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12:4)
1. 성경(창세기12:1 ~ 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2)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3)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4)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5)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7)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8)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9)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이 장들의 애매한 분류가 독자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문장을 이 전장의 마지막 두 귀절들과 연결짓게 해야 한다. 모세는 전에도 데라와 아브람이 자기 고향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거하려고 갔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이제 설명하기를 경박하고 변덕스런 사람들이 곧잘 하는 것과 같이 경거망동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또한 까다로운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그들의 고향 땅에 대하여 지겨워서 다른 지방으로 떠나게 된 것도 아
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범죄를 하며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도망자들도 아니며 어떤 어리석은 소망을 가지고 정처없이 떠다니는 자들도 아니었으며 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구를 좇아서 이리저리 다니는 자들처럼 어떤 유혹에 이끌려 방황하는 자들도 아니었다. 도 오직 그들은 아브람이 앞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그 발걸음을 옮겨가는 자들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귀절은 하나님이 아브람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자들은 바로 모세가 하는 말로 인하여 쉽사리 반박되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아브람이 이미 거할 지방이 없이 어느 곳에서나 나그네로서 우거하는 자들이었다면 하나님의 명령인 즉 네 땅과
고향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고 하신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확증으로 부가하며 말하고 있는데 확실히 이 귀절에 대한 그의 적절한 해석은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하란에 거하기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우리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때만에 아브람이 갈대아에서 이사를 했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후에 하나님이 반복하신(15 : 7)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온 여호와이다"라는 말을 절대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는 갈대아에 거하고 있은 후에 처음에는 하나님의 "손이 그에게 뻗쳐지지 않았으나 아직까지도 그는 갈대아( 1)에서 집을 삼고 남아 있었던 사실을 추론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의심을 품고 있는 이 하나님의 명령은 정말로 대조적인 오류를 반증하는 우리가 충분히 제시해야 할 명령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때까지 그분의 품안에 정착하고 있는 사람 외에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으며 그의 일을 버리지 않고 친척들 가운데서 그의 생활에 변화가 전혀 없이 조용하고 정숙하게 살고 있는 자가 아니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을 붙이지 않고 모든 친척들과 불화하게 살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의 대답은 아주 쉽사리 '예 저는 제 고향을 떠났읍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저의 친척들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읍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요약하면 모세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기나긴 여행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착수되었던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데라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결핍될 정도로 미신들로 현
혹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건강면에서 이미 파괴되고 떨어져 있는 옳은 사람이 자기의 고향 땅을 떠나간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질식되어 있긴 하지만 진정한 종교는 아직도 그의 마음에는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자기의 아들이 떠나라고 명령을 받은 곳이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거기서 다른 사람과 함께 멸망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가 구해내시려고 하는 자와 관련된 자로서 자신을 그에게 참여시켰다.
내가 담대하게 말하거니와 그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나태함을 정죄하기 위하여 참으로 명백한 증거로 입증해 줄 것이다. 그가 주장하였으리라고 여겨지는 변명은 입고 그럴듯 하였다. 이를테면 그는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만에 집에서 조용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의 어둠 가운데서는 비록 봉사였지만 그래도 그의 길을 전부 비추고 있는 빛의 광선을 눈을 똑바로 뜨고 주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직접 우리 구 울릴 때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는 동안에 그는 그 사실을 의식하고 깨달았던 것이다. 더우기 아브라함의 이 소명은 하나님의 은혜스런 긍휼의 신호가 되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전의 행위로 취득했던 장점들로 인하여 하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인가? 아브라함이 그분에게 나아왔는가? 또는 그분의 호의를 사게 되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언제나 마음 속에 상기해야 될 것은--내가 전에 여호수아서에 있는 귀절에서 추론했던대로구:그는 우상의 더러움에 빠지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이 거저 그분의 손을 뻗쳐서 방황하는 자를 다시 데리고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신성한 입을 열어서 사단의 .간교함으로 속았던 자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려고 계획하신 것이다. 그리고 비참하고 잃어버림을 당한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그리고 하나님의 많은 경배자들에게 주어진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 안에서 부흥되게 하는 것과 그 자신이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또한 생명의 언약을 그가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욱 더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현현이 그의 인격 '안에서 더욱 더 나타나게 하려는 계획으로 의도적으로 되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모두의 소명에 대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단순한 하나님의 긍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무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것들이 특별한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임을 파악하게 된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 말들의 이런 축적은 불필요한 듯이 보이고 있다. 