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선생주석/마태복음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9:14)

은기철 2025. 2. 19. 13:33

1. 성경 (마9:14 ~ 17)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5)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6)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1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마가는 이 둘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리새인들”이 악의적으로 이 술책을 써서, "요한의 계자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요한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서로 싸음을 붙이고자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도”와 "금식” 간의 유사성온 여기에서 이 둘이 서로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구실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고분고분하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거나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자들에게 적대감과 협오감을, 블리일으키는 빌미가되었다. 이 예는 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아주 사소한 빌미를 붙잡이서 우리 가운대에 분열의 씨를 뿌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려분별과 조심성이 꼭 필요하디는 것읊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사탄이 그러한 덫을 놓는일에 귀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사소한 빌미를 붙잡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식은 죽 먹기 보다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예식들이 빌미가 되어서 히나 된 믿음이 갈라지거나 사랑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지 않오면·안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예식들 및 "세상의 초등학문"(갈 4:3; 골 2:8)에 지나친  중요성을.부여하는 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대체로 지극히 온전한것보다도 너무나 초보적인것들을 우선시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게다가 각 사람이 온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강요하고자 할 때, 까다롭고 괴팍한 마음과 교만으로부터 또 하나의 악이 생겨난다. 즉, 어떤 것이 우리의 마음에 들면, 우리는 즉시 그것을 법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원하는그것을 따라 살아갸도록 강요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요한의 제지들"이 사탄의 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도록 깅요하지 않고 각 사람이 각자의 자유를 견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적이고 중립적인 일들에서 거룩함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아울러서 우리  자신을 절제와 공평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금식"과 "기도"와 관련해서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켰고, 바로 그런 목적으로 금식하는 날들 및 기도의 형태와 시간들을 정해 놓았다. 나는 그러한 기도들을 외적인 외식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것이 영적인 예배에서 최고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기도의 형태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방식은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을 위한 것이어서, 예식들과 중립적인 일들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땅하므로, 그것을 지키라고 너무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 및 금식과 관련해서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보다 더 엄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이 문제를 더 적절한 기회가 다시 찾아 올것이다.

 

"15. 혼인집 손님들이 ~~~ 슬퍼할 수 있느냐."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아직 아니라 이유를 들어서 자기 제자들을 변호하시면서, 하나님은 마치 그들이 혼인 잔치에 있는 것처럼 아직 즐겁게 지내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신랑에 비유하시고서, 신랑과 함께 있는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토무스(Chzysostomus)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는 세례 요한의 중언에서 이 비유가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주장이 확고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런 견해에 반대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그 제자들을 아끼셔서 잠시 평안하게 두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만족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단지 짧은 기간 동안 누리게 될 은택들을 남들이 시기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 제자들이 머지않아 좀 더 가혹하고 혹독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변호는 "금식"과 "기도’가 술품과 역경의 때에 행하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여기에서 기도라고할 때,그것은 통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특별한 기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점진적으로. 점점 더 큰 인내에 익숙해지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이 더 큰 힘을 얻기 전에는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자 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한다. 첫 번째로, 주님이 종종 우리 형제들의 연약함을 용납하셔서 그들을 온유함으로 대하시는 반면에, 우리에 대해서는 더 혹독하고 엄격하게 대하신다고 해서, 우리는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 두 번째로, 우리가 종종 슬픔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즐거움들에 내던지지 말고, 반대로 혼인 잔치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조심하여야 한다. "혼인집 손님들"은 원문에서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신랑의 자녀들"로 되어 있다.

