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1 ~7)
1. 성경 (창4:1 ~ 7)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1)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2)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6)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 모세는 이제 인류의 증식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이 역사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라’ 라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은 죄로도 폐지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아담의 마음이 신적인 확증을 갖게 되어 이제 공포 때문에 좌절되지 않았으며 자손을 생산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손을 갖는 벽두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전정한 부성애적(父性愛的)인 관대(寬大)를 인식하게 되었던 것과 갈이 후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자신의 죄의 지독한 결과를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의 해설을 주시해 보자! 비록 모세가 가인과 아벨이 쌍동이라고 시사(示峻)는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그들이 쌍동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최초로 아기를 잉태한 하와가 첫 아기를 낳았다고 그가 말한 바로 직후에 그녀가 다시 다른 아기를 낳았다고 곧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번 출산을 시사(示峻)하면서 그는 단지 새로운 복이 특별한 기쁨을 주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후손들이 아주 많고 막대한 죄악둘에 빠진 것을 미처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이 이미 그 죄악들로 저주를 받았으나 가장 비통한 슬픔을 겪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의 슬픔의 추념이 자기 둘째 아들에게 준 이름에서 남아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공통된 거울을 들고 그것으로 그녀의 모든 자손(子孫)들에게 인간의 ‘공허성' (空虛性)을 충고(忠告)해 주려고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와가 자기 자신의 공의롭고 거룩한 아들을 역시 자기의 사악하고 버림 받은 아들과 비교하는·면에서 배격해야 될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판단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은 나로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와는 왜 하필이면 그녀가 첫 아들을 낳고 자신을 축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의 둘째 아들에게는 인간의 모든 공허성(空虛性)을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하여 회상되게 함으로 그들 자신의 죄악(罪惡)들에 관하여 부지런히 회상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게 하려는 데에는 그녀의 잘못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 그 두 형제가 결혼하여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 지 또는 각자가 별도로 분가하여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모세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확실만 것으로 남겨 둘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이기 건에 결혼을 했다는 가능성은 있는 것이 다. 왜냐하면 모세가 바로 직후예 그가 자기 아내를 알았으며 자녀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결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들 두 사람은 생활 자체로는 거북하고 칭찬 받을 만한 생활을 했다. 왜냐하면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며 또한 양치는 것도 유용한 것에서 뒤지지 않을 명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전원 생활의 전체가 정말 천진스럽고 단순하였으며 모든 것의 대부분이 자연의 질서예 적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아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엇보다 먼저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즉, 그 두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노동에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발휘했었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인간 생활의 공통적인 용도에 필요했던 것이다. 거기에서 추리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에 의하여 교육을 잘 받은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들이 보다 충분하게 이 사실을 확증시켜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인의 생애는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아주 잘 규제(規制)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의무를 개발시켰으며 정직하고 공정하게 노동을 하여 자기의 힘으로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삶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한 가족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으며 건전한 아버지가 되었으므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더우기 여기서는 전에 우리가 언급한 것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보는 것도 적당한 기회인 듯하다. 그 때 우리는 첫 인간들이 비록 신적(神的)인 사랑의 상징을 그들이 생명나무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금지 당할 때에 박탈당하기도 했지만 그것만 박탈당했지 아직까지는 구원의 소망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구원의 소망에 대하여 희생제사에서 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있지 말아야 할 것은 제사드리는 풍습이 아무 생각없이 무작정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알려준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도가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열납된 것의 숭고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렸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그냥 그 제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히 11 : 4). 그리고 두번째로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낫다고 하는 사실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사실화되어 왔다는 점이다(삼상 15: 22). 그리고 그 순종이 모든 덕성들의 으뜸이 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는 이런 추리를 내릴 수가 있으니,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배웠다는 점이다. 세째로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단순히 육신적이며 외관적인 경배로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다. 그러나 최초의 시대에 그들의 제사를 기쁘게 열납하시려고 작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더 부연하여 말하자면 그들은 영적으로 그분에게 드려졌다는 것이니, 즉 거룩한 조상들이 공허한 의식으로 하나님을 비웃은 것이 아니고, 보다 장엄하고 은밀한
것을 이해할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도저히 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내적인 진리인데 즉 그 영원한 중표로 하나님을 진실하고 합리적으로 예배하는 것과 헛되고 미신적인 형식과 구별지어 주는 진리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들이 이런 은총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면 절대로 그들의 마음을 진지하게 하나님께 헌신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발적인 경외심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의식하고 확신하는 데서 솟구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자기 자신에게 적대관계로 생각하는 자는 몹시 두려움과 공포를 안고 그분에게서 멀리 도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최초로 그분의 은혜에 대한 약속의 표로 주신 생명나무에서 멀리 떼어 놓으실 때에 하나님은 직접 다른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화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시고 선포하신 것이다.
