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1)

은기철 2024. 7. 10. 07:46

1. 성경 (고전 8:1 ~ 1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1)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2)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3)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4)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5)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6)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7)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8)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9)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0)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1)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2)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13)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바울은 그가 6장에서 간단히 취급하고, 자세히 그 내용을 다루지 않았던 다른 문제로 이제 넘어가고 있다. 그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탐욕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에 그리고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 등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 말하는 6 장의 그의 말의 일부분을 마칠 때, 그는 여기서 부터  곧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여기서부터 탐람하는 자와 결혼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포착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그는 ‘중간적인’ 일들에 대하여 그가 나타낸 당연한 언급을 이제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자유가 ‘중간적' 인 일들에 대하여 얼마나 수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중간적인 일들'이란 나는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중립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용하도록 허락하여 주신 것으로 여긴다. 더구나 우리는 자유와 허가 사이의 구별을 지키기 위하여 그것들을 절제있게 사용하여야 한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다른 것에 앞서 한 특별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면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아주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이 그들의 신들을 경배하는 종교적 축제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그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들을 무분별하게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손을 공포의 전율 속에 들어 올리는 원인이 되었으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여 (許與)하신 자유를 악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  바울은 그들이 질문하려는 것이나 혹은 그것에서 흠을 잡으려는 것을 무엇이나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자유롭게 양보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너희들이 어떻게 너희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고 있는지 알고 있다. 즉 너희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변명 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자신들이 지식이 있으며, 너희들 중의 그 누구도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잘못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파선한 형제들을 관망만 하고 있는 그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주장할 바를 하도록 용납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들의 변명이 무익하고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 .바울은 사랑(caritas)이 없을 때에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그 결과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화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데,  지식으로 머리만 잔뜩 부풀어 가지고 모두가 오만을 부리는 그런 때에,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른 한편 그 간결성 때문에 이 귀절이 쉽게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사랑의 표현이 부족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며, 사실상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다. 사랑과 공공연히 반대되는 그런 어떤 일이 얼마나 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만하는 이 지식은 분명히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오만으로 가득 부풀게 하며,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도록 그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형제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고, 그들의 일상을 살펴보도록 격려하여 준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지식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관심에 조금도 감화력을 갖지 못한 지식에 저주 있으라는 나의 말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못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잘못이 지식의 초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지식 있는 사람들이 이주 때때로 교만하고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사림들을 경멸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바울이 지식 그 지체가 교만을 낳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을 경외함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의 결과에 대하여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을 주춧돌 위에 올려놓기 위하여 하나님의 모든 은사의 유익을 취한다. 이렇게 부자, 영예로운 자, 고관의 지위에 있는 사람, 귀족 출신, 미모와 이와 비슷한 좋은 모든 조건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부풀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좋은 은사를 가진 데 대하여 잘못된 확신으로 부풀어 있으며, 할 수 있는 한 교만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항상 모든 경우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재산가와 미인 명성을 갖춘 사람, 고관, 귀족, 이런 사 람들이 여전히 겸손한 그대로이며,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인해 조금도 교만을 부리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급한 그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데, 모두가 동의하듯이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첫번째에서는 그것이 부정하고 어리석은 것이 되었다.

 

두번째로는 그 비난을 사실상 종용 처인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나쁘다고만 한 그 사람들을 방면(放免)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뜻은 이렇다.  즉,  만일 사람들을 교만하게 한 것이 부요한 재산이라면, 그리고 만일 부자가 교만하다면 비난은 그에게 돌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악은 바로 그 부요함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그 자체로서는 선한 것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종교가 지식을 위한 오직 단 하나의 유일한 기초가 되기 때문에 불신자에게 관계되는 한 그것이 무익하고 허무한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본적인 조미료이며, 이 사랑이 없이는 그 지식이 무력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형제애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없는 곳에서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지식 그 것보다는 지식인 것처럼 생각되는 그 무엇이며, 또한 이런 사람들에게서 가장 지성인인 것 같은 것을 보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칼이 미친 사람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보다 더 지식 그 자체를 비난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예술과 양심의 기능이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고 그것들이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 조금도 기여하는 것이 없다고 하여 모든 예술과 양심의 자유를 맹렬하게 반대하는 어떤 극단주의자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난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더  자기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이어서 그들은 ‘우리보다 더 큰 교만은 없다' 는 옛 격언을 실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가진 지식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사람이며, 오만한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자들이다. 여기서 바울은 지식 그 자체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그 지식이 낳는 이기주의와 오만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우리가 불확실하고 의심에 가득 찬 회의주의자가 항상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거짓되고 위선적인 겸손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에 대한 자세를 취함에 있어서 우리가 훌륭한 일을 하고 있음을 입증할 때, 우리는 참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에 대한 과대평가로 말미암아 머리가 부풀어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은 수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또 이런 사실에 크게 도취되어 있는 사람은 사실은 그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시람이다.