그것에 부가시켜서 다른 곳에서는 아주 간결하게 묘사했던 모세가 여기서는 세 가지의 다른 형태의 구시법으로 평이하고 쉽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는 아주 달리하고 있으니 그것은 이거 지시 그 자체가 슬픈 일이며 그들의 고향 땅의 향기가 거의 모든 사람을 그곳에 고착시키며 붙들기 때문에 하나님은 끈질기게 명령을 하시어 아브람의 마음을 철저하게 침투하실 목적이셨다. 만약 그분이 단 한 마디 말로 데 고향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면 이것은 정말로 그의 마음에 조금도 고통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기가 친척들과 그의 아버지 집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마음은 아팠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이 그런 고통과 문제 가운데 있는 것을 보시매 전 기쁨을 즐기신다고는 절대로 추측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오직 그렇게 하여 그들의 모든 감정들을 시험해 보시는 것이며 그들의 마음 속에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잠적해 있는 곳들이 있으며 그곳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려는 의도로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잠간 동안은 아주 열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것이 식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는가? 오직 그들은 기초가 없이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심하시기를 철저하게 아브람의 감정을 일깨워서 그가 무모하게, 그리고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무슨 일을 수행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고 나서 곧 바람부는대로 따라 가다가 변심하여 다 돌아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줄기차게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하다면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불편한 점들과 어려움들과 모든 위험들을 주의깊게 숙고해 보아야 된다. 성급한 열심은 시든 꽃들을 만들 뿐이지만 경건으로 깊고 견고하게 잘 박혀진 뿌리에서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 이것은 아브람의 신앙을 증거하는 다른 시험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이 정말로 그분의 말씀에 달라붙어 있는가를 더 잘 시험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그를 염려 가운데 있게 하지 않고 직접 그 땅을 가리켜 주시지 않으신다. 마치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명령하니 너는 눈을 감고 나아 가거라. 그리고 절대로 네 고향 땅을 버리기 전에는 너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를 묻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자신을 모두 남김없이 내어 주기 전에는 절대로 그렇게 묻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표현이
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기엔 지혜롭지 않고 오직 자신을 여호와께 전부 맡길 때에 우리는 순종하게 된다는 참된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그분이 우리에게서 요구하신다면 그 성공 여부에 대하여 지극히 소심하게 염려한 나머지 우리의 이 길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자세를 절대로 갖지 말아야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을 감고 우리의 인도자이신 여호와를 그냥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예지를 의지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고안해 주는 개미 체바퀴 돌듯 그런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보다 훨씬 좋기 때문이다.
누가 이 이 말이 이전에 제시된 말과는 상이하다고 하면서 이전에는 모세가 데라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 위하여 자기들의 고향 땅을 떠났다고 선언하지 않았느냐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그 해결책은 쉽사리 제시할 수 있다. 즉 만약 우리가 모세의 표현에서 예변법(2)을 인정한다면 그 문제의 해결은 아주 업다. 그것은 벧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바로 이 장에서 따르고 있는 표현이며 또한 성경에서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는 표현법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각오였기 때문에 모세는 그의 인격으로 말하면서 비록 지금까지는 그 두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그 후에 아브람 혼자에게만 알려졌던 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으로 같. 계획을 가지고 그들이
떠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장차 그들에게 보여질 땅에 관한 .약속을 받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실제로 그들에게 주실. 때까지 철저하게 그분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람의 헌신을 입증하시고 나서 그의 마음 속에서 모든--의심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제 오직 한 기간 동안 알려주지 않고 감추시는 것이 그분의 무슨 뜻이라는 것을 그에게 암시해 주셨을지는 우리로서는 모른다. 다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그의 모든 관심을 쏟고-------말하자면 그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그분의 품에 완전히 던져버리고 결국 그가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될지도 모르면서 자기의 고향 땅을 떠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자신을 순종시켰다는 것을 선포했던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방법으로 육체의 지혜는 명령에 굴복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의 모든 애착심들이 굴복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있으니 왜 하나님은 그분의 종을 다른 거룩한 조상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동방나라로 보내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그 변화가 더 악화된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그들이 멜기세덱으로 여기는 그의 조상인 셈과 함께 거하게 할 목적으로 거기로 인도되었다고 선명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외도였다면 아브람이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이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가 소돔 평야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돌아오기 전에는 그가 멜기세멕율 만났다는 기록을 읽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음에 더
