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16:14)
1. 성경 (행 16:11 ~ 15)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1)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2)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3)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4)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1, 12절" ; 이 이야기는 특별하계 강한 자들만이 이겨낼 수 있는힘에 겨운 어려움을 주심으로써 주님께서 자기 사람들의 믿음과 인내를 얼마나 예리하게 연단시키셨는가를―마치 거울에서처럼-잘 보여 준다. 바울이 마게도냐에 들어갔을 때의 형편은 그 환상에 대한 확신을 버리게 될 정도의 형편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속했던 일을 버리고 마치 마게도냐 온 민족이 열렬하게 도움을 구하고자 나와서 그들을 영접이나 해 줄 것처럼, 그 거룩한 사람들은 급히 바다를 건넜다. 이제 그듈이 찾아 온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어긋나게 되어 그들이 전도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은 모조리 닫혀 있었다. 그 지경의 가장 큰 성에 들어간 이후에 그들은 봉사해 줄만한 사람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의 왕래가 드문 외딴 곳에서 전도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가야 했다. 그곳에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을 하나도 만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한 여자를 얻게 되었는데 그 여자마저도 그곳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그들의 여행이 이처럼 성과가 없게 되었을 때 이는 어리석고 극히 상서(祥瑞)롭지 못하게 행동한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그처럼 비천하고 무력한 형편속에서 자기의 일을 추진하고 계신다. 이는 자기의 능력이 마침내 더욱 명백하계 빛나도록 하시 려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나라가 시작될 때 이러한 경로를 따른다는 것은 필요했다. 이는 그들이 십자가의 비천함을 맛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이 가진 참을성을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그처럼 형편이 나쁜 시작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예상을 넘어 나타날지도 모를 가장 희박한 기회라도 붙잡아 보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온갖 종류의 장애물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어려움 앞에서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오늘 수고하여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일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라고 해서 바울보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되도록 구해야 할 이유란 없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 성에서 유하다가"(o,arpt,BovnS'; 디아트리본데스)라고 말했는 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의논했다' 혹은 ‘논쟁했다’라는 의미를 택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택하고 있는 번역이 더욱 단순하며 문맥올 보아도 그 번역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조금 뒤에서 누가는 루디아가 그 교회의 첫 열매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 밖으로 나갔었다고 단정하여 말하기도 쉽다. 왜냐하면 성 안에서는 그들이 전도할 수 있는 문이 전혀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3 안식일에~~~~~" ;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고자 했을 때 한적한 곳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어디에서나 그들의 신앙은 큰 미움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보인 모범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고백을 얼마나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셨다. 분명히 우리는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거나 위험이 있는 경우에 두려움 때문에 우리 믿음의 고백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물론 유대인들은 여러 곳에 회당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식민지였던 빌립보에서 공중집회를 연다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인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경꾼들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 자유롭게 기도하기 위하여 구석전 곳을 택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괴로움과 위험을 주는 악한 마음을 가진 자둘로부터 자유롭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평안과 편의보다는 하나님께 드라는 예배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안식일’이란 말로부터 누가는 유대인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둘째로 누가가 루디아의 경건을 칭찬하고 있는데 루디아는 유대여자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사실에 관해서는 긴 논쟁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거나 유대인의 집을 행한다는 것은 큰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유대인들이 기도의 장소로서 강가를 택한 것이 미신 때문이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들을 피하고자 함이었음울 알게 되었다. 각 사람이 집에서 사적으로 기도하지 않던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대한 쉬운 대답이 있다.
이 기도의 의식은 경건을 보여주는 습관이었으며 이방인들의 미신과는 다르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서로를 격려하고 조상들로부터 받은 신앙을 자기들 중에서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좀 별난 방문자들이었던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에 관하여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떤 성공을 얻기 위하여 그 곳에 있다고 믿는 것도 당연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은 소란스러운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르치기에 적합했으며 기도하기 위하여 거기 모인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누가는 ‘안식일' 대신에 ‘안식을 위한 날'(tt7)이라고 썼다. 본 절에서 나는 에라스므스와 같이 ‘기도는 습관적이었는데'라고 번역했으며 벌게이트 성경에는 ‘……인 것처럼 보인다,(莊8)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동사 '노미 제 스다이' 는 두 가지를 다 의미 하고 있다. 어떻든 '습관에 따라서 기도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본질에 잘 어울릴 것이다.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 그곳은 여자들만이 모이기 위하여 마련된 곳이었든지, 남자들이 그곳에 잘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신앙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든지 어느 한 경우였을 것이다. 형편이야 어떠했든간에 우리는 그 거룩한 사람들이 기회를 등한히 여기고 있지 않았음을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자들만을 상대로 했어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거리낌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그 곳에서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기도한 것 같은데 누가가 남자둘을 언급하고 있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전도에 귀 기울이기를 싫어했는지 그들이 듣기는 했어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했는지 그 어느 한 경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14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 만일 적은 수의 여자들만이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면 그들의 전도는 좁은 틈을 통하여 스며드는 것과 같았다. 