 

참 지식에 대한 기초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며, 그 주춧돌 위에서 우리를 멀리 떠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교만이 있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말씀이며, 나의 소원은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가슴 깊이 새겨서 참 올바른 지식의 법칙을 잘 지키기를 원한다.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 이것은 최상의 전술이며, 이 말씀 속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그리고 참으로 그것은 지식과 모든 다른 칭찬할 만한 것을 또한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하는 모든 것은 적절하게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인정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에 대 한 사랑 안에서 세례가 베풀어지지 않았다는 교훈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결론에서부터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그런 은사를 보증할 수 있는 그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5:17)에 나타난 그 방법은 이렇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바울이 의미하는 바에 의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 없이는 아무리 외형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무가치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어떤 표준을 소유한 것을 나타내며, 혹은 그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인생에 관한 책과 경건한 자의 목록에서 모든 교만을 제거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 바울은 그가 8장 초두에서 시작하였던 귀절로 다시 돌아가고 있으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변호하고 있었던 그 변명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전체적인 문제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을 합리화 한 사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또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한 까닭에 바울은 일반적인 말로써, 오만으로 가득 찬 지식과, 사랑이 없어 호소력이 없음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요점으로서, 그들이 자만하 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상은 인간의 두뇌에서 지어낸 공상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상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헌신은 어리석고 환상적이며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므로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졌던 음식물을 먹어도 부정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이유이며, 바울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나쁘다는 것으로 일단락 짓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사람이 작용할 수 있는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악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씀에 관한 한, 에라스무스(Erasmus)는 ‘형상은 실존을 갖지 않는다 라고 풀이 한다. 나 자신은 벌게이트(Vulgate)역 처럼, ‘무'라고 풀이하고 싶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만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무(無)이기 때문이다.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가 불가피하게 따른다.

 