적절한 곳에서 멜기세덱이 셈이었다는 상상이 얼마나 성급하고 졸렬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가 제목에 관하여는 결국 다음에 따르는 결과에서 이렇게 추론할 수가 있다. 즉, 하나님의 계획은 이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판이하였다는
점이다. 지난날의 통한스런 죄악 때문에 그곳의 민족들은 완전히 멸망되어질 존재들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종을 당분간 그들 가운데서 .우거하게 하셔서. 믿음으로 그가 그 땅의 상속자가 된 것을 깨닫게 하셨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오랜 기간까지 그의 후손들에게 예약된 그 땅을 실제로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죄악 가운데서 .살게 하신 것이다. 이 순전한 이유때문에 이곳을 향하여 건너가라고 명령을 받은 것이며 바로 그의 후손들에게 '소유를 주실 목적 때문에 그곳의 모든 거주인들이 철거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이 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믿음으로 그 곳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지니게 될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통치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으니 그것은 그들의 후손들이 백배한 용기를 가지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에 박차를 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 여기까지 모세는 아브람이 명령을 받은 것만을 계속하여 말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 명령에다 첨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은 경미한 원인 때문에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만을 부리면서 순종을 하는 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하여 더 첨가된 확신으로 활기를 부여받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하신 명령은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내가 전에 이 사실을 암시한 적이 있지만 다시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그렇게 무가치한 일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 자체가 다시 한 번 언급해야 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계기에 대한 말씀을 반복하는 것이 절대로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것이 지탱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만으로도 순종을 남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외 마음이 하나님을 따를 외향을 갖게 하기 위태서는 하나님이 그분의 복에 대하여 약속을 하시지 않으시면 단순히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명령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아들을 두지 못하고 있는 아브람이 분명히 큰 민족이 된 것이라는 그 약속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이 약속은 만약 하나님이 모든 일들의 실제적인 상태로 그것의 성취에 관한 소망의 근거를 제공하셨다면 아주 효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아내의 불임증이 자손에 대한 소망을 항구적으로 제거함으로 그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만약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 순수한 약속 자체가 냉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아내의 불임증에 대하여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는 소망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된 큰 민족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심으로 그분의 종 아브람을 증거해 주셨다는 이 호의에 찬_행동을 극군 찬양하고 있으며 그는 그렇게 큰 민족이 될 아브람이 고독하며 너무도 자손이 없이 별혈단신 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사22:2). 여기서 명사 '고이'라는 말은 즉 나의 민족'이란 의미인데(4절) 비록 그 말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증스런 것이지만( 4) 여기서 많이 다른 곳에서와 같이 명예로운 용어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씨에서 엄청난 숫자의 자손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 말이 여기서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특이하고 구별된 백성들이며 그들은 그의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될 백성들이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제시하는데 그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네게 복을 주어" ; . 이 말은 이전의 문장을 설명하려고 부가되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실망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그분의 이 복을 제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 자연적인 방법으로 다른 경우에서 효력을 볼 수 있는 것보다는 더 기적적인 방법으로 보다 더 효과를 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선포되고 있는 그 복은 자손보다 더 멀리 적용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모든 일에서 번영하고 기쁨에 넘치는 결과를 갖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다음에 계속되는 문맥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로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어다'라고 표현되고 있다. 모든 곳에서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될 행복이 그에게 약속되어진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아브랍의 이름을 본보기로 삼아 축복을 선포하는 공식으로 소개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합축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첨가된 외미로 사용하면서 너는 북 근원이 될 것이며' 라는 말은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너를 축복할 것이며'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전자의 의미는 다른 것보다 더 적절한 의미이다. 어떤 사람들은 또한 그 말을 적극적으로 주해하여 마치 '내 은혜가 너에게만 거하며 너만이 그것을 누리게 하지 않고 그것이 모든 민족들에게로 멀리 흘러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그것을 너에게 예치시켜서 모든 세상에 흘러 넘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표현된 것처럼 주해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그런 대화의 범위까지 나아가지 않으신 것이다. 그것을 곧 제시해 주겠다.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자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분이 가족적으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신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사람들이 그들의 친구들과 같은 동년배들과 곧잘 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언약을 하고 계신 데서 그분의 특별한 은총이 현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왕들과 다른 왕들 사이에 체결되는 일반화된 도 언 형식이니 이를테면 그들은 상호간에 한 적에 대하여 같은 적으로 그리고 서로 같은 우정을 갖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공손하고: 겸허하게 ,머리를 숙이신다는 사실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특별한 사랑의 서약이다. 비록 여기서 그분이 한 사람에게만 말씀하고 계시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분의 신실한 모든 백성들에게 대하여 그와
