생각될 것이 없는 것이다. 아브람은 약 300명 정도의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롯의 권속들도 거의 그 수효에 비등했을 것이다( #1), 그렇다면 5, 6천 명들 사이에서는, 그것도 특별히 자유인들 사이에서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서로 다툴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되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런 추문으로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면 모든 면에서 그런 언쟁이 난폭해지지 않도록 반도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재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곧 치명적인 알력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 ; 모세는 그 죄악을 더 확대시키기 위하여 이것을 더 첨가시키고 있다. 그는 선언하기를 그 분쟁의 열도가 대단히 엄청나게 되어 심지어 파멸이 임박하는 두려움도 그것을 삭힐 수가 없으며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은 주변에 마치 이웃 사람들처럼 많은 원수들에 의하여 에워싸여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 두 사람의 가족들을 멸망시키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적당한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그들 자신들이 둘이 서로 다툼으로 인하여 적군들에게 제공하게 되어버렸다. 맹목적인 노기가 사람들을 그런 정도에까지 이르러 일단 분쟁의 과열이 지배하게 되면 그들의 죽음이 목전에 있을 때에도 그들은 그 죽음을 무모하게 경멸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가나안 사람들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진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우거하고 있는한 원수들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들이나 우리의 형제, 동포들을 구원하려는 간절한 소원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런 분쟁을 조심하자. 그것이 결국 우리를 사단에게 넘어지게 하여 멸망당하게 할 것이다.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 ; 모세는 먼저 언급하기를, 아브람은 자기 가족들 가운데 화평을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함으로 한 가족의 선한 주인의 의무를 완수함과 동시에 이미 일어났던 그 분쟁을 알아차렸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에 그의 온건함으로 그 악을 제거함으로 그것을 치료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라고 시사해 주고 있다. 비록 종들끼리 싸우고 있긴 하지만 그가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고 말한 것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다. 분쟁의 여하가 가족들 간에서 시작하여 점점 비화()되면 그들의 주인들간에까지 번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다른 면에서 완전히 의견을 같이하고 있는 자들이긴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배제할 수가 없다. 그는 또한 예견하기를 그들이 적당한 때에 그 음흉한 죄악을 치료하지 않으면 그들의 우정도 건전하게 오래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더우기 그는 그들 사이에 혈족의 결합을 자연히 다시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은 이것만이 그들의 상호화평을 진작시켜 주는 데에 유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조카의 마음을 보다 쉽사리 무마시키고 진정시키려고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마땅한 요구를 지녀야 할 것보다 우리에게 더 효과가 없을 때는 다른 도움을 청하는 것이 또한 유용하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무를 생각하고 수행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모두가 부속된 이 조건으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양자되었으므로 우리는 상호간에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스런 이 결속이 우리의 분쟁을 완화시키는 데에 충분히 발휘되지 않으면 우리가 그 성스런 결속의 본래의 가치를 감소시키고 있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 여기서는 내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온건함이 시사되고 있다. 이를테면 아브람이 분쟁을 완화시키려고 자진해서 자기 자신의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망과 승리의 욕구는(2) 모든 분쟁의 어머니라고 하듯이 그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온유하고 온건하게 어느 정도까지 자기의 정당한 주장에서 물러서고 양보할 때 모든 비통한 일들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는 데에 가장 좋은 치료책이 발견된다. 아브람은 명예로운 구실을 붙여서 정말로 그가 포기했던 그 권리를 보다 견인 불발적으로 방어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그들간의 화목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그 어느 것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은 선택권을 그의 조카에게 먼저 주었던 것이다.