즉 만일 우리의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면, 자연히 우상은 어리석은 공상이고 단순한 허구일 뿐이다. 바울이 ‘또한 하나님 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고 말할 때 나는 ‘또한’ 이라는 제사를 ‘이유'를 나타내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무(無)라는 것은 그것이 나타내는 것에 따르는 가치가 부여되어 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봉사를 의미하는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존하지 않는 잡신들에 대하여 오히려 더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신중하게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즉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어떤 가시적(可視的) 표정으로써 나타낼 수가 없으므로, 그런 것이 하나님 경배에 사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상이 참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워졌거나, 혹은 거짓 신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워졌든 간에,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잘못 된 어느 피조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가 우상을 ‘거짓 스승' (합 2 : 18)이라고 부르는 이 유이다. 왜냐하면 그 우상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습을 그린 것처럼 하여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가진 거짓 이름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뎬; 아무것도 아닌 것' 은 우상의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상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인데, 왜냐하면 결국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우상은 이렇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나 가치성에 관계되는 한, 그 우상은 무익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  바울은 말하기를 ‘그들이 이름을 가졌을지라도 그 배후에 실체가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여기서 ‘칭하는 자’라는 말을 사람들은 높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하늘에 나 땅에 나' 타고 말할 때, 또한 일반적 인 구분을 사용하였다. 하늘에 있는 것처럼 성경이 태양, 달, 그리고 다른 별들을 부르는 것 처럼 , 하늘의 천사들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창조 되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들이 어떻게 거룩한 존재들로부터 옮겨졌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늘이나 땅에나' 라고 말할 때, 또한 일반적인 구분을 사용하였다.  하늘에 있는 것처럼 묘사죈 신들은 성경이 태양, 달, 그리고 다른 별들을 부르는 것처럼, 하늘의 천사들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창조 되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들이 어떻게 거룩한 존재들로부터 옮겨졌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태양은 우리의 종이고, 달은 우리의 시녀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신들처럼 숭배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시 땅 위에 있는 신들로 묘사된 것들은, 엄밀히 말하면, 남자와 여자들로 종교적인 의식이 그들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프리니 (Pliny)에 의 하면, 인류의 큰 경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들은 그들이 신들로 경배를 받기 위하여 종교적인 의식에 의하여 블멸화 되었다는 것이기 때 문이다. 예를 들면 쥬피터 (Jupiter), 마즈(Mars) (Saturn), 머 큐리 (Mercury), 아폴로(Apollo) 등은 죽었지 만,  사후(死後)에  그들은 신들의 조합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그들 이 신들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좀 더 후대에 와서는 헤라클레스, 로뮤러스, 그리고 끝내는 시저(Caesars)에 게 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다. 사실상, 인간은 생명이나 불멸을 그들에게 부여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  참으로 지구 위에는 다른 신들, 곧 황소나, 뱀, 고양이, 양과 그리고 애굽 사람들 가운데는 마늘 같은 동물이나 생명이 없는 것들에게까지 신으로 섬기고 있으며, 또 로마인들 사이에는 경계석(境界石)인 터미너스(Terminus) 신과 또 돌신(石神)인 베스타(Vesta) 여신까지 있다. 이런 것들은 명목 상의 신(神)일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종류의 신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 비록 바울이 이 런 것들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말할지도 모르는 것을 예상한 것이타고 말 할지라도, 그러나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동시에 그런 방법으로 가르치 고 있을지도 모르는 변명에 대하여 그는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 님에 대한 최대의 특칭인 것으로부터 그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곧 ‘무엇이나 그 기원을 어떤 것에 두거나 혹은 그 어떤 것 이외에 두는 것, 또는 그것 밖에 두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만물은 그 기원을 한 위(位)에 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 유일하신 위 (位)가 곧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유일하신 그 분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만물에 존재를 부여하시고,  근본적인 근원이신 그로부터 만물이 나온다. 그러나 만물이 그에게로부터 나오는 유일하신 한 위(位)가 계시며, 그러므로 그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에이스 아우톤)라고 덧붙일 때에,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귀절은 뭔가 다른 것, 다시 말하면,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께로부터인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서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에이스아우튼'의 뜻이 로마서 11장 36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앤 아우토-'의 탈격의 위치에 사용되고 있으며, '엔 아우토-'는 사도들의 서신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의미하고 있다. 이 해석은 그가 곧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고 있는 언급에 의하여 지지를 받고 있는데 곧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성부와 성자에 대한 공통적인 활동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원하였으나, 그 위 (位)들에 적합한 구별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아버지 안에서 생존하고 있으며, 성자를 통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부는 참으로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 연합되어 있는 것 같이, 그는 오로지 그 분만을 통하여 우리에게 존재의 능력을 부여하시고 있다. 

 

"한 하나님~~~~~" ; 이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적절한 말씀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상관되고 있다는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적용되는 모든 것이 특별한 언급이 3위에 주어지지 않을 때는, 당연히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의 위(位)가 성자의 위와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이 귀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들의 특별한 기능에 대한 구별을 짓는 것이 아주 옳은 일이다. 성욱신(成肉身)하신 후의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하늘과 땅을 홀로 통치 하시기 위하여, 아버지께로부터 만물을 다스리실 주권과 능력을 받았으며, 성부께서는 그 아들을 통하여 그의 능력을 행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 한 분이신 이유이다. 그러 나 그가 홀로 주권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모든 세상의 질서가 철폐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권세가 정치적인데 반하여,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주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神)이라 칭하는 자가 많이 있으나’ 라고  좀 전에 그가 말한 것에 일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임금들이나 상류 계급과 권세를 가전 다른 자들이 아닌,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떤 명분도 없이 탁월함이나 지배력을 그들에게 돌리는 우상들이나 귀신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의 종교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명예와 경의를 많은 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진술울 방해하지는 않는다.