누구라도 여기서 모든 민족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이런 제사들에는 전혀 순수하고 확고한 종교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다 마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합법적인 것으로 그런 제사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후에 가서는 혼합된 모방으로 변질되어 이방인들에게 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히브리어 '민카'라는 말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원래 '선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말이 모든 종류의 헌납물에 일반적으로 적용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이유로 다음과 같이 추리하게 되는데, 즉 제사에 관한 명령은 태초부터 조상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니 그 이유로서 첫째는 경건을 실천하는 생활을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시키려는 목적에서였으며 그들 자신이 모두가 하나님의 후손이라고 공언하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은 것으로 여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해지려면 이 속죄의 필요성에 대한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 목적에서 그런 제사제도를 분부하신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재산 가운데 어떤 것을 바칠 때에는 현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드림으로 증거하는 것처럼 엄숙한 감사가 되는 것이며 실제로 그런 마음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축의 제사와 피를 때내는 것은 보다 깊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헌납자(offerer)는 그 목전에서 죽어가는 짐승을 보아야 된다는 결론이며 그것을 보고 우리를 죽이지 않고 살려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온혜를 베물어 주셨는가를 깨닫고 그분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담의 제사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 여기서 하나님은 호의를 내려주신 인간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심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관찰하고 있는 순서를 눈여겨 보아야 된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단 아벨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부터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인격을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로 모세는 하나님이 다른 행위들은 절대로 호의를 가지고 열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이전에 받아 주시고 인정하신 그 행위자를 보고 호의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전혀 놀라울 것이 없는 사실은 바로 이것이니 인간은 외관적인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심중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이다(삼상16 ,7).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들의 진정한 마음에서 드러는 것 외에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마음 속에서 나오지 .않은 제사를 드린다면 사람들의 눈에는 제 아무리 아름답고 놀라웁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악한 자의 제사로 여기고 거절하시며 그것을 싫어하신다.
왜냐하면 만약 영혼이 타락되어 있는 자는 단지 만지기만 하여도 모든 사물들이 불결하여지며,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불결하
기만 하여도 모든 것은 불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지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정결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가식된 의를 거절하실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손이 죄투성이라는 사실을 들어 그 분은 반대 하셨다(사 1 : 15). 학개도 이와 똑같은 이유로 위선자들을 대항하여 싸웠다. 행위의 외관적인 모양은
지나치게 육신적인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있으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이방인들도
모르는 자들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대하여 온전하고 잘 절제된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시들을 보면 거기서도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손을 필수요건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도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손을 깨끗히 씻는 엄숙한 의식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제 다른 곳에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성령님이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게 하사"(행15 : 9)라고 한 사실과 거룩한 족장들의 경건성도 역시 그와 똑같은 류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감안 해 볼 때, 여기서 히브리 저자가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인의 것 보다 월등하게 나온 것이었다고 하는 지론이 지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해야 하리니, 믿음외에 다른 수단으로 한 일들이 제 아무리 그 자체로는 성대하고 호화찬란하게 보일지라도 그리고 의를 내려주신 인간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관찰하고 있는 순서를 눈여겨 보아야 된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단지 아벨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었다고 언급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부터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인격을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로 모세는 하나님이 다른 행위들은 절대로 호의를 가지고 열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이전에 받아 주시고 인정하신 그 행위자를 보고 호의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전혀 놀라울 것이 없는 사실은 바로 이것이니 인간은 외관적
인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심중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이다(삼상16 ;7).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들의 진정한 마음에서 드리는 것 외에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마음 속에서 나오지 않은 제사를 드린다면 사람들의 눈에는 제 아무리 아름답고 놀라웁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악한 자의 제사로 여기고 거절하시며 그것을 싫어하신다. 왜냐하면 만약 영혼이 타락되어 있는 자는 단지 만지기만 하여도 모든 사물들이 불결해지며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불결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지지 않으면 그 물건들은 깨끗하고 정결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정결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가식된 의 거절하실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손이 죄투성이라는 사실을 들어 그분은 반대하셨다(사 1 , 15).