"10 .  롯이 눈을 들어~~~"  ; 아브람의 공평성이 조금도 찬사를 받을 가치가 없는 것과 같이, 모세가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롯의 아무 생각없이 정했던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오히려 겸양을 위하여 그의 아저씨와 경쟁을 했어야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의 질서가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모든 면에서 그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자신을 위하여 더 좋은 몫을 가로채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는 더 기름지고 가장 알맞는 곳으로 보이는 지역을 택했다. 이 사실에 정말로 다음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것이니, 누구든지 자신의 유익에 열심으로 집착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성을 결여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틀림없이 이 부당한 행위가 아브람의 마음을 찔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로든지 다시 새로운 일로 인해서 서로의 관계에 불씨가 되지 않게 하려고 그것을 조용히 감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의무에 대하여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아브람의 행동을 본받아 그렇게 해야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란과 불화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소돔의 이웃 평야가 하나님의 낙원으로 비유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단지 히브리인들은 무엇이든지 가장 월등하게 뛰어난 것을 '신성한'것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것은 뛰어난 곳이며 가장 월등하게 기름진 곳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브람이 초기에 거주했던 곳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일반적인 유사성을 제안하지 않고 다만 '온 땅이 물이 넉넉하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마치 그가 인간의 최초 거주에 관련된 똑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한 강이 있는 냐 1중데 그것이 네 지류로 갈라져 나갔으며 그 강이 그곳 땅을 적셔 주었더라는 의미가 똑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이집트의 일부에 관하여도 똑 같은 것을 추가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오직 한 가지 특별한 면에서 이곳이 다른 두 곳들과 비교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13. 소돔 사람은~~~~" ; 롯은 자기에게 그렇게 풍요한 거주지가 자기의 몫으로 떨어졌으니 아주 행복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가 성급하게 자기의 탐욕을 채우는 데에 급급하여 택하게 된 그곳이 그에게 불행한 견과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그는 거기서 교만하고 비뚤어진 이웃 사람들과 접하고 승강이를 벌이면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차라리 땅의 메마름과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가 그런 생각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렇게 유도되어 나간 것을 감안해 보면 지금은 그의 어리석은 탐욕에 대한 벌을 치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에서 귀한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니 우리의 눈은 절대로 신뢰할 것이 못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눈으로 인하여 올무에 걸려들지 않고 수 많은 악으로 에워싸이지 않으며 그것들을 외식하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자기야말로 낙원에서 살고 있다고 남가일몽에 빠져 있을때 지옥의 깊은 곳에 거의 던져질 뻔했던 것과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소돔 사람들의 극도에 달하는 사악함으로 인하여 정리하고 싶을 때 그들이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고 말하였으며 사람 앞에서 죄인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재판석에 나아갈 때에만 모든 입들이 변명하지 못하고 다물고 있어야 할것이며 모든 세상이 그분의 정죄에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달리하고 있다. 그것은 모세가 그들이 단지 사람들 가운데 팽배하고 있는 그런 공통된 사악들로 인하여 지배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저주스런 범죄에 완전히 버려진 자들이며 그 범죄의 소리가 하늘에까지 이르러서-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생각하겠다--하나님의 보복을 사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분간 그들에 대하여 참아오신 것은---비록 그들이 빛된 생활을 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들이지만----그들에 대해서 참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가장 기름진 땅을 소
유하고 거기서 살게 하신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것에 근거해 보면 자축하는 그 악인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기쁨을 주는 동기가 되지 시 못했다. 하나님이 그들에 대하여 참으시고 심지어는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시고, 때로는 자유롭게 되도록 풀어 주시면서
그분의 관대함으로 그들의 배은망덕한 짓들을 참으시면서 교정시키려고 노력한 대로 그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렇게 해주신 것을 자축하고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사치스리운 생활에서 쾌락을 누리며 심지어는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패씸한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들의 부요를 절대로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도취되어 있는데서 일으켜 그분의 무서운 심판대에 그들을 소환할 때까지 잠간동안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소돔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에스겔은 떡과 술에 빠져 있으며 미묘한 쾌락에 탐닉되어 있는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잔인한 교만을 부렸던 그 사실이 결국 그들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 원인이었다고 선포하고 있다(겔 16 :49).

 