 

"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  한마디로, 그는 그들이 만일 형제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입술로만 하는 것과 같은, 그가 앞에서 소개한 모든 것을 논박하고 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라고 그가 앞에서 말하였을 때, 그는 자유를 남용하는 사람들을 꾸짖은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는 지금 그들이 자신을 적용해야 할 많은 약하고 무지한 사실로 들러 싸여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 것 과 같다.  "하나님 앞에서는 너희들의 견해가 완전히 옳다. 그리고 만일 너희들만 세상에 산다면,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다른 음식물로 먹어도 그것은 너희들 자유이다.

 

그러나 너희들과 관계를 갖고 있는 너희 형제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들은 그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들이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들의 지식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무지에도 관계가 있다.  이 대답은 특별한 주목을 끌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우리 각자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자신의 견해만을 너무 옳다고 주장하고, 또 그 사실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공연하게 공적으로 처리하여야 하는 문제가 대두 되었을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양심 문제를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들의 형제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여야 한다.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 그들의 무지는 어떤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우상에 대한 어떤 미신적인 믿음에 의하여 금지되고 있는 그들의 어떤 존재 안에 있거나, 혹은 그들의 경건치 못하고 우상숭배적인 헌신(고기) 속에 어떤 덕이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바울은 참 종교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 우상 숭배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우상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헌신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직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상이 참 실상이므로, 그 우상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헌신은 그러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일단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들도 이미 순결한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만일 그들이 그 고기를 먹었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의 부정에 관련되어 있었으며, 어느 면에서는 그들 자신이 우상과 관련이 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느꼈다. 우리의 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약한 형제들이 담대하여지도록 용기를 주어야 하며 그들의 양심에 저촉되는 어떤 것을 우리가 하였을 때,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정죄하고 있는 바로 그런 장애물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진느니라" ;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실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 어떤 일을 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주저하는 양심으로 하는 일은 그 불확실성 때문에 하나님 모시기에 죄가 된다. 그것은 바울의 로마서 14장 23절에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양심을 따라 행하지 않는 자는 지옥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라는 평범한 말 속에 진리가 들어 있다. 선한 행실은 하나님 경외와 순결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므로 다른 한편, 행위가 어떻게 선하게 나타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만일 내면적인 마음 자세에 악의가 있다면 그 행위는 타락된 것이다.

 

양심에 처촉되는 어떤 행위를 담대하게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멸시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면 만일 당신의 마음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있다면 당신은 손가락을 움직여 경멸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역시 고기에 대하여 우리가 마음에 명심하여야 할 것이 더 있는데, 고기는 말씀으로만 우리에게 성별된다는 것이다.  만일 말씀이 부족하면 부정이 계속되고, 부정만이 판을 차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물이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불순한 방법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마음이 믿음으로 순화되는 것처럼, 믿음을 떠나서는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8. 식물은 우리틀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  이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또 하나의 변명이었으며, 또 변명일 수도 있었다. 즉 하나님 경외는 음식물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자유함이 우리의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하여야 한다’ 고 대답하고 있다. 이 말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식물을 자유로 먹도록 하셨으므로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될 때, 사랑으로 말미암아 통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논증은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그 일부분에 블과한 외형만을 보고 판단하기 대문인데,  어떤 문제가 실제적인 생활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에는, 그 문제에 내포되고 있는 적절한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께 추천하지 못하며, 바울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추천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그것을 수정하고 있으며,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죄일 것이다.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  그는 만족하게 잘 먹은 위(胃)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음식물을 먹은 사람은 굶주린 사람보다 분명히 배부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의(義)에 관계되는 한, 우리가 먹었든 먹지 않았든, 우리는 얻은 것이나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의미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모든 종류의 금욕이나,  혹은 분별 없이, 모든 것을 먹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금주와 절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데 반하여, 방종과 무절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외적인 일에 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중립적인 문제들(res medias)은 그 자체들로서는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그가 입으로는 다른 일들을 말하면서도, 그들의 논쟁을 예기하였을 때, 그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안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마지막 절에서 간단히 언급한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9. 그런 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  그는 그들의 자유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자유의 남용이 약한 자들을 좌절시키지 않도록 그 자유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경건에 대한 굳건한 기반이 없는 연약한 자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그의 염원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들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는 것이 보통이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원하시고, 참으로 요구하시고 있다. 동시에 그는 폭력을 행사하기 원하는 그리고, 그들의 관할 하에 우리의 자유를 제압하고자 하는 난폭한 거인들이 완전히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연약함으로 인하여 법죄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두려위 할 필요는 없으나, 그러나 동시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흠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주의하여야 한다. 우리는 장애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곧 알게 될 것이다. 