똑같은 애정을 선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리를 추론할 수가 있으니, 즉 하나님은 그분의 호의를 베풀어 우리를 너무도 다정하게 안아 주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들의 친구들에게도 복을 주실 것이며 우리들의 원수들에게는 분명히 보복을 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사람들 가운데서 평화스럽게 자신들의 행동과 처신 면에서 주의를 기울여 생환해 온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브람이야말로 가장 손꼽히는 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인정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원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원수로서 마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마귀는 자기의 손에 악한 자들을 붙들고 있는 자이며 그들을 끊임없이 충동시켜 이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원수인데 아브람에게 그런 마귀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말씀으로 무엇보다도 경고를 받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제아무리 화평을 가지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절대로 원수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우리를 중오하고 있다고 해도 세상의 배은망덕이 우리를 새삼스럽게 실망시킬 이유가 .없으며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해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그 전쟁을 담당하고 계신다는 이 단순한 위로로 만족해야 될 것이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모든 선한 사람들과 함께 선의를 갖고 인간상을 갖기를 격려하고 계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든 해를 끼치는 일에서 손을 메기를 원하고 계신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 대한 모든 외무를 소홀히 하고 팽개친다면 하나님이 틀림없이 감아 주신다는 사실이 믿는 자를 도와주도록 우리를 자극시키는 평범하고 흔해빠진 상투적인 유도작전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해친다면 그분이 우리를 대항하여 전쟁을 하신다는 사실을 하찮은 경고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바란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 누가 이 말씀을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택하여 마치 속담 형식으로 말하여 그들의 자녀들이나 친구들을 축복하는 자들은 아브람의 이름대로 그들도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대로 은혜를 받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귀절은 아브람이 행복에 대한 신호를 알리는 본보기로 불려질 것이라는 해석을 지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더 연장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도 똑같은' 약속이 언급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며 단지 하나님이 이후에 다시 더 분명하게 되풀이 하여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22 : 18). 그리고 바울의 유전적인 해석이 이 점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으니 그는 아브라함의 '씨에게 내려진 약속, 말하자면 그리스도에게 내려진 이약속은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갈3:17).
그러나 그 연대를 계산해 보면 그 복이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에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약속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의 판단으로는-. 모든 민족이 그분의 종 아브람 안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시니 그 이유
는 그리스도께서 아브람의 자손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는 아브람이 하나의 예표가 될 뿐만 아니라 도 복의 되어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이해되고 있는 하나의 대조를 이루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과 결별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가 저주 가운데 출생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새로운 치료책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표현이 분명히 그리스도에 관련되어 있으니만큼 그 복을 아브람과 그 자신 안에서만 찾아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이것과 상치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변덕스럽게 반대하면서 성경에서 많은 증거들을 수두룩하게 쌓아 놓고 있으니 그 성경의 증거에서는 어느 한 사람에게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에게 잘 되고 못되는것을 원하는 것 뿐이지 절대로 그 이상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아브람에게 주어진 양식에 의해서 그 성경의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무가치한 트집들은 전혀 문제없이 손쉽게 쓸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때로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사실이며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레 지파가 신명기 10장 8절과 이사야 65 장 16절과 그와 유사한 귀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할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그령게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곳에서 선한 이 것 일부라도 추구하지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시라고 선포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가 불명확한 것을 감안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것이나 또는 다른 의미를 택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해야하며 그 내용과 상황에 가장 적절한 것이 되는 것을 취하게 해야 된다. 