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선생주석/마태복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6:25)

은기철 2025. 4. 26. 09:01

1. 성경 (마6:25 ~ 3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7)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이 강론 전체에 걸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놓고 지나치게 염려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책망하심과 동시에,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을 제시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다고 해서,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서 모든 걱정과 근심을 다 제거하시고자 하셨다는 듯이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걱정과 근심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지니고서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벌로 가하신 참상(miseria) 중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지나친 염려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단죄되는데, 그 중 하나는 지나친 염려라는 것은 사람들이 합당한 정도 이상으로, 또는 그들의 부르심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염려를 함으로써 쓸데없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친 염려라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한도를 뛰어넘어서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들 자신의 노력과 분투를 지나치게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소흘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같은 약속을 기억하여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을지라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쉴 수 있고, 잘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127:2).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해서 수고와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삶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함으로 인해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을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나 염려하여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쉽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부르심이 요구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정도만큼 수고하여야 하고, 우리 자신의 결핍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염려는 별 생각 없이 무심하게 살아가는 것과 믿지 않는 자들이 쓸데없는 근심으로 스스로를 죽이는 것 간의 중간 정도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그가 온갖 종류의 염려를 금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불신으로부터 생겨나는 염려만을 금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마치 매 순간마다 먹을 것이 없다는 듯이 가난이나 굶주림을 두려워하여 떠는 자들이 하는 염려이다.

 

"25.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 이것은 큰 것을 들어서 작은 것을 말하는 논증 방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었는데, 이제 여기에서는 그 이유를 제시하신다.

목숨 자체를 주신 하나님은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이 우리에게 결핍되도록 그냥 놔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마치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내팽개쳐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음식이나 의복을 주실

것임을 믿지 않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결코 작지 않은 모욕이다. 우리에게 목숨을 주신 분이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리라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는 자는 그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차고 넘치게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에 대

하여 전혀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과 관련된 어떤 두려움이나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목숨을 반드시 돌보아 주실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26. 공중의 사 보라" ;  이것이 내가 앞에서 말한 처방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도를 벗어난 온갖 염려의 어머니는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탐심을 고치기 위한 유일한 치료책은 우리를 돌보시겠다고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도도 믿는 자들에게서 탐심을 제거하기 위 해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

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재확인해 준다. 이 권면의 요지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 중에서 그 처지가 아무리 비천한 자일지라도 그 사람을 무시하고 돌보지 않으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

나님을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6.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 우리는 이 말씀을 세심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들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새들의 목숨이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고, 하나님은 그의 섭리를 새들에게까지 뻗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해 본 자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들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먹을 것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반은 데다가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 받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임을 기대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게 될 것이다

 

"26.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 .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게으르고 나태하라고 격려하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가 의도하신 것은 동물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차고 넘치게 공급받는 것을 생각할 때에 다른 모든 수단들이 다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만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는 것이다누가는 새들(타 페테이나)이라는 단어 대신에 까마귀들(스코라카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부르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147:9)라는 시편의 구절을 간접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 시편에서 다윗은 까마귀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에 의해서 버림을 받아서 하나님에 의해서 길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까마귀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 외에 그 이상을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거의 언제나 먹을 것에 관한 지나친 염려와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잘못을 단죄하시는데,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자신이 행하여야 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서슴지 않는 신성모독적인 무모함을 보이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10:23)라고 말한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는 백 명 중에서 한 명을 만나기도 힘들다. 그리고 뭔가를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은 어떤 일을 할 때에 서슴없이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그들의 안중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광기어린 경솔함과 무분별함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얻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그 의미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수고는 쓸데가 없고 열매를 맺지 못하며, 우리의 모든 염려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수고와 염려로 혼자 애쓰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누가는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불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교만도 책망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29.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 이것은 풀과 꽃들 속에서 영화롭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사람들이 그들의 부와 권력으로, 또는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 자들은 그들이 계속해서 오직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만 한다면, 다른 모든 수단들이 다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그들이 온전히 만족하는 에 대한 필요한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

 

"30. 믿음이 작은 자들아" ;.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이 결핍되어 있다거나 약하다고 책망하신 것은 합당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땅에 밀착된 우리 자신의 관점과 생각으로 말미암아 현세의 삶에 관한 염려에 의해서 더 강력한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모든 일이 우리의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을 더욱더 드러내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에는 꽤 좋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현실적으로 가난의 위험이 닥쳐오면 두려워 떠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