 

"10. 지식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것을 누구든지 보면~~~~" ; 이 문장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얼마냐 자유를 향유하고 있었는가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게 되면 그들은 주저 함이 없고 가서 그 불신자들과 함께 그 제물을 먹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의 이런 행위가 초래하는 나쁜 결과에 대하여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문장의 첫 부분에서 나는 ‘지식 있는 네가’라는 말을, ‘지식 있는 사람’ 이라고 대치한다.  둘째 부분에서는 ‘약한 자’라는 말에 "그렇지만'' 이라는 단어를 덧 붙인다. '나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울의 사상을 더 분명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네가 지식 있는 것을 인 정하지만, 그러나 너를 보는 지식을 갖지 못한 어떤 사람이,너의 본을 따서 너의 행위 그대로를 따르게 용기를 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그런 행위를 할 마음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인 줄 지금까지 줄곧 알아왔는데도,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변명거리를, 그 사람에게 제공하여 준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울은 양보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약함'이라는 것은 무식 하거나 혹은 동요하는 마음을 뜻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 에 대하여 설명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 장애물을 다른 사람들의 모본에 영향을 받으며,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하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 그런 무지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생각은 바울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비난하고 있는데 (내가 말한 것처럼 ), 그 이유는 무지한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율 배반하도록 그들을 충동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일에 무모하게 돌진하도록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력을 얻는다'는 여기서는 ‘격려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담력이 건전한 교훈에 근거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파멸적인 것 일 수밖에 없다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 우리는 어떤 일이 당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있고, 또 양심에 저촉되는데도, 사람들이 보통 그것을 가볍게 물리쳐 버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주의하여야 한다. 우리가 우리 생애 전체를 통하여 이루려고 노력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다 부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물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의 양심에 저촉이 되는데도 그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외적 행위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으로 양심을 범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배치되는 길로 계속 나아갈 때마다 우리 자신이 불행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 하도록 하자.

 