이제 바울은 모든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마땅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져야 하고 공리로 여기고 있는 것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은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들은 오직 중재자의 은혜를 통하여 복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론을 내리기를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으신 구원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지는 것을 떠나서는 전혀 인정될 수가 없으며 견고하게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문장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그분의 종 아브람에게 이후에 모든 사람들에게 넘쳐 내려갈 복을 약속하신 것이라는 의미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제목이 다른 곳에서 더 충분히 설명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것을 약간 만지고 지나가는 것에 그치고자 한다.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 하나님이 지금 하란에 있는 아브람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자들은 이 말씀이 자기들의 오류를 지원해 주고 있는 증거라고 우기며 꼭 붙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무가치한 트집은 입사리 배제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모세가 그들의 출발의 원인을 언급한 후에 이를테면 아브랍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고향땅을 떠나라는 명령하심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나서 지금은 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당분간 하란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었던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모르고, 다만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손을 얹어 그가 즉시 그 땅의 광경을 보지 못하게 막으신 것이라는 점이다. 비록 지금까지 그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기의 고향보다는 그 땅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이미 시작한 여행을 완전히 마치려고 하란을 떠났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사실을 다음 귀절에서 확중해 주고 있다. 거기에 보면 그는 자기에게 사래와 조카 롯을 함께 데리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치 그의 아버지 데라의 지시와 도움 하에서 그들이 갈대아를 떠났던 것과 같이 이제는 아브람이 그 가족의 족장이되어 그의 아버지가 시작했던 일을 추구하며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도중에 그의 아버지가 죽는 일이 겹치기는 했지만 여호와께서는 다시 그를 격려하여 나아가게 하셨으며, 결과로 그가 두번째로 말씀하여, 그를 불러주신 이전 그의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믿음의 순종이 찬사를 받고 있는 사실이 확실하다. 그리고 단순히 단 일회의 행동이 아니라 생애의 지속적이며 항구적인 과정으로서의 순종을 믿음으로 한 것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당분간 하란에 남아 있는 것이 그의 소명'을 향하여 곧장 가는 도성에서 빗나가려고 기울어졌던 사실을 회개해서가 아니고 자기 마음 속에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의심하지 않으며 또한 모세도 그렇게 말하려고 의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을 오히려 이렇게 언급하고 싶은데, 즉 첫번째의 말씀으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으므로 모세가 말하기를 크가 그분의 목적에 굳게 서 있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그의 간절함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사건으로도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고 했다. 더우기 여기서 우리는 한 마디로 우리의 전 생애의 주제를 위하여 각자에게 선포되고 있는 규칙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전 생애가 오직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로 통제되게 하려는 구제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덕성들과 의무들에 관하여 때로는 분쟁을 야기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경기도 칭찬을 받을 가치가 없으며 덕성들 가운데 인정받을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증거하시기를 제사보다는 순종을 훨씬 더 고귀한 것으로 여기신다고 하셨다(삼상 15:22).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의존할 때에 을바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분의 명령만을 수행할 때 우리의 삶이 을바로 정립된 것이다. 문만 아니라 여기서 언급되는 그 문제는 비단 어떤 사람의 특별한 일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경건하게 생활하는 이 것의 일반적인 원리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다 부어지고 있는 그 제목은 아브람의 소명이며 그것은 곧 모든 신실한자들의 생활의 공통된 양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렇다고 무작정 우리의 고향
다 비리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인정하거니와 이 점은 아브람의 경우에서 특별한 예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되며 그들의 생활의 규칙으로 그분의 율법을 지키려고 추구해야 하며 그렇게 하여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뜻이나 많은 대중들의 다수에 의하여 부화뇌동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본보기로 전체적인 자기포기가 여기서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살며 죽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5.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 여기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남녀 종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노예에 대하여 처음 언급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우리는 홍수가 난 후 사람들의 죄악이 본래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되었던 자유를 말살시키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노예제도가 전장에서 기원되었다고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의견을 떠나서는 과연 그 기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복자들은 전투에서 그들이 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서 자기들을 섬기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노( 4)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노예였던 그들의 전쟁의 법규로 복종당해서 그렇게 노예가 되었는지 또는 결핍으로 인하여 이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는지 간에 단지 확실한 사실은
자연의 질서가 무참히도 침해 당했으니, 그것은 인간이 서로간에 상부상조의 사회를 개발시키려는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는 역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가 침범을 당하고 파괴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휘해야 되는 것이 편리한 점이긴 하지만 그러나 동포들 가운데서와 같이 평등성이 반드시 유지