"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모세는 이제 아브람이 자기 조카 룻과 헤어진 후에 그의 마음을 달래시려고 하나님이 그에게 위로를 베풀어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 결별로 받은 상처는 아주 심각했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과 조금도 다 바가 없는 자를 멀리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 그 때의 상황을 우리가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마치 그분의 말씀으로 된 약을 그의 고통을 덜게 하려고 가져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같이 들리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모세는 우리에게 슬픔을 경감시키고 치료하기 위한 가장 좋은 치료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너는 눈을 들어~~~~~~" ; 호와께서 아브람의 후손에게 그 땅을 약속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롯이 떠난 사실에서 하나님의 감탄할 만한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람에게만 할당해 주셨다. 다. 만약 롯이 그와 함께 남아 있었다.  그 두 사람의 자녀들이 함께 뒤죽박죽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불화의 원인이야말로 책망을 받아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로 전화위복시켜 롯의 후손이 그 유업을 조금이라도 소유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앞에 있는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처럼 월등한 보답을 지금부터 받을 것이니 이런 고독과 옹색때문에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괴로와 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도 비록 아브람에게 그와 동일한 일이 이미 약속된 것이지만 하나님은 지금 그분의 약속을 아브람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슬품을 제거하시려고 응용하고 계시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단지 아브람의 신앙을 아끼고 다시 확신시켜 주시려고 약속을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 뿐만 아니라 특별한 말씀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것이다. 그 말씀에서 아브람은 자기가 롯과 헤어짐으로 자기 자손들의 신의 이익이 더욱 증진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루터의 공상은-다른 곳에서와 같이-----확고한 위치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어떤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그의 말은 전혀 확증이 없다. 그 땅을 '영원히'약속하시면서 그분은 단순한 영구성만을 의미하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그 기간을 의미하고 계신다. 히브리어 '올람'이라는 말에 관하여 유대인들은 무식하게 항변하고있다. 그러나 그 말이 성경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그 말이 여기서는-내가 얼마 전에 암시한 대로-율법의 전체 기간을 기다리고 있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여호와께서 그분의 옛 덕성들에게 하신 인약이 많은 곳에서 영원한 것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고 오시게 될 그분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소개해 주신 변화는 옛 약속을 '폐기치분'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오히려 확증'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 가나안 땅에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지고 계 것이 아니라 지구의 모든 지역에 걸쳐서 널리 퍼져 있는 한 백성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볼 때에 이 사실이 미래 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땅의 영원한 소유가 아브람의 자손에게 분명히 약속되었다는 주장에 대치되지 않는다.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논쟁할 수 없도록 난해한 점들을 생각하고 나는 여기서 그
말이 의미하는 것만을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즉 그 말은 아담의 씨가!너무도 수효가, 많기 때문에 티끌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모세 자신의 말에서만 추구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추가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씨를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가 그 씨를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의 제재 하에 그를 지켜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된다. 또한 그를 그분 자신의 말씀에 의지하게 하실 것이라는 점도 보게 된다. 아브람은 땅의 티끌을 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가족들에게 눈을 돌릴 때 그의 고독함과 -도저히 셀 수 없는 티끌과의 사이에 과연 무슨 유사성이 있는가?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만으로 우리에게 충분하다는 이 권위를 여호와께서는 오직 그분 자신의 말씀에 귀속시키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그 명의 모든 곳을 조사할 때까지 계속 여행을 하라고 명령하신 사실 역시 냉소를 자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방탕하고 다니는 것이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그가 그렇게 다니면 다닐수록 더욱 더 자신이 나그네라는 사실만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계속적인 결과가 없는 도 상태로 완전히 기진맥진한 그는 더 이상 안정되고 항구적 ()인 소유에 대하여 절망하는 것 외에 남은 것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자기의 노력으로 우물을 파기도 했지만 그 물을 겨우 마시는 것도 그토록 어려운데 바로 그 땅의 주인이 자기라는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그 자신을 설득하여 그것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이것들은 신앙의 단련들이다. 이 단련으로 인하여 멀리 있는 것들과 육신적인 감성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그 말씀 안에서 신앙이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부존()한 것들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며 (히 11 : 1) 신앙은 말씀을 거울로 지니고 있으며 그 말씀 가운데서 신앙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은혜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경건한 자들의 상태도 전혀 다를 바가 없이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증오를 받고 멸시와 비난을 받으며 집없이 방황하는 자들이며 때로는 여기저기로 끌려다니며 헐벗음과 배고픔으로 고생을 하고 있으나 약속된 것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안정된 휴식을 상실하고 오직 말씀의 거울만을 지니고 사는 자로선 이 세상을 떳떳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3)" ;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새롭게 된 약속으로 생기를 찾은 거룩한 사람이 마치 단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 땅을 자기에게 항복시킬 수 있다는 막대한 용기를 가지고 그 땅을 가로질러 횡단해 갔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얼마나 굉장하게 그 말씀이 그에게 유익하게 했는가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아브람이 여기서 그 전에 익숙하게 들었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어떤 것이라도 직접 들어서가 아니라 오직 그가 현재 당하고 있는 슬픔에 아주 안성마춤이고 적절한 약을 구하여서 하늘을 향하여 집중시킨 정력으로 다시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이 거룩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순회여행을 다 마치고 나서 상수리나무 또는 마므레 골짜기로 가서 살려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그는 아브람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성호을 부르는 그의 경건성을 찬탄해 마지 않고 있다. 나는 이미 빈번하게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 왔다. 그것은 그 자신이 마음 속에 제단을 지니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증스럽고 모독적인 제단이 가득차 있으며 그 위에서 가나안 사람들이나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더럽혔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아브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중들 앞에서 자기는 진정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공언했으며 아무렇게나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그에게 계시된 방법대로 한다고 공건하고 있다


# 3 Et tetendit Abram tabernaculum." 아브람은 천막을 쳤다는 말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 SNR'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 듯하다. 그러나 '쳤다'는 용어는 '옮겼다'는 용어처럼 문맥에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고 있다. 그 말을 이용하는 면에서 우리의 역자들은 온
70인 역본외교zoosηνωσa$과 벌게이트 역본의 movens igitur taberaculum을 따르고 있다. 아랍어 역본은 (이것은 라틴어 역본에 의하여 하였음)완곡 어법으로 그와 똑같은 의미를 제시하고 있으니 그 표현을 보면 아브람이 마므레 땅에 기서 거하기 전에 여러 곳
에서 경악을 쳤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인 듯하다.


# 1 : ˙Familiam Lot minime fuisse parem rerisimile.* est.' 그 말들은 minime가 물이되고 있는 다. 각 의미에 의하여 두 가지의 상반된 표현을 지닐 수가 있다. 그것은 '절대로'라는 뜻이나 적어도'라는 의미를 나타낼 수가 있는 말이다. 고대 영역자들은 그 말을 건자의 방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못의 가족은 훨씬 적었다는 것이 매우 그럴듯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프랑스어 역본은 후자의 의미를 체용하고 있으니, 'II est bien vraye-semblable que la famille de Lot n'a pas esle moindre'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 모든 역본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아주 그럴 못한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문맥은 이 치 저자가 모심적으로 디 좋아하고 있는 번역을 거의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