그것은 별 문제로 하고, 나는 이 문장을, ‘너의 지식 때문에 그가 멸망한 것이 아니냐?' 라는 의문문으로 생각하고 생각하고 싶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너의 지식이 너의 형제를 멸망케 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 너는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단순히 옳은가에 대한 지식이 있느냐?' 그는 ‘형제’ 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교만과 잔인한 무관심을 계속 나타내는 그들을 정죄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가 뜻하는 것은 '네가 멸시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약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너의 형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의 형제에 대하여 관심 울 기울이지 않을 때 너의 마음은 강퍅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타나는 내용, 곧 무지하고 약한 자도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았다는 말씀 속에 더 큰 위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자가 멸망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친히 죽음도 주저하지 않으셨는데 그런 귀한 값을 치르고 구속 받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지푸라기 하나 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비열한 일이 아닐 수 없음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기억해야 할 말씀으로써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 형제들 모두 뿐만 아니라 각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들 각자를 위해서 피를 훌리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얼마나 우리 형제들의 구원이 귀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틀, 지어……" ;·만일 모든 연약한 사람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피 값을 지불한 것 이라면 한 조각 고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받은 형제를 죽음으로 급히 몰아가는 책임을 지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가 그에게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멸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공연한 모욕이다. 우리는 이미 약한 양심이 어떤 악을 행한 담력을 얻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주 무모하고 어리석게 어떤 일을 감행하여 갈 때에 연약한 양심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  바울은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 때문에 교만을 부리는 자들을 신랄하게 책망하기 위하여 그는 우리가 형제를 범죄하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음식물을 단순히 멀리하기보다는 고들의 생명을 위하여 그 음식물 먹기를 포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나타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따를 것울 말하고 있다. 그는 물론 과장법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다른사람들속에  정상적인 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한, 일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약한 자를 실족케 하는 이유 이외의 것으로는 자신이 소유한 자유에 대한 향유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자유는 사람의 법칙에 따르는 한도 내에서만,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신중한 생각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형제들을 위하여서는 자신들의 권리를 추호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게 적용되기를 바란다.  나는 또한 바울이 가르쳤을 뿐 아니라, 친히 자신이 모범으로써 우리에게 제시한 그 교훈에 이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원한다. 바울은 얼마나 선구자적인 인물인가! 그러므로, 바울이 형제들을 위하여 이런 정도로까지 기쁨으로 자신을 훈련하는데, 우리들 중의 누가 그와 동일한 상황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이 교훈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어떤 사람들의 잘못된 주석으로 그것이 타락 된 곳과 또 다론 사람들의 잘못된 의 곡(至曲)을 제외하고는, 그 의미 자체에 관한 한, 아무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잘못은 '범죄하게 하다' 는 단어를잘못 곡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범죄하게 하다’를  '미움을 입다'  혹은, '사람의 마음을 성나게 하다', 또는 그와 거의 비슷한 ‘그들의 마음을 거스르다'  또는 ‘그들에게서 호의를 발견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맥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형제의 길에 장애물을 놓음으로써 그에게 나쁜 본을 보여주어 바른 길에서 형제를 돌아서게 하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거나, 혹은 그의 타락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인간의 바른 편에 서는 것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의 타락을 막으며 그들이 바론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지혜롭게 안내 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 하는 사람들에 관한 한,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첫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더욱 나쁘고 건방진 자들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신적인 사람들을 '범죄하게' 할지도 모르는 경우에 있어서 중용적인 일들을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귀절에서 바울은 범죄를 증대케 하는 모든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은 범죄를 유발하는 분명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 자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예외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을 삼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만일 우리가 고기를 먹었다면, 그들이 언제 그것을 발견하게 될지 결코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들이 ‘죄를 범하는 원인이 되다' 라는 동사를 이해 하는 잘못된 방법을 무시한다. 그러 나 그들은 그들이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는 바로 그런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바로 그런 시간에 그들의 지식을 부적당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바울이 공격하고 있는 그 사실에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잘못을 크게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망에 대한 근거는, 만일 교훈이 이전에 벌써 주어졌다면 없어질 것이다. 다시, 바울은 우리가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즉각적이고 분명한 위험이 있는 곳을 예외로 하고는 '범죄'의 원인이 되지 않을 것을 미리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려 한다.

 

그들은 니고데모의 모방자들이며 , 그들은 자신들이 불신자들의 우상 숭배에 참예 하는 데 대한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의 잘못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한 그들은 동일한 일을 할 필요가 있는 그런 입장으로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들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악한 위선에 대한 정죄는 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정죄의 방법 이상으로 더 분명하게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모본으로서 연약한 자들을 우상 숭배케 하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나 또 사람에게 이중적인 심각한 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잘 못된 믿음이 무지한 마음에서 연유됨이 틀림없으며, 또 솔직하고 꾸밈없는 그것에 대한 정죄가 그들을 ‘범죄케' 할지도 모르는 경우에 있어서 후자는 우상 숭배의 문제에 있어서 선모할 것이라고 자신들을 변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들이 그들의 건방진 생각을 논박하는 수고를 갖는 영예를 허락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나의  독자들에게 바울 당시와 오늘 우리 시대를 비교하도록 권고하고 싶다. 만일 약한 자들에게 그런 장애물이 되는 미사와 다른 증오할 것들이 제시될 가능성만 있다면 말이다