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노예제도가 그런 을바른 정치제도에 역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정부에 대치되고 있으며 그 노예제도의 시초에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그 후에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필요에 의하여 집행되었던 그 제도의 이용이 불법적이라는 것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돈으로 산 종들과 자기 집에서 출생했던 노예들을 소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지배적인 것이 아닌 것은 시간의 길이로 그것이 유효화될 수가 없다'는 속담은 잘 알려진 대로
몇가지의 예외를 시인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48장에서 그 점에 대하여 하나의 예를 보게 될 것이다.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 여기서 모세는 아브람이! 그 땅에 들어가는 길에 즉시 자기가 안주()할 수 있는 처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통과하여'라는 그 표현과 그가 지나간 곳의(세겜) 위치는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먼 여행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은 그리심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며 남부 지역의 '사막으로 향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의 신앙이 하나님이 그에게 '안정되고 확실한 처소를 주시기 전에 모든 땅을 쏘다니는 방랑자로서 그에게 고통을 주실 때에 다시 한번 시험을 이 받게 된 것은 모세가 전에 언급한 사실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발 하나 불일 만한 조그마한 땅도 주지 않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 얼마나 믿기 어렵게 보였겠는가? 그러나 '그는 보다 철저하게 자아부정(self-denial)을 실현하고 단련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과정을 방황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엘론'이라는 말은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상수리 나무 숲이라고도 하며 다른 자들은 계곡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5).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그곳의 고유명사로 여기고 있다. 나는 모레라는 말이 장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는 데에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엘론이라는 말은 '평원'을 의미하는 말이든지 또는 상수리나무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싶으며, 그것은 단지 한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여기서 단수는 복수( 6)를 가리키며 사용되어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해석을 나는 가장 인정하고 있다.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가나안 사람들에 관한 이 귀절은 무작정 첨가시켜 놓은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성이 결핍되어 있는 불신과 죄악스런 사람들 가운데 던져지는 것이 가벼운 시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상황에서 그 거룩한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그는 오직 생각하기를 이제야 나는 가장 방탕한 사람들의 손에서 시달리도록 버림을 받았구나. 이제 그들이 머지않아 나를 죽이게 될거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또는 처참한 생활과 사사건건 방해를 받는 생활이 계속되는 상태와 고통 가운데서 해야만 될 신세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는 달랐으니 그런 단련과 시련을 통하여 보다 더 나은 소망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상태에 그가 익숙하게 되는 점이 그에게는 더 유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가나안 사람들의 친절과 정중한 예의로 환대를 받았다면 그곳에서 하나의 귀빈으로 지내는 생활보다 더 나은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그의 생각을 보다 차원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셔서 결국 머지않은 장래에 그곳의 정착인들이 모두 멸망될 때에 그가 그 땅의 주인이 되며 상속인이 될 것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짓게 하신 것이다. 그 외에도 이 편히 쉴 곳을 계속 상실하고 있는 그의 처지로 인하여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생활에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땅의 정착이 자기에게 특별히 약속되었으며 그것이 자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속하게 될 것이므로, 자신이 지금 굉장한 천대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그 땅은 그 자신에게는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된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늘나라 그 자체가 그가 마지막으로 가서 안식하는 곳으로 그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 모세는 이제 아브람이 모든 것을 상실하고 혼자 외톨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을 뻗치시고 그를 도와주시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도움으로 아브람이 당하고 있는 시험에서 구조하고 계신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순전한 말씀을 제공해 주셨다. 그리고 사실상 그런 방법으로 아브람이 자신은 어리석은 자라는 사실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선언하고 계시지
만 지금 그에게 자식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 자식을 가질 소망마저 끊어진 그가 아닌가? 그는 아직까지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고령의 노인이 되었으며 그의 아내는 불임 여자로 늙었는데 과연 어떻게 자식을 낳아서 그 땅을 상속받는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위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다른 면을 맛보게 되는 것이니 경외함으로 말씀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경건한 자들의 모든 지각들을 붙잡는 데에, 재산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단 하나의 약속으로 충분한 재산인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길 수가 있는 충분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그분의 종들이 참고 견디어 내는 악한 자들
을 삭감하시고 완화시키지만 그렇게 하신 것은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편리한 범위 내에서 하신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우고 있으니, 즉 이 한 가지 치료방법이 우리의 고통들을 위하여 너무도 충분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분임을 우리들이 깨닫게 하시려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치덕거리는 귀찮은 욕망에 얽매이지 말자. 그것이 이 귀절에서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
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는 절대로 실수가 없으시며 우리가 비천한 곳에 던짐을 당할 때에도 그분의 사랑을 베풀어 우리를 끌어 올려주실 하나님이시다.