실제로 한 사람만이 주의를 기울여 효과적으로 듣고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실 길이 막힌 것처럼 보여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후에 그 연약한 싹으로부터 훌륭한 교회가 돋아났으며 바울은 이에 대한 칭찬을 굉장한 말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루디아에게 동행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루디야가 그들보다 훨씬 두드러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는 이 한 여자가 가르침을 잘 받는 모습을 보여 준 이유를 그 여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예리한 재치를 가졌거나 자기 스스로 마음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밀하지 않는다. 대신에 누가는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바울의 말에 유의하도록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누가는 루디아의 경건을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지 않았으면 그 여자가 복음의 교훈을 이해할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믿음 뿐만 아니라 신령한 것에 관한 온갖 이해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사역자들이 말씀을 전할지라도 하나님의 내적인 부르심이 동시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성과도 없게 될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음’ 이란 말로 성경은 때로 ‘정신' 올 의미한다. 이는 모세가 "깨닫는 마음~~~~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 : 4) 고 말했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누가는 루디아가 성령의 영감에 의하여 감동을 받아 마음의 느낌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 뿐만 아니라 이해를 위하여 그 여자의 정신도 밝아졌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사람들의 우둔과 우매는 극히 심하여 하나님께서 새로운 귀와 눈율 만들어 주시기 전에는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함을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주께서 그 마움을 열어" 그 여자가 가르치는 자의 외적 음성에 유의하계 되었다는 말씀을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파되는 것이 그 자체는 생명이 없는 의문(儀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릇된 생각이나 은밀한 빛과 유사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를 이탈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되고 근거한다. 성령의 은혜가 많아지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헛된 영감, '엔두시 아스무스' 을 조작하여 말씀이 전파되어야 하는 필요에 대한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두 가지의 분리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들의 사역과 성령의 은밀한 영감을 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루디아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바울의 설교는 말(literalis)로서 그쳤을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한 계시 뿐만 아니라 자기 말씀에 대한 경의의 태도를 주심으로써 루디아를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말은 그렇게 해주지 아니하셨을 경우에,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인데, 하늘로부터 임한 빛의 은사를 받아들인 그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배격하기 위하여 성령만을 내세우는 광적 신앙자들의 주장에 더 이상 귀기울이지 않기로 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누가가 여기서 세우고 있는 균형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균형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경우에 그 말씀으로 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말씀에 대한 확신을 넣어 주시고 그 다음에 말씀을 새겨 주시려고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단지 한 여자의 마음만을 열어 주신 이유를 묻는다면 생명을 얻도록 미리 정해진 자들은 믿게 된다는 원칙으로 되돌아갈 팔요가 있다. 왜냐하면 루디아의 속에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똑똑 하계 알도록 했으며 이렇게 된 것은 은혜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다. 지리학자들은 두아디라가 헤르무스 강(river Hermus) 언덕에 위치하여 한 때 펠로피아(Pelopia)라고 불리었던 성으로서 루디아가 살았던 곳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성이 브루기아 지방에 속한 곳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무시아 지방에 속한 곳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5 저와~~~~~. 세례를 받고," ; 이 짧은 시간안에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마음 속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역사하고 계셨는지는 이 말씀올 보면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바울이 루디아가 세례를 받도록 허락하기 전에 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주님께 충성을 드리기로 작정했음에 의심이 없다. 이는 참되며 신속한 행위에 대한 모범이 었다. 그리고 루디아의 열심과 경건은 자기와 함께 자기 식구들을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한 사실 가운데 서도 잘 보여진다.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과 같은 신앙을 갖게 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의욕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와 남며 종들을 다스리고자 하면서 그들을 그리스도께 드리고자 스스로 수고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될 수가 없고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권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실한 자들은 자기의 가정이 교회의 모습을 갖도록 질서를 갖추는 데 수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루디아가 자기 식구 모두의 마음을 강제로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명령하여 그리스도께 굴복하도록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은 루디아의 경건한 헌신에 복을 주셔서 저가 그 식구들을 순종케 할 수 있도록 하셨다.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자기 가정에 미신이란 어떤 것이든지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경건하지 못한 식구가 있지 않게하며 식구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항은 자신과 함께 그의 모든 종들도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가 그의 집에 질서를 세우는 데 기울였던 그 관심은 칭찬을 받았다.
한 가정의 머리되는 사람이 이렇게 해야 한다면 한 나라의 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사람들 가운 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지 않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
"청하여 가로되. " ; '.'만일 나를……믿는 자로 알거든"이란 루디아의 말은 맹세와 갈은 힘을 가진 말이다. 이 말은 "당신들이 세례의 표로써 확실히 중명해 주신 그 믿음에 의하여 간청하오니 제가 드리고자 하는 대접을 물리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뿐만 아니라 루디아는 자기가 복음을 사랑함에 있어서 얼마나 열정적이고 신중한가를 그처럼 열렬한 소원으로 확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은 바울이 사역을 계속하기 위하여 더욱 격려를 받도록 루디아에게 그같은 마음과 태도를 허락하셨음에 의심이 없다. 이는 자신이 관대하고 친절하계 대접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가르친 일에 대한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동행자들을 대접하려는 그 초청은 루디아가 한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이와 동일한 사실은 루디아가 그들을 연하여 ‘강권'했던 사실에도 적용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사용하셔 서 친히 자기 손으로 그들을 붕잡아 두시는 것과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