학개도 이와 똑같은 이유로 위선자들을 대항하여 싸웠다. 행위의 외관적()인 모양은 지나치게 육신적인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있으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이방인들도 모르는 자들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대하여 온전하고 잘 절제된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시들을 보면 거기서도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손을 필수요건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도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손을 깨끗이 썼는 엄숙한 의식이 있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제 다른 곳에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성령님이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게 하사"(행 15 : 9)라고 한 사실파
거룩한 족장들의 경건성도 역시 그와 똑같은 류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여기서 히브리 저자가 아빌의 계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인의 것보다 월등하게 나온 것이었다고 하는 지론이 지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해야 하리니, 믿옵 외에 다른 수단으로 한 일들이 제 아무리 그 자체로는 설대하고 초와찬란하게 보일지라도 그리고 굉장히 의롭게 보일지라도 전혀 무가치한 것이며 오직 죄들의 무더기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것들이 죄로 말미암아 불결해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공격하는 결과만 내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오직 마음으로부터 우려나오는 내적인 순결성으로서만 즐겁게 해 드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서 지금 그들 두 사람이 자기들의 자유의지의 동작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상상해 오고 있는 자들은 부디 이 사실을 꼭 묵상해 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이 무료로 인간을 의롭게 여기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믿음으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호의를 받지 않으면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해 볼 점이 없다는 사실은 확정된 것으로 받아 들여
야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점도 지 못 않게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류가 하나님에게는 중오 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것 밖에는 전혀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더우기 신앙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성령의 특별한 조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단순한 은혜로 '보호' 되고 있으며
마치 우리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같이 지켜 주셨다는 사실을 쉽사리 추론할 수가 있다. 그런 외미로 베드로도 말하기를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의 신물을 진정으로 갖기를 원하도록 인간의 마음 속에 신앙을 갖게 하시지 않으면 그 말씀과 실제 생활이 일치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순수성이 민음의 결과가 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이 믿음없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상()주시는 본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는
데 이것을 순결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답답하고 어리석은 철학의 과오이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설령님이 중로 전례중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메잘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다른 자들도 냉정하게 말하면서 가르치거를 증생의 선물에 근거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질결하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자들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나하면 그들은 진리의 절반을 삭제해 버릴뿐만 아니라 기초가 없이 건물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 때문에
값없이 주시는 화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다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분의 백성을 재생시켜서 그분을 완전하게 섬길 수 있게 하시지는 않으신다. 인간의 어떤 공적이라도 속죄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으신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합법적인 씻는 의식이 수반되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고 싶을 때마다 반드시 다른 곳에서 정결이 촉구되어져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그들이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시고 마침내 우리의 순종에 관심을 가지시고 받아 주실 것이다.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 가인은 위선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듯이 그 자신도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그는 형식적인 제사를 드려서 빚을 탕감 시켜주는 자로서 하나님을 진정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조금도 자신을 하나님에게 이 헌신할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제사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가치하고 하나님 자신을 비웃는 그런 위선자를 보실 때 그분이 그것을 중오하시고 도저히 그