"그곳에 단을 쌓고" ; .이 단은 감사하는 표였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즉시로 그는 단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감사를 드리려고 마음 속에 품고 있었으며, 제단은 하나님이 사랑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쌓았던 사실을 보게 된다. 만약 누가 아브람이 제단이 없으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 하겠다. 즉 사람들 앞에서 외적인 공언이 첨가되지 않고 마음 속에 있는 내적인 예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종교는 사실상 그 특유의 자리를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근원에서 그 종교의 열매로써 후에 대중 앞에서 하는 고백이 우려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모두 드리게 하려고 창조된 것이다. 가나안 사람들도 그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제단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들의 미신들에 합류하지 않으려고 가정제단을 쌓고 그 위에다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마치 그의 집 안에서 가장 고귀한 왕적인 보화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한 것처럼. 비장한 생각으로 제단을 쌓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은 영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올바르지 않고 정당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모든 의식들은 그것 자체가 헛되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선적이고 현혹시키는 겉모양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예배를 망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가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제단이 쌓아졌다고 하는 말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외적인 형식이다. 그러나 '기원'이 그 제단의 본질이며 진리이다. 이 표는 순수한 예배자들과 위선자들을 쉽사리 분별해 주는 것이다. 위선자들은 외부적인 화려함에 지나치게 치우치고 있지만 그들의 종교는 순전히 외식들에만 국한되기를 바라고 있는 자들이다. 그 결과로 그들의 모든 종교는 분명한 목적을 상실하고 모호하며 방황하는 아리숭한 것이다. '사실상 그들의 궁극적인 외도는---그들이 혼돈스럽게 말하고 있는 대로----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경건한 자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외관적인 모양에 주력하지 않고 오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진리와 본질을 존중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외식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관계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받아주시지 않은
의식들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또는 그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것은 이중적인 주해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이나 그분의 이름을 찬양으로 기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도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서로 연합되어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이 '두가지를 함께 포함시킨다. 제 4장에서 우리가 언급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예배는 이런 특이한 표현인 대유법( ; synechdoche)의 비유로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이 시편 1편 23절과 51편 19절에서 선언하시고 있는 대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경건한 자의 의무를 더 고귀하게 평가하신 것은 없으며 보다 즐겨 받으시는 제사가 없다고 여기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전 예배가 대유법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제단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빈도만큼이나 제사라는 말도 우리의 마음 속에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로부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접근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일반적인 원칙에서 아브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제사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의 성소를 개설하여 하나님을 곧 바로 예배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7).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짐승들의 피로는 절대로 그분의 노여움을 달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은 아브람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피(8)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브람 자신이 계단을 기꺼이 지었으며 비록 그가 제사장도 아니며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명령도 받지 않은 그였지만 그 일을 자진해서 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호한 점이 있는 듯하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자 한다. 즉 모세는 문맥에서 이런 의심을 제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단순히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아서 다. 바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아서 바친 것이라고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제단은 그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은 그것이 형성되고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부속물이 되는 것에서 절대로 분리될 수가 없다. 미신들은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이 좋아하는 대로 신 거짓으로 조작하여 그것에게 여러가지 형식의 숭배를 적용하고 고안해 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도들이 자기들의 어리석은 겉치례로 장난을 하며 가장 거드름을 떨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교만스럽게 자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브람의 경건은 분명히 여기서 찬사를 받고 있으니 그것은 제단을 세우고 난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경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모세가 아브람이 거기서 .하나님을 불렀다고 설명할 때에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던 계획을 선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다음에 사실을 암시하고 있으나 그런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아브람이 올바로 하나님을 불렀다고 선언하고 계시는 성령의 인정 을 항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찬사를 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모든 의식들을 그분의 이름을 더럽게 모독하는 것이라고 배칙하고 계신다.