 

"16. 생배 조각을 ~~~  블이는자가 없나니" ;. 그리스도께서는 앞에서 하신 말씀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밑받침하시는데, 그 중 하나는 "옷”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를 담는 가죽 부대에 관한 것이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바 리새인들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와 "생베"는 복음의 가르침을 가리킨다는 주장은 전혀 개연성이 없다. 우리가 전자는 그리스도의 연약하고 여린 재자들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엄격한 훈련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한다면, 이 비유는 현재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와 아주 잘 들어 맞는다. "낡았다”는 말은 이제 막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제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을 "낡온 가죽부대’’ 와 "낡은 옷’’에 비유하실 때, 그것은 그들이 오래 되어서 낡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연약해서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취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무차별적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각자 사정과 형편이 다르고, 모든 것이 모두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며, 우리는 특히 연약한 자들이 강압에 의해서 부러지거나 무거운 짐에눌려서 부서지는 일이 없게 하여야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이 포도주통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가죽 부대"라고 하신 것은 그 나라의 관습을 따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눅 5:39. 목은 포도주를 마시고" ;. 이 말씀은 오직 누가 본문에만 나오는 것으로서, 앞의 강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시켜 왔지만, 나는 이 구절은 단지 바리새인들에 게 기존의 관습에 부당하게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말씀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관습과 습관에 의해 형성된 입맛이 아니라면, 맛이 변하지 않은 묵은 포도주가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똑같이 맞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묵은 포도주" 가 "새 포도주"와는 달리 신선함으로 인한 거품이 넘쳐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결코 맛이 덜한 것도 아니고,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행하시는 방식도 겉보기에 그럴듯 해 보이지 않고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 호크마주석 [호크마 주석이 이성구에 대하여 잘된 주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으나 참고로 Up load함}

=====9:14
그 때에(* , 토테) - 앞뒤 상황의 연속성을 나타낸 말로서 마태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 여기서 마가는 당시 '혹'(some people)이라고 언급했고, 누가는 질문자를 바리새인으로 적고 있다(눅 5:33). 아마 금식 문제에 있어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한편 이 당시 요한은 헤롯의 일로 투옥된 상태였는데(4:12), 이 상황에서 요한의 몇몇 제자들은 자기 스승보다 권위에 찬 메시지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강력한 증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수했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치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 아마 이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인 요한이 메시야의 선구자였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기들과 예수의 제자들 간에는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율법준수, 특히 금식에 관한 외형적 차이가 있는가하는 점을 그들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다(눅 18:12). 이와 같은 금식 규례는 유대 지방에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관습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요한은 자신이 금식을 폐기시킬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금식의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다.

 

당신의 제자들은...아니하나이까 - 이 질문은 아마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헤롯에 의해 수감된 이후 찾아와 질문한 내용으로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투옥으로 인해 대단히 슬퍼하는 중에 있으면서 금식을 준수했던 것 같다. 금식이란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선구자요 또 세례를 베푼 자인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9:15
혼인집 손님들이(* , 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 이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이란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는데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丈人)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였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에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 바가 있다(요 3:29). 따라서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으며(사 54:5, 6; 62:4, 5; 호 2:16-20),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이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야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한편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비유한다(25:1; 고후 11:2; 엡 5:32).


신랑을 빼앗길 날 -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가리킨 표현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설사 그 중에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기 전날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던 것으로서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만약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고 또 마치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떤 큰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때는 바로 신랑되신 주님을 잃게될 때인 것이다.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 왜 금식하지 않는가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두번째 예화이다. 누가는 이 예화를 비유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눅 5:36).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나포스'(* )는 한 번도 세탁이 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든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이 된 적이 있고 또 올이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어짐을 더할 뿐인 것이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이식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이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세번째 답변이다. 내용상 이 세번째 예화는 두번째 예화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이다. 근동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리석게도 배합하려고 한다면 하나는 파괴되고 만다는 뜻으로서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여기서 먼저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 ,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째번의 '새'(* ,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지금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조직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16:18; 18:17).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의 교훈과 구약의 율법은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견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태는 계속해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연관시키면서 예수의 사역이란 바로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입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6,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두 비유는 시각에 따라서는 금식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예수의 새로운 교훈이 금식과 같은 유대주의적 의식에 맞게 변형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질서인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대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