것을 견딜 수 없으시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또한 그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계기되는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러지 않고 멀리 철수시키면서 형식적으로 바치는 행위들은 여지없이 멸시하시며 배칙해 버리신다는 것은 알 수가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신을 그분에게 바치는 것이 제일 먼저 바라시는 그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하는 증거로서 우리의 행위를 찾고 계시니 그것이 둘째로 그분이 바라시
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롱하고 있는 모든 허구에 찬 이야기들은 모두가 불신의 결파에서 나온 것이다. 더우기 여기에 자존심이 추가되고 있으니 중재자의 온혜를 멸시하고 있는 불신자들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어리석게도 상상하기를 가인이 잘 익은 곡식 이삭을 드리지 않고 빈약하게 절반 정도밖에 여물지 않은 곡식을 드려서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가인의 제물은 열남(NM)될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죄악이 점점 더 깊이 그리고 결숙이 감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언급해 온 마음의 부정함을 점점 더 깊이 숨기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
해 보면 그 사실은 고기가 타는 강한 냄새가 하나님을 달래서 아벨의 제물을 받아 들이게 하셨다는 것이 도저히 어불성실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타는 냄새가 아니라 믿음의 좋은 향기가 골고루 침투되어 그 제물들이 달콤한 향기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 여기서는 다음의 질문이 제기되고 있으니, 언제 가인이 자기 동생의 제물이 자기 것보다 더 하나님께 호감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이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방법에 따라서 곧잘 점싱술에 의지하면서 상상하기를 아벨의 제물은 하늘나라의 불로 배워졌다고 한다. 그려나 우리는 그런 제 멋대로 지어낸 주장에 말려들어 기적들을 발명해 내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므로 유대인물의 우화들을 밀리 추방시켜 버려야 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그런 류의 기적들에 대해서는 전혀 성경의 증거를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보다 가능성이 있는 점은 가인이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심판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알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 제사가 자기 자신보다는 그의 동생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동생에게는 기뻐하시고 자기에게는 불쾌하게 여기셨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도 위선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전혀 그 이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이 오직 이 세상적인 축복 뿐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더우기 가인의 인격은 우리에게 악인의 모양을 묘사해 주고 있는데 그 악인은 외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을 무척 원하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성도를 가운데서 가장 좋은 자리를 가로채기를 잘하고 있는 자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사실상 외적인 행위들로 하나님 앞에서 잘 보이려고 분투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의 가식으로 포장되어 있는 한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드리는 것에 없으며 단지 가인 앞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열열한 종교적인 예배를 드린자는 신실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으며 오직 가면 뿐이다. 후에 그들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전혀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의 원한을 터뜨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 놓는 것만이 아니라 분노를 폭발시켜서 그들이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그분의 보좌 위에서 끌어내며 타도하는 것도 불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위선자들의 내적인 교만이 그토록 지독해서 외관상으로는 순종의 형식을 갖고 자기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무감을 지워서 꼼짝하지 못하게 붙잡아 두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도저히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아침으로 그분을 살살 달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한편 그들의 가식적인 하찮은 것들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며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갈채를 보내지 않으면 그분이야말로 자기들에게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망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제물들에 대하여 보잘 것 없으며 무가치한 것이라고 선언하실 때 그들은 먼저 무덤거리기 시작하다가 화를 내는 것이 그들의 상태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불경건함은 하나님이 그들과 화목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조건만 내세우면
서 하나님과 흉정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거절당하면 그전부터 하나님을 대항하여 품고 있었던 맹렬한 분노로 불타게 되어 마침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것을 쏟는 것이다.
그래서 가인이 하나님에게 화가나자 그의 분노가 전혀 죄가 없는 자기 동생에게 부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모세가 '안색이 변하니 라고 말할 때 ------안색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는 단수 의미를 복수로 표현되어 있다------ 그가 단순히 갑작스런 격렬한 화가 났다는 것뿐만 아니라 오래 오래 지속되는 슬픔으로부터 사악한 감정을 간직하여 전투를 하며 그것을 발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6절이하의 주석은 추가로 수록될 예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