"8.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곳에서 옮겨왔다는 말을 우리가 들었을 때 그도 어떤 필요에 의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거기서 그는 몰인정스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성막을 다른 곳에다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브람이 그의 방랑길을 지속해서 끈질기게 감당했다면 우리의 까다롭고 핑계가 많은 자세는 도저히 변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시 않으면 당장 그분에 대항하여 불평과 원망을 퍼붓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늘을 열어 주시고 날마다 그분과 초대하고 계실 때 만약 그분이 우리가 함께 거기서 거하면서 살자고 우리를 그 사실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될 수밖에 없도록 선택하신 것이라면 절대로 그 사실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귀절 전체의 의미는 이것이니 아브람은 거처할 곳(9)
없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명칭은 사도바을에 의해 들려지기도 한다(고전4 : 11) 더우기 벧엘이라는 말에서 명백한 예변법(prolepsis) 있다. 왜냐하면 모세가 그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자기의 대화를 적응시키려고 이곳에다 이 이름을 붙여주고 있기 때문이
다.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 모세는 아브람이 지니고 있는 그의 지칠줄 모르는 헌신적인 경건성을 찬양하고 있다. 그것은 이 말들로 아브람이 방문하는 곳마다 거기서 하나님을 외적으로 경배하는 면에서 자신을 단련시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말한 자들과 함께 어울려서 의식을 갖지 않으려는 것이며 또한 자기의 가족을 엄숙한 경건으로 유지시키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원인에서 그는 적잖은 적개심을 받는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악인들을 화나게 만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와는 다른 종교를 그가 따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브람의 이런 이색적인 종교행위로 그들은 자기들이 멸시를 당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들을 장님으로(as blind) 정죄하고 있는 것을 그들은 감지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나안 사람들이 잔인하고 교만하여 자기들을 모욕하는 지들은 언제라도 기리지 않고 보복하였던 지들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아마 아브람이 자주 이사를 다녔던 이유였을 것이다. 즉 그의 이웃사람들은 아브람이 쌓은 제단을 자기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빈번하게 정착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호의로 간주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하나님은 뛰어나신 분이심을 증거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시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으로도 그 하나님을 절대로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10)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의 생명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위하여 사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다.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 . 아브람이 어떤 처소를 찾은 것으로 보인 후에 이것은 짧은 기간내에 이 거룩한 사람의 세번째의 이사였다. 그는 자신의 발 붙일 곳을 위하여 자진하여 여기저기로 쏘다니는 것이 아니라-----흔히 경솔한 사람들이 곧잘 하는 것과 같이-------오직 그를 몰고 다녔던 것은 분명한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계속적인 습관으로 그가 나그네일 뿐만 아니라 그가 주인인 땅에서 비참한 방랑자라는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 주려고 그렇게, 끌고 다니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변화에서도 빚어진 결과는 일반적인 열매가 아니었으니 왜냐하면 자기 안에 주어지고 있는 만큼 모든 역량을 다하여 그가 접근하는 곳에서 하나님에게 헌신하려고 노력 했다. 그리고 그 .헌신적인 생활을 그의 믿음의 향기로 풍겼던 것이다.
@4 ; 유대인들이 이 말을 싫어하는 것은 바로 다음의 사실에서 야기되고 있는데, 즉 그들은 그것의 적용을 이방인들, 야만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국한시키고 있다. 요약하면 육신에 의한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사실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성경에서 보증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칼빈이 그점을 을바로 논증하고 있다.
@ 3 예변법(prolepsis)은 하나의 비유인데,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는 일에 대하여 담화 가운데서 예측하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 벤엘이라는 말이 그 당시에 투스라고 불려졌던 곳을 지적하려고 사용되었는데 그 이름은 야곱이 부르기 이전에는 그렇게 불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 1 . 박식한 많은 주석가들 특히 그들 가운데 클라크(A.Clarke) 박사는 이것이 하나님이 두번째, 부르시는 소명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그가 하란에 있을 때 되어진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에 대하여 칼빈이 첨가하고 있는 반론은 상당히 무게가 있는 주장이며 그리고 쉽사리 밀어 